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55)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55화(55/183)
<55화>
그녀가 원형 돌계단에 자리 잡자 제레미아도 하는 수 없이 옆에 앉았다.
연극은 한창 진행 중이었기에 두 사람 다 말없이 극을 봤다.
필로멜은 연극을 보는 한편, 마음 한구석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제레미아가 좀 더 마음을 터놓게 될 때를 노리자.’
여기까지는 책 속 전개와 나름 비슷했다.
시골 소녀였던 엘렌시아는 어느 날 숲속에서 마법사 제레미아를 만난다.
당시 제레미아는 마탑을 떠나 세계를 여행하던 중이었다.
숲에서 늑대를 만나 위험에 빠진 엘렌시아를 제레미아가 구해주게 되고, 엘렌시아는 그 보답으로 그에게 시장 구경을 시켜준다.
마침 엘렌시아의 마을 근방에서 열리는 장 중 제일 큰 시장이 열렸기 때문이다.
제레미아는 썩 내키지 않았지만 당장 필요한 물건이 있었기에 동행하고, 그곳에서 색다른 즐거움을 느낀다.
사람 북적이는 곳이 싫어 여태껏 시장은 제대로 구경해 본 적 없는 그였으므로 난생처음 겪은 즐거움이었다.
어느새 그는 엘렌시아에게 마음의 문을 활짝 열게 되고, 저도 모르게 자신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고 만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엘렌시아에게서 ‘그 말’을 듣게 된다!
필로멜은 ‘그 말’을 자신이 대신 할 생각이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가족의 정, 혹은 그 비슷한 게 생겨나지 않을까.’
설사 그러지 못하더라도 엘렌시아가 할 말을 필로멜에게서 미리 듣는 게 중요하다.
어떤 경험이든 처음 겪었을 때가 제일 인상에 남는 법. 두 번째는 처음에 비해 그저 그럴 확률이 높았다.
필로멜이 긴장된 얼굴로 제레미아를 슬그머니 쳐다봤다. 그는 세상모르고 연극에 빠져 있었다.
그때 우렁찬 목소리가 필로멜의 고막을 때렸다.
“오! 그대여! 그대는 왜 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그대의 무심함에 오늘도 나는 슬픔에 빠져 죽는다네.”
무대 위에서 여성 배우가 애절하게 부르짖고 있었다.그제야 필로멜은 연극 내용에 집중했다.
원형 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은 특별할 것 없는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였다. 두 연인이 평범하게 사랑하다가 집안의 반대와 주변인들의 중상모략, 그리고 사소한 오해로 인하여 갈라지는.
‘최근 수도에서 엄청난 유행이라고 했던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하녀들에게 들어서 필로멜도 대충 줄거리는 알았다.
먼저 마음이 떠난 사람은 남성이지만 그가 나중에 오해를 깨닫고 후회하는 반면, 여자는 슬퍼하다가 새로운 사랑을 찾는다.
아직 초반부인지 여자가 떠나가려는 연인에게 매달리는 장면이었다.
‘어쩐지 보기 좀 그러네.’
후에 관계가 역전된다는 것은 알지만, 남자한테 매달리는 여자라니 뭔가를 연상시켰다.
‘카트린과 책 속 필로멜도 그랬지.’
그까짓 남자가 뭐라고 유스티스와 나사르에게 그리도 매달렸는지 모르겠다.
‘난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필로멜은 제레미아 쪽을 흘깃거렸다. 그런데 그는 어쩐지 음울해 보였다.
‘헉, 그렇게 재미없나?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연극을 꽤 열심히 보는데.’
그런데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기억이 있었다.
책에서 제레미아가 제 어머니에 대해 한 말이었다.
“내 어머니는 아이를 낳으면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해 줄 줄 알았어.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게 불가능한 인간이었지.”
만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가 엘렌시아에게만 스쳐 가듯이 털어놓은 이야기.
“어머니는 절망했어. 본인의 소망이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거든. 그러고는 떠났지. 사랑했던 남자의 곁을, 그 남자를 쏙 빼닮은 자식을 남겨둔 채.”
필로멜이 연극을 보며 카트린과 책 속 ‘필로멜’을 떠올렸듯, 제레미아도 어머니를 떠올린 듯했다.
책 내용과 자신이 아는 사실을 종합해 보자면 제레미아의 어머니는 르귄을 사랑했다.
때문에 실험에 참가하여 자식까지 낳았지만 결국 그의 마음을 얻지 못하자 떠난 듯했다.
자세한 사정을 모를 땐, 필로멜은 막연히 ‘좋아서 결혼까지 했으면서 아버지가 너무하네’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어디까지나 계약 관계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르귄만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남겨진 제레미아만 불쌍할 뿐.
‘세상사 복잡하다, 복잡해.’
조용히 한숨 쉬던 필로멜은 곧 눈을 크게 떴다.
‘가만, 이건 기회가 아닌가.’
제레미아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필로멜은 줄곧 그가 약한 면을 내보일 때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래야 그녀가 예의 ‘그 말’을 해서 제레미아를 위로하는 게 가능했다.
어쩌면 우연히 이 연극을 보도록 그를 유도한 게 신의 한 수였을지 모른다.
남의 상처를 이용한다니, 필로멜의 양심이 콕콕 쑤셨지만 이 천운을 포기할 순 없었다.
어쨌든 제레미아가 엘렌시아에게 반하는 일만은 막아야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제레미아의 기분은 연극이 해피엔딩으로 끝난 직후에도 저조했다.
필로멜이 옷에 붙은 먼지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우리 다른 곳으로 갈까요.”
“……그래.”
생각에 잠긴 제레미아는 별 의문 없이 그녀의 말을 따랐다.
