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59)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59화(59/183)
<59화>
* * *
그날 저녁, 황궁 인근 뒷골목.
쨍그랑!
마르탱 시언스는 이를 갈며 술병을 바닥에 내던졌다.
“제기랄!”
한껏 만취한 그가 비틀거리며 인적 드문 거리를 걸었다.
마르탱은 방금 기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황궁에서 쫓겨난 길이었다.
필로멜 황녀, 아니 필로멜 그 여자는 그에게서 호위 기사직을 빼앗는 거로도 모자라 그동안의 불충한 행태를 낱낱이 고발했다.
“젠장! 가만 안 둬!”
자신이 왜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가. 그것도 진짜 황녀도 아닌 계집애한테!
불명예스러운 사유로 쫓겨난 이상 그의 기사 생명은 끝이었다. 어떤 귀족가에서도 마르탱을 고용해 주지 않을 것이다.
형인 시언스 자작도 아우를 모르는 척할 게 분명했다. 귀족 가문의 생리가 그러했다.
마르탱은 필로멜의 냉정한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따지고 보면 고것은 귀족도 아니었지.”
어미가 황후와 친했던 평민이라고 들은 것 같았다. 아비가 누군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아비도 분명 어디서 굴러먹었을지 모르는 놈팡이겠지! 뻔해!”
그럼 시언스 자작가의 일원인 자신이 천한 평민 계집애한테 모욕을 당했단 말인가!
그는 발작적으로 소리 질렀다.
“죽여 버릴 테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마치 벌레가 몸을 타고 올라가는 듯이 섬뜩한 감각이었다.
“누구냐!”
그가 순간적으로 위험한 ‘무언가’를 감지하고 태세를 갖춘 건 마지막 남은 기사로서의 기지였다.
골목 저편에 웬 남자가 있었다.
“나?”
남자가 고개를 기울이며 다가왔다. 이윽고 달빛에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황금빛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너, 너는 누구지?!”
마르탱은 두려움에 떨리는 손으로 칼자루를 꽉 쥐었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 남자는 뭔가 다르다. 질적으로 전혀 다른 존재였다.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어디서 굴러먹었을지 모르는 놈팡이.”
치켜든 남자의 손이 빛났다.
순간, 마르탱은 죽음을 직감했다.
“나,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글쎄, 그냥 거슬려서?”
그렇게 마르탱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를 틈도 없이 사망했다.
* * *
유혈이 낭자한 뒷골목에서 르귄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제레미아.”
그러자 모습을 드러낸 제레미아가 빠르게 사위를 훑었다. 눈앞에 처참한 살인의 현장이 펼쳐져 있었다.
“필은 어쩌고? 네가 호위 기사인가 뭐라며.”
르귄이 느릿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금은 카딘과 함께 있어.”
“아하, 동생은 걔한테 맡기고 너는 이걸 처리하러 왔구나.”
그러자 르귄이 더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형체를 가리켰다.
“너는 예전부터 쓰레기를 보면 못 죽여서 안달이었지. 아쉽게도 이번에는 내가 한발 빨랐네.”
제레미아는 르귄의 말에 그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삐뚤어진 심성을 정의감이란 고상한 말로 포장하는 자는 부친뿐이었다.
“됐어. 그딴 쓰레기 누가 치우든 치우면 그만이지. 마지막에 필로멜을 보며 씨근덕대는 모습이 눈에 밟혀서 왔더니만 당신도 지켜보고 있었군그래.”
“응. 이런 놈이 감히 필을 방해하게 둘 순 없잖아.”
그런데 뒷골목을 찾은 방문자는 또 있었다.
“으앗! 이게 뭡니까!”
모퉁이에서 튀어나온 렉시온이 마르탱의 시체를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화려하게도 저지르셨네요. 기왕 할 거면 깔끔하게 하시지. 치우기 편하게.”
“잔소리쟁이.”
“르귄 님이 자꾸 잔소리하게 만드시잖아요. 피는 왜 그렇게 뒤집어쓰셨대.”
렉시온은 바닥을 적시고 있는 피 웅덩이를 피해 걸으며 투덜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아, 차라리 제레미아가 먼저 발견해서 해치웠다면 좋았을 텐데.”
제레미아라면 단숨에 숨을 끊어버렸을 테니까. 자신이었다면 완벽하게 깔끔히 마무리했을 거고.
하지만 렉시온은 긍정적인 사고를 지향하는 인간이었다. 그나마 카딘이 아닌 게 어디인가. 한 놈 없앤다고 건물 몇 개 부숴 먹지 않아 다행이다.
