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60)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60화(60/183)
<60화>
* * *
제국을 찾은 타국의 인사나 황족이 없어 현재 국빈관에는 필로멜만 머무르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국빈관과 아름답기로 유명한 후원은 어느 위대한 대마법사와 네 자식들의 차지가 되었단 뜻이었다.
“뭐? 제레미아가 필의 호위 기사님이 되었다고?”
저 혼자 소식이 느린 카딘이 부산스럽게 소란을 떨었다.
“왜 제레미아인데! 나도 시켜만 주면 잘할 수 있다고!”
“너는 기사가 아니잖아.”
제레미아가 거드름을 피우며 대답했다.
렉시온이 옆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카딘도 제레미아가 마도기사 자격시험 볼 때 따라갔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러자 축 늘어진 카딘이 테이블 위에 턱을 올리며 중얼거렸다.
“……필기시험에서 떨어졌어.”
“놀랍네요. 필기라고 해봤자 기본 기사도 상식이 아닌가요? 그 정도면 거저 주는 문제죠.”
“이 자식이 멍청한 거지.”
제레미아가 빈정댔다.
“그래도 형한테 멍청하다는 표현이 뭡니까? 지적 능력이 다소 떨어진다고 하세요.”
형제간의 투덕거림에 아버지가 나섰다.
“시끄러워. 그보다 너희 일 안 하냐? 왜 날마다 필이랑 나를 찾아오는 거야?”
렉시온이 여유롭게 답했다.
“당연히 업무 다 끝내고 왔죠. 그리고 필 보러 온 거지 르귄 님 보러 온 것 아닌데요.”
제레미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호위가 뭔지 몰라? 나는 일이 필로멜 옆에 있는 거야.”
마지막으로 카딘이 말했다.
“난 땡땡이!”
필로멜은 그저 웃었다.
“하하……. 다들 즐거워 보여서 다행이에요.”
잠시 한숨을 내쉰 그녀가 가지고 온 것을 내밀었다.
“그런데 르귄. 이것 좀 봐주실래요?”
르귄이 손끝으로 필로멜이 건넨 책을 집어 들었다.
“이게 뭔데? 사전?”
정확히는 사전의 표지를 두른 <황녀 엘렌시아>였다.
“제가 예전에 말씀드렸던, 르귄이 직접 조사해 주셨으면 하는 책이에요.”
책의 진실을 알아내겠다고 결심하고 얼마 안 지나 필로멜은 그에게 예언서에 관해 떠보았다.
결과는 필로멜이 기존에 아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탑주인 그조차도 <황녀 엘렌시아>와 같은 예언서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듯 보였다.
솔직히 실망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실망에서 끝나선 안 됐다.
필로멜은 큰맘 먹고 그에게 <황녀 엘렌시아>를 맡기기로 했다.
단지, 그 큰맘을 먹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그도 그럴 게, 필로멜은 이제까지 한 번도 그 책을 남에게 보인 적이 없었다. 맡긴 적은 더욱더 없었다.
불안했다. 내용은 다 암기했는데도 책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란 강박이 늘 존재했다. 자신도 모르는 새 책에 상당히 의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르귄이 책을 펼치려고 하자 필로멜은 황급히 그의 손을 잡았다.
“……저 죄송하지만, 내용은 가급적 안 보면 안 될까요?”
“왜?”
“그게…….”
필로멜이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주저했다.
‘역시 조사하라면서 내용을 확인하지 말라는 건 너무 무리한 부탁이겠지……?’
하지만 책 속 ‘필로멜’을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정말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내용이 담긴 페이지는 다 찢어놓긴 했다.
훼손된 페이지보다 멀쩡한 페이지가 많으면 책의 복구 능력이 작용하지 않는다는 걸 이런저런 실험으로 알게 되었다.
망설이던 필로멜이 그냥 내용을 보여주려는 그때.
“알았어. 네가 보여주고 싶지 않다면 안 볼게.”
르귄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래도 괜찮아요? 조사하는 데 지장이 있는 건…….”
“내용은 살피지 못하지만 책 자체는 충분히 연구할 수 있잖아. 나중에 내게 보여주고 싶어진다면 말해.”
“네, 감사해요.”
필로멜은 우물쭈물 대답했다.
“뭘, 우리 사이에.”
정작 르귄은 대수롭지 않은 듯했다.
필로멜은 분명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결과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내용도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역시나 이들에게 책을 보여줄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건 책 속 ‘필로멜’을 보여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들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완전히 믿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좀 더 함께 지내며 사이가 가까워지면 그때 보여주자.’
필로멜은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필로멜에게서 책을 받아든 르귄이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했다.
“별다른 기운이 느껴지진 않는데. 아무래도 마탑에 가져가서 한번 봐야겠는걸.”
