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61)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61화(61/183)
<61화>
* * *
필로멜은 말없이 입안에 든 음식물을 곱씹었다. 그녀가 굳이 말을 꺼낼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제가 그때 잡으려고 튀어 나갔는데 토끼가 도망가는 바람에 결국 온 산을 헤매다가…….”
아까부터 엘렌시아가 쉴 새 없이 조잘댔기 때문이다.
식사 자리는 그녀의 독무대였다.
어린 시절의 추억담이 끊임없이 술술 나왔다. 동석한 필로멜과 유스티스는 엘렌시아의 이야기에 그저 맞장구나 치는 게 전부였다.
약간 기가 질린 필로멜은 의문을 품었다.
‘엘렌시아가 원래 이렇게 수다스러운 성격인가?’
책을 읽을 땐 딱히 그런 느낌은 못 받았는데.
하지만 수다스럽지 않다는 서술도 없었으니 단지 이걸로 엘렌시아가 책과 다르다 못 박기엔 무리가 있었다.
필로멜은 헤실헤실 웃는 엘렌시아를 쳐다봤다.
“헤헤, 비록 몸이 꽁꽁 얼었지만 정말 재미있었어요.”
순진해 보이기만 하는 얼굴이 보였다.
저 얼굴로 카트린을 죽음으로 몰아갈 뻔했다. 어쩌면 무서울 만치 전혀 다른 민낯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비쭉 들었다.
‘아니야. 겁먹지 마.’
필로멜은 의식적으로 움츠러드는 어깨를 쭉 폈다.
지레 겁부터 집어먹어서는 아무것도 못 한다. 더는 도망치지 않기로 한 결심을 되새기며 필로멜은 대화에 주의를 기울였다.
엘렌시아의 명랑한 목소리가 식당 안에 울려 퍼졌다.
“그래서 새끼 토끼를 키우게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엄마가 허락 안 해주셨어요.”
유스티스가 대답했다.
“원한다면 이곳에서 키우도록 해라.”
“와, 정말요? 신난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내내 지속됐다.
솔직히 필로멜은 이런 분위기가 몹시 어색했다. 그녀도 유스티스와 꽤 많이 식사를 함께했으나 지금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대화는 요리에 뿌리는 양념처럼 간간이 오갔고 두 사람은 말보다는 음식에 집중했다.
그렇다고 이게 좋아 보인다는 뜻은 절대 아니었다.
‘너무 시끄럽고 정신없어.’
그때가 대화는 적었지만 마음은 더 편했는데.
엘렌시아가 제 아비를 보며 붙임성 있게 말했다.
“전 신전 예배 빼먹고 친구랑 놀러 갔던 때가 제일 재미있었어요. 아빠는 이런 경험 있으세요?”
“없다.”
“아…….”
본인의 대답이 지나치게 짧다는 것을 의식했는지 유스티스가 덧붙였다.
“예배를 말없이 빠져본 적 없고, 친구도 없다.”
“…….”
“…….”
“…….”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뭐라도 말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때마침 그동안 너무 입 다물고 있었나 싶었던 필로멜이 적당히 한 마디 얹으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옛날엔 예배를 빼먹은 적이…….”
“괜찮아요! 제가 아빠의 친구가 되어드릴게요!”
엘렌시아는 못 들은 듯 필로멜의 말을 끊고 다시 떠들었다.
‘내가 입 여는 게 싫은가 보군.’
뭐, 됐다. 일부러 말할 거리를 쥐어 짜낼 필요가 없으니 필로멜로서는 오히려 편했다.
두 사람은 알아서 떠들게 내버려 두고 필로멜은 엘렌시아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옆에서 봐야지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엘렌시아.
진짜 황녀이자 <황녀 엘렌시아>의 주인공.
애초에 <황녀 엘렌시아>의 저자는 무슨 목적으로 책을 썼을까.
다른 예언서처럼 자신이 본 미래를 기록했다고 보기에는 서술 형태가 소설이란 점이 마음에 걸렸다.
