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50)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50화(50/183)
<50화>
“그럼 남궁인지 어디인지에서 지내는 건가, 이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잠자리에 들기 위해 침대에 눕자 사람으로 돌아온 르귄이 대뜸 물었다.
“네. 국빈관에서요.”
필로멜은 이불을 목 쪽으로 끌어당겨 덮으며 대답했다.
“흐음. 남쪽 건물이 여기보다 신성력은 약하던데 잘됐네.”
“그런가요?”
“그런데 굳이 시중까지 물릴 필요 있어? 뭐, 나는 다니기 편하겠지만.”
“사실 그것도 이유 중 하나예요. 앞으로 우리가 자주 만나게 될 텐데…….”
필로멜이 하던 말을 흐렸다.
이상하게 기분이 찜찜했다. 마치 무언가 중요한 걸 잊은 듯한 느낌이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으음…… 제가 뭐 빼먹은 게 있지 않나요?”
“글쎄. 딱히?”
무심히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는 르귄의 얼굴에서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그 순간 필로멜이 이불을 걷어차고 몸을 일으켰다.
“앗! 제레미아!”
암흑 공간에 넣어둔 제레미아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 * *
암흑 공간에서 나온 제레미아는 아직도 사지를 구속당한 채였다.
“……제, 제레미아?”
필로멜의 부름에 감긴 눈이 번쩍 뜨였다.
그가 새파란 눈으로 무시무시하게 그들을 쏘아봤다. 장난 아니게 화난 듯했다.
원래 계획으로는 유스티스와 대화만 나누고 돌아와 제레미아를 풀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엘렌시아가 끼어들고 카트린의 문제가 불거지면서 제레미아가 뇌리에서 잊혔다.
이건 좋지 않다. 호감을 사기도 전에 미움부터 받을 판이었다.
“어, 얼른 풀어주세요…….”
필로멜은 르귄을 재촉하며 그의 등 뒤에 쏙 숨었다.
“…….”
속박이 풀리자마자 날뛸 줄 알았던 제레미아는 웬일인지 얌전했다. 하지만 필로멜을 향한 험악한 눈길을 거두지는 않았다.
“눈 제대로 안 떠? 필이 무서워하잖아.”
“…….”
부친의 말에 반항이라도 하듯 눈자위가 더 삐죽해진다.
“어쭈.”
“그러지 마세요. 제가 잘못했는걸요.”
그녀는 용기를 내서 앞으로 나섰다. 손에 든 이른바 ‘비장의 무기’가 주는 용기였다.
“제레미아! 너무 늦게 꺼내줘서 미안해요! 약소하지만 사과의 선물인데 받아주실래요?”
필로멜이 내민 것은 접시에 놓인 쿠키였다. 언제든 출출할 때 먹으라고 그녀의 방에는 늘 주전부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흥.”
하지만 제레미아는 본체만체 고개를 홱 돌렸다.
“저녁 못 먹어서 많이 배고프죠? 일단 이걸로 요기하세요.”
여전히 요지부동.
“……꽤 맛있어요. 초콜릿도 아주 실하게 박혀 있고.”
필로멜은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안 줘?”
옆에서 르귄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저에게는 쿠키를 권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르귄 님은 제가 저녁 따로 챙겨드렸잖아요…….”
필로멜은 어쩐지 피곤해져서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답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고.”
이 사람이 돕지는 못할망정 초를 친다.
그런데 기회가 찾아왔다.
“정말이지 못 봐주겠군. 사람을 앞에 두고 대체 둘이 뭘, 헙.”
제레미아가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연 틈에 필로멜은 재빨리 쿠키를 하나 밀어 넣었다.
“너…….”
그는 인상을 구기면서도 착실히 입안에 들어온 음식물을 씹었다.
곧 새파란 눈에서 빛이 났다.
“……그럭저럭 먹을 만하네.”
“더 먹어요.”
“이런 거로 내가 넘어간다고 생각한다면, 헙.”
우물우물.
쿠키를 다 삼킨 후에야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됐어. 이제 그만 줘도, 헙.”
이번에는 세 개를 한꺼번에 밀어 넣었다. 볼 안 가득히 쿠키를 넣고 우물거리는 모습이 햄스터를 연상시켰다.
“목마르죠? 물도 있어요.”
“흠…….”
컵에 물을 쪼르르 따라서 내밀자 제레미아가 헛기침을 하며 받아 들었다.
‘쿠키를 먹으면 목이 타기 마련!’
그리고 몇 번의 ‘헙’과 ‘쪼르르’가 반복된 후에 굶주린 배를 채운 그가 말했다.
“……흠흠. 이따위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할 말이 있으면 얼른 하지.”
말과는 달리 위로 치켜 올라간 눈썹의 각도가 아까보다는 완만해졌다. 화가 다소 누그러진 것 같았다.
“많이도 먹네.”
깨끗이 빈 쿠키 그릇을 보며 옆에서 르귄이 불평했다.
하지만 안도한 필로멜에게는 르귄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까칠한 제레미아에게 달콤한 음식이 잘 통했다는 사실에 파도처럼 밀려 들어온 감동을 느끼는 중이었다.
빙결의 귀공자, 제레미아.
그는 다디단 먹거리에 사족을 못 쓴다. 그 자신은 부정하지만 말이다.