“접근 방지 마법, 한 삼십 분은 계속 유지해 주세요. 치우는 데 그 정도 걸릴 듯하니.”
렉시온은 가볍게 혀를 차며 말했다.
“난 갈래. 너희가 알아서 해.”
르귄이 흥미가 사라진 얼굴로 이동 마법을 쓰려 하자 렉시온이 만류했다.
“잠깐! 설마 그 꼴로 필한테 가려고요?”
“안 돼?”
“당연히 안 되죠. 피 칠갑을 한 르귄 님을 보고 그 애가 기절하면 어쩌려고요.”
렉시온은 한숨을 쉬며 계속 말했다.
“제가 저번에도 말했죠? 필이 마냥 착하진 않아도 가치관은 상식적인 수준이에요. 기피당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제발 르귄 님의 본성은 숨깁시다. 예?”
그 말에 르귄이 자기 차림새를 휘휘 둘러봤다.
“그럼 씻고 옷 갈아입은 다음에 가야겠다.”
그러고는 즐거운 투로 중얼거렸다.
“난 아직 필한테 미움받고 싶지 않으니까.”
* * *
그 시각, 국빈관.
필로멜은 카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근무 시간이 끝났다며 카딘이 찾아오자 제레미아는 혀를 차며 어디인가로 가버려서 둘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르귄의 모습이 보이지 않네.’
필로멜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이 틈에 카딘과 친해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카딘은 네 부자 중에서 유일하게 필로멜이 단둘이 대화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호쾌한 사람인 것 같긴 하지만…….’
앞으로 한동안은 얼굴 마주할 테니 친해져서 나쁠 게 없었다.
그런데 그런 각오가 무색하게도 그는 이미 필로멜을 꿀 떨어지는 눈으로 바라봤다.
‘……부담스럽다.’
꿀꺽, 침을 삼키며 용기를 낸 필로멜이 물었다.
“저어……. 카딘은…… 제가 좋아요?”
“응. 좋아.”
카딘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왜 좋은데요?”
“여동생이니까?”
필로멜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전부터 느꼈는데 역시 그에겐 여동생에 대한 환상이 있는 듯했다. 여동생은 귀엽다거나 애교가 있을 거라는 편견 말이다.
‘시커먼 형제가 두 명이나 있어서 그런가.’
그렇다면 그가 실망하기 전에 필로멜이 환상을 깨줘야 했다.
“저기, 카딘이 여동생에 관해 어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귀염성 있는 성격이 아니에요.”
오히려 반대다.
모두들 필로멜을 어른스러운 아이라고 평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애늙은이 같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괜한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좋아요.”
카딘은 약간 침울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말이야? 나 사실 머리가 그다지 좋지 않아서 쉽게 말해주지 않으면 몰라.”
이게 어려웠나?
필로멜이 다시 설명했다.
“으음. 저는 별로 좋은 동생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러자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카딘이 필로멜에게 질문했다.
“필은 나를 때리고 싶어?”
“예? 제가 카딘을 왜 때려요?”
“그럼 막 욕하고 싶어?”
“전혀요.”
“얼리고 싶지는 않아?”
“……얼린다니 그런 건 하고 싶어도 못해요.”
그러자 그가 경쾌하게 웃었다.
“진짜? 완전 착하네! 역시 필은 좋은 동생이야. 좋아. 좋아.”
어쩐지 카딘의 좋은 동생인지 아닌지의 기준은 상당히 널널한 듯했다.
그리고 그 기준을 누가 만들었는지도 쉽게 예상이 갔다.
어쨌거나 좋은 동생 되기가 이렇게 쉽다면 앞으로 카딘과 원만하게 지낼 수 있을 듯했다.
때리지 않고, 욕하지 않고, 얼리지만 않으면 됐다.
기분 좋아진 필로멜은 카딘 앞에 손을 내밀었다.
“우리 악수나 할까요?”
“그래도 돼?”
“당연하죠.”
카딘은 긴장한 얼굴로 손을 자기 옷에 닦은 뒤에 필로멜의 손을 맞잡았다.
흡사 깨지기 쉬운 도자기라도 다루는 듯한 손길이었다. 굳은살과 상처로 가득한 투박한 손에는 어울리지 않는 섬세함이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나야말로!”
아까까지만 해도 부담스럽기만 하던 카딘이 이제는 발발거리는 대형견처럼 느껴졌다.
필로멜은 나머지 세 사람도 차례로 떠올렸다. 처음 만났을 때는 하나같이 별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내고 보니 그렇지만도 않았다.
앞으로도 그들과 충분히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