필로멜이 조사하면서 알아본 예언서 중 이 책처럼 개인의 연애담에 초점을 맞춘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
미래에 전쟁이 난다는 둥, 천재지변이 일어난다는 둥, 마도구가 보급되어 일반인들도 자유롭게 마법을 부리게 된다는 둥.
뭔가 크고 굉장한 예언들뿐이었다.
<황녀 엘렌시아>가 다른 예언서들과 다른 데에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뭐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소설의 형태여야만 저자가 얻을 이익이 있다거나?’
하지만 그게 뭔지 어림짐작도 안 갔다.
금전이나 권력을 원했다면 책을 쓸 바엔 황제에게 친딸의 존재를 알려주고 대가를 얻어내면 된다.
예언자로서의 명성을 널리 떨치는 걸 원했다고 하기에는 책은 단 한 권이었다. 저자의 의도를 유추하기에는 단서가 너무 부족했다. 있는 것이라고는 그자가 쓴 <황녀 엘렌시아>뿐.
하지만 그 또한 단서였다. 글은 글쓴이의 거울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그 책에도 저자가 남긴 흔적이 남아 있을 터였다.
필로멜은 머릿속에서 이미 수천 번 넘겼던 책의 페이지들을 다시 넘겼다.
성격, 기호, 언어적 습관…….
저자의 자의식이 반영된 결과물이라면 뭐든 좋다. 지금은 그동안 무심히 넘겼을 사소한 단서라도 절실했다.
무수히 많은 활자 너머로 희미한 윤곽이 언뜻언뜻 비쳤다. 그중 일부가 점점 선명해졌다.
그래, 그것은…….
“……너는 어떻지, 필로멜?”
예상 못 한 물음에 내달리던 사고가 일시에 멈췄다.
황제가 필로멜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네? 죄송하지만 미처 못 들었습니다.”
필로멜이 당황해 되물었다.
“너는 특별히 내게 할 이야기가 없나.”
“글쎄요. 딱히…….”
“어떤 주제든 좋다. 네 이야기가 듣고 싶구나.”
겨우 가닥이 잡혔는데 하필 이럴 때 말을 건다.
필로멜은 얼른 다시 생각의 바다로 뛰어들기 위해 아무 말이나 하려고 했다.
그런데…… 할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어지던 대화의 흐름대로라면 필로멜도 엘렌시아처럼 뭔가 유쾌한 추억담을 꺼내야 할 차례였다. 문제는 그런 게 없다는 것.
정치, 외교, 사회, 그런 주제들에 대해서라면 얼마든지 대화를 이끌어 갈 수 있다.
하지만 대화 내용이 사적인 영역으로 들어설 때면 필로멜은 항상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측이었다.
“어, 음…….”
그럴듯한 기억 뭐 없나?
곰곰이 되짚어 봐도 떠오르는 건 지루하고 단조로운 황녀로서의 일상뿐이었다.
그때 후식으로 나온 사과가 필로멜의 눈에 들어왔다.
‘맞다. 그게 있었지.’
“일전에 하녀 중 한 아이가 중앙광장에서 파는 애플파이를 가져다줬는데 먹어보니 의외로 맛이 좋았습니다. 백성들의 먹거리도 먹을 만하더군요.”
사실은 제레미아와 몰래 외출했던 때의 이야기지만 적당히 각색해서 들려줬다.
유스티스가 눈을 빛냈다.
“정확히 중앙광장 어디서 판다고 하더냐.”
“그게…… 그 아이 말이 무지개 어쩌고 하던데요.”
왜 저러지? 애플파이 좋아하나?
엘렌시아가 말했다.
“그렇게 맛있다니 저도 한번 먹어보고 싶어요! 궁에 와서 온갖 화려한 과자들을 맛봤지만 가끔은 예전에 먹던 소박한 맛이 그리워질 때가…….”
그렇게 대화의 주도권은 또 엘렌시아가 가져갔다.