‘너무 축 처져 있으니 어째 미안한데.’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필로멜은 그를 아이스크림 가게에 데려가서 큼지막한 2단 아이스크림콘을 쥐여줬다.
“…….”
하지만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그를 보자 필로멜은 자신의 것도 먹을 맛이 떨어졌다.
‘어쩔 수 없지. 얼른 그 말이나 하는 수밖에…….’
필로멜은 그를 데리고 다니며 적당한 장소를 찾았다.
대화에는 분위기가 제일 중요하다. 제레미아가 진심을 꺼내고 싶어질 만한 장소가 필요했다.
강가에 이르렀을 때, 그녀의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 예쁘다.”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제국의 젖줄이라 불리는 클리머 강의 물결이 아름다운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여기라면 말 꺼내기 좋겠어.’
거대한 강의 정경은 웅장하면서도 어딘지 쓸쓸함을 자아냈다.
“제레미아, 이쪽이에요!”
필로멜이 한적하고 운치 좋은 곳으로 제레미아를 불렀다.
노을을 배경으로 강을 바라보는 그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쓸쓸한 분위기가 그를 더욱 예술 작품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필로멜은 그에게 다가서며 할 말을 골랐다.
‘가장 먼저 고민 있냐고 물어보는 것이 좋으려나.’
아니면 자신의 유년 시절을 먼저 털어놓으며 자연스레 옛날얘기를 유도하는 편이…….
그런데 어째서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필로멜은 예상보다 훨씬 쓸쓸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며 당황에 빠졌다.
얼른 엘렌시아가 했던 것처럼,
“당신의 눈에선 저와 같은 외로움이 엿보여요.”
“당신의 아픔을 이해해요. 제가 친구가 되어줄게요.”
이런 말들을 해야 하는데…….
그 순간 날카로운 물음이 필로멜에게 떨어졌다.
내가 그의 아픔을 이해하나?
여기에서는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이해한다고 말해야 하는데도, 왜인지 쉽사리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현실은 필로멜이 계획을 짤 때 떠올렸던 상상과 달랐다.
너무 선명했다. 제레미아의 쓸쓸함이.
그는 활자로만 구성된 등장인물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인간이었고, 그의 아픔은 한 사람의 과거가 고스란히 담긴 흔적이었다.
필로멜은 가만히 생각했다.
‘나, 오만하네.’
그깟 책 좀 읽었다고 제레미아를 이해했다고 여겼다. 그의 마음을 저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만약에 그녀처럼 책을 읽은 사람이 나타나 필로멜이란 인간을 이해한다고 말했으면 역겨워했을 주제에.
‘그래. 이런 건 이제 그만두자.’
필로멜은 흐려졌던 표정을 밝게 바꾸고 그에게 다가갔다.
“제레미아!”
“……왜 그러는, 읍!”
그녀가 제레미아의 입에 본인의 아이스크림을 쑤셔 넣었다.
“제 아이스크림도 먹어요! 입 안 댄 거니까 걱정은 말고요.”
“내가 왜!”
“먹고 힘내라고요.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요.”
억지로 그에게 아이스크림을 떠맡긴 필로멜이 경쾌한 걸음걸이로 강가를 걸었다.
제레미아는 그런 뒷모습을 보며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도대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문득 의식했다.
‘어, 왜 나 웃고 있지?’
자신이 오늘 하루 시답지 않은 짓거리를 하면서 들떠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급격히 심각해졌다.
평소의 그였다면 당연히 화를 내야 했는데 뭐가 좋다고 실실 쪼개고 있었다.
‘애초에 저 녀석의 장단에 맞춰주는 것 자체가 나답지 않았어.’
처음에는 분명히 저 녀석 뒤에 있는 르귄이 성가셔서 적당히 요구 사항에 따라줬을 뿐인데, 언제부터인지 부친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서 심술이 비죽 솟아났다. 그것은 일종의 반동이자 관성이었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그래서 앞서가는 뒷모습에 대고 가시 돋친 말을 뱉었다.
“자만하지 마.”
필로멜이 돌아봤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네가 오해하는 듯해서.”
그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르귄이 지금 네 말에 껌뻑 죽는 건, 너에게 애정이 있어서가 아니야.”
“…….”
“그 사람은 자식을 사랑하진 않아도 우리가 자기 자식이라는 인식은 갖고 있어. 그래서 남들보다 우리한테 조금 더 관대하지.”
“그래서요?”
“그 사람이 관대하게 굴 때가 또 있어. 바로 자기 흥미를 끄는 대상. 어떨 때는 사물이나, 동물, 몬스터고 어쩔 땐 인간이지. 그리고 마침 너는 두 가지 다 해당되는군.”
필로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남자가 주는 호의를 맹신하지 말라는 거야. 흥미가 사라지면 언제라도 등 돌릴 위인이니. 네가 그자에게 특별한 존재일 거라는 기대는 버려.”
돌아오는 반응이 없자 제레미아는 초조해졌다.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입에 담았다.
“난 그런 여자를 잘 알고 있어. 자신이 그자에게 특별해질 거라 혼자 기대했다가 절망한 사람. 너도 그 여자처럼 될 바에는…….”
“거기까지만 해도 돼요.”
“뭐?”
“제레미아가 하고 싶은 말 다 이해했어요. 어렵사리 더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필로멜이 열없이 웃었다.
제레미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걱정 말아요. 저 그런 기대 안 하니까.”
서늘한 강바람이 그들을 스치고 지나쳤다.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필로멜은 어딘가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강 저편을 바라봤다.
“제가 르귄이나 세 형제분에게 별 존재 아니라는 거…… 아주 잘 알고 있어요.”
제레미아는 아연했다.
혹시 방금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한 게 아닐까 싶은 의문이 그의 마음에 드리워졌다.
그게 어떤 실수인지 명확히 모르면서도 제레미아는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