바로 <황녀 엘렌시아>에 나오는 정보였다.
책에서 엘렌시아가 달콤한 디저트로 제레미아의 단단한 마음의 벽을 허물었다는 이야기를 봤었다.
어디까지나 남자주인공 격인 인물은 나사르였으므로 제레미아의 비중이 높진 않았지만, 나왔다 하면 입에 달짝지근한 것을 물고 있을 정도로 그의 디저트 사랑은 열렬했다.
‘좋아. 이 점을 잘만 활용하면 제레미아를 내 편으로 만들 수도 있겠어!’
필로멜의 머리에 반짝이는 계획이 떠올랐다.
“듣고 있어? 왜 나를 가둬 뒀냐고.”
불만 섞인 토로를 내뱉는 제레미아에게 그녀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정말 미안해요. 많이 불편했죠? 제레미아를 그렇게 방치한 제가 다 나빴어요.”
“아니, 뭐…… 너만 탓하는 건 아니야. 결국 날 집어넣은 사람은 르귄이고…….”
이것도 책에서 나온 대로다.
제레미아는 잘못을 알고 반성하는 자들에게 모질지 못하다. 엘렌시아가 실수를 저질러도 제대로 사과를 하면 받아줬다.
“그래도 미안해요.”
“그래서 왜 그런 건데?”
제레미아의 눈썹은 이제 완벽히 제자리를 찾았다.
“그게 말이죠…….”
필로멜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 *
이튿날 아침이 밝았다.
“필로멜 님, 좋은 아침이에요.”
필로멜을 깨운 뒤 침실에 둘러보던 델레스 백작 부인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고양이는 어디 갔나요?”
필로멜은 하암, 하품하며 대답했다.
“창문으로 나갔어요. 밖에서 자는 게 편한가 봐요.”
“하긴 원래 길고양이였으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사실 르귄은 어젯밤 제레미아에게 뒷덜미를 잡혀 야외로 끌려나갔다.
필로멜은 제레미아에게 하루만 더 이곳에 남아 있어 달라 부탁했다.
“뭐? 그러니까 나를 가둔 이유가 나와 더 대화를 해보고 싶어서였다고?”
필로멜이 대충 둘러댄 이유를 들은 제레미아는 황당히 반문했다.
하지만 더 이상 화를 내거나 하진 않았다.
“……그런 거라면 그냥 말로 해. 고작 하루 정도면 못 들어줄 것도 없으니까.”
한숨을 내쉬며 가볍게 타박하는 그의 반응은 꽤 의외였다.
‘그렇구나. 말로 해도 들어주는구나.’
필로멜은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책 속에서 제레미아가 워낙 ‘필로멜’을 적대시했기 때문에 그럴 리 없다고 무심코 생각하고 말았다.
“어쨌든 밤이 깊었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하지.”
그렇게 말한 제레미아는 고양이로 변해 난롯가 자리로 향하는 부친을 집어 들었다.
“어딜. 댁은 나랑 함께 있어야지. 이 넓은 궁에 우리가 숨어들 빈방 하나 없겠어?”
고양이는 제레미아를 흘겼지만 필로멜이 그러라고 종용하자 결국 테라스 창밖으로 사라졌다.
내심 다행이었다. 아무리 고양이 모습이라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친부와 침실을 공유하는 건 영 불편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너, 잠꼬대를 되게 또렷하게 하더라?”
어제 르귄이 스쳐 지나가듯이 한 말로 인해 더욱 불편해졌다.
아직 그런 잠버릇이 남아 있는 줄 몰랐다.
어렸을 적에 유모가 필로멜에게 얌전히 못 잔다고 잔소리를 하긴 했지만, 그 이후로는 들은 적이 없어 잠버릇이 사라진 줄로만 알았다.
돌이켜 보니 그저 웬만큼 성장한 후로 그녀는 늘 혼자 자서 남들이 잠버릇을 알아챌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나도 모르는 새 속마음이 흘러나온다니…… 싫다.’
알리고 싶지 않다. 아무한테도.
“날씨가 정말 좋네요. 오늘 일정은 어떻게 할까요?”
그때 델레스 백작 부인이 활기차게 창문을 열며 물었다.
필로멜은 잠시 따스한 그녀의 낯을 물끄러미 보다가 대답했다.
“오늘은 종일 조용히 쉴까 해요. 아직 피로가 안 풀린 것 같아서요.”
“그렇다면 아무도 필로멜 님의 휴식을 방해 못 하도록 하겠습니다. 식사도 문 앞에 두라고 지시하면 되죠?”
“네. 고마워요.”
“푹 쉬세요.”
눈치 빠른 백작 부인이 재빨리 물러갔다.
부인은 정말 좋은 사람이다. 항상 자신을 신경 쓰고 챙겨준다.
‘하지만…….’
필로멜이 속내를 알리고 싶지 않은 사람에는 백작 부인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부인에게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단지 자신이 그녀에게조차 완전히 솔직해지지 못할 뿐이었다.
누구에게나 다정히, 하지만 누구에게도 가깝지 않게.
그게 여태껏 필로멜이 살아온 방식이었다.
‘……이런 내가 이제 와서 변할 수 있을까?’
필로멜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