렉시온이 냉큼 대꾸했다.
“그래요. 이참에 가서 밀린 일이나 급한 일 좀 끝내놓고 오세요. 여기에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르잖아요.”
그런 말을 들으니 필로멜은 좀 걱정스러워졌다.
“역시 마탑에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인 거 아니에요?”
“걱정 마세요. 르귄 님이 여기 있다고 큰일 안 벌어지니까. 어차피 이 중 마탑에서 제대로 일했던 사람은 저밖에 없고…….”
렉시온의 목소리에 서글픈 직장인의 한이 어렸다.
“……힘내요.”
필로멜은 이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후원 입구에서 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필로멜 님! 여기에 계십니까?”
“이런, 여러분 어서 숨어…….”
필로멜이 화들짝 놀라 말을 꺼내는 순간.
르귄은 고양이로 돌아갔고 렉시온과 카딘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단지 제레미아만이 전과 같이 자리에 평온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남에게 이들의 존재를 들킬까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하며 필로멜은 하녀를 돌아봤다.
“무슨 일이지?”
“후원에 계셨군요.”
“바람 쐬는 중이었어.”
“방해해서 송구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황제 폐하께서 필로멜 님을 석찬에 초대하셨습니다. 가볍게 권하는 것이니 부담 가지실 것 없다고…….”
“엘렌시아 황녀 전하께서도 함께하시는 건가?”
필로멜은 하녀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네. 그러합니다.”
필로멜은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가겠다고 전해드려.”
엘렌시아에 대해 알려면 직접 대면하는 걸 빼놓을 순 없었다. 남의 귀를 통해서 듣는 행보엔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 * *
필로멜이 황제와의 석찬을 위해 자리를 떠났다.
제레미아는 그녀를 따라갔고 카딘은 땡땡이를 들키기 전에 가야겠다며 일터로 돌아갔다.
후원에는 르귄과 렉시온만이 남아 있었다.
르귄은 잔뜩 불만스러운 참이었다.
“뭐야? 남의 딸을 왜 지가 부르는 거야?”
“필을 십수 년간 딸로 키운 건 저쪽이잖습니까.”
“뭔 소리야. 필과 피가 섞인 건 나야.”
“태어나게 했다고 다 부모가 아닙니다. 이런 경우엔 필이 부모로 인정한 쪽이 부모죠. 르귄 님도 그 아이의 인정을 받고 싶어서 굳이 이곳에 남으셨잖아요.”
“그런가? 몰랐네, 그건.”
그러고선 뭔가를 한참 생각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죽일까?”
“……누구를요?”
렉시온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황제. 황녀도 덤으로.”
르귄은 무심히 말을 이었다.
“미쳤어요?”
필로멜이 도둑이었던 하녀를 엘렌시아에게 세작으로 붙였던 기억을 떠올린 르귄이 말했다.
“필이 이곳에 머무르는 이유는 그 황녀 같은데, 죽이면 만사 해결이잖아.”
렉시온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문질렀다.
“제국에서 가만있겠습니까? 마탑까지 위험에 빠트리는 일은 참아주세요. 저는 르귄 님 따라 저승 가는 일은 사양합니다.”
르귄이 전혀 상관없는 포인트에서 발끈했다.
“내가 질 거라고 생각해? 황제보다 내 쪽이 더 강해.”
“……뭐, 저도 개인적인 역량만 따진다면 르귄 님이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 연륜도 있으니.”
안경 밑에 있는 그의 눈빛이 냉철해졌다.
“하지만 벨레로프 황가가 오랜 세월 대륙의 패자로 군림한 이유를 모르시진 않겠죠. 황제는 신의 힘을 다룰 수 있습니다. 역대 황제 중엔 나라가 망할 위기 앞에서 신을 강림시킨 자도 있었다고 하죠. 제아무리 르귄 님이라 해도 신을 어떻게 당해내게요.”
“안 싸워봤으니까 모르지.”
“괜한 배짱부리지 마시고……. 어쨌든 그 일은 안 됩니다. 그랬다간 필에게 호감을 살 기회는 영영 물 건너간다는 것만 기억하세요.”
호감을 살 수 없다는 말에 르귄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그 애는 살인을 썩 좋아하지도 않을뿐더러 저쪽과 지낸 시간이 있으니 정이 쌓였을 테지요. 전에도 말했지만 필 앞에선 최대한 좋은 사람인 척하세요.”
“……알았어. 그냥 해본 말이야.”
르귄이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오랜만에 마탑에나 가봐야겠다. 필의 부탁도 들어줄 겸.”
이윽고 광휘와 함께 르귄이 사라졌다.
렉시온도 후원 밖으로 향했다.
부디 여기 머무르는 동안 별일 없어야 할 텐데, 그가 기도하듯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