필로멜이 이제 안심하고 생각에 빠져들려던 찰나.
“그렇군. 주방장에게 네가 과거에 먹었던 음식을 올리라고 말해놓겠다. 그런데 필로멜, 너는 그밖에 들려줄 이야기가 없는가.”
친딸의 장황한 말을 다 들은 유스티스가 또 필로멜에게 말을 걸었다.
‘왜 나한테 저렇게 관심이 많아? 좀 내버려 두라고!’
하지만 필로멜은 외침을 삼키고는 다른 이야깃거리를 찾았다.
‘진짜 없는데. 어쩔 수 없지.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지만…….’
이 자리에서 언급할 수 있는 화제 가운데 이들 중 누구도 겪어본 적 없을 만한 신선한 경험이 그녀에겐 하나 있었다.
“아시겠지만 제가 황궁을 떠났을 때, 치안서 유치장에 갇힌 일이 있었습니다. 난생처음 겪어본 일이라 불편했지만 나름 색다른 추억이…….”
필로멜의 말소리가 잦아들었다.
유스티스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기 때문이다.
“네가 유치장에 있었다고?”
낮은 음성에서 살기가 뚝뚝 떨어졌다.
“어…… 네. 에이브리든 소공작에게 보고 못 들으셨나요?”
“그런 내용은 없었다.”
‘이런.’
필로멜은 낮게 혀를 찼다.
나사르가 실수로 빼먹었나 보다.
유스티스가 이를 빠득 갈았다.
“……건방진 애송이가.”
필로멜은 나사르를 변호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소공작이 저를 데려오느라 정신이 없었나 봅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는 법이니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자신 때문에 이런 별것도 아닌 일로 처벌받으면 괜히 마음이 무거워진다.
필로멜의 설득에 황제의 기세가 한결 누그러졌다. 아직 눈빛은 형형하기 그지없었지만.
솔직히 나사르가 보고를 누락한 게 그에게 그리도 기분 상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행이었다.
그 뒤, 테이블 위에는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필로멜은 황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입을 다물었고, 그는 다른 생각에 빠진 듯했다.
그전까지 밝은 얘기만 하던 엘렌시아는 왜인지 갑자기 황궁 생활의 고충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불편함 속에서 식사가 끝났다. 황제는 서둘러 자리를 떴고, 엘렌시아가 병아리처럼 졸졸 그 뒤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일어나던 필로멜이 멈칫했다. 무언가 톡 쏘는 매콤한 냄새가 콧속을 간질였다.
상을 치우던 하녀에게 필로멜이 물었다.
“그게 뭐지?”
그녀가 가리킨 곳엔 자그마한 조미료통이 놓여 있었다.
하녀는 행동을 멈추고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호사 가루입니다.”
호사는 매운맛이 나는 채소로, 호사를 빻아서 만든 가루는 음식에 매운맛을 더할 때 쓰였다.
“호사 가루가 왜 여기에……?”
대다수의 제국민들은 매운맛을 즐기지 않았다. 호사 가루는 제국의 극남 지역에서나 애호되는 향신료였다.
“황녀 전하께서 매 식사때마다 뿌려 드십니다. 매운 음식이 취향에 맞으시는 듯합니다.”
조미료통이 놓인 자리는 엘렌시아의 자리였다.
순간, 필로멜의 뇌리에 <황녀 엘렌시아>의 저자가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니었다.
[사신이 먹음직스러운 붉은 닭 다리를 집어 들었다. 입안에 가득 찬 중독적인 매콤함에 그는 게걸스럽게 살을 뜯으며 말했다.]<황녀 엘렌시아>에 나오는 구절이자, 필로멜이 조금 전 찾아낸 저자에 대한 단서.
음모를 꾸미는 남국의 사신들이 저들끼리 비밀회의를 하는 대목이었다.
‘먹음직스러운 붉은 닭 다리’나 ‘중독적인 매콤함’은 상당히 이질적인 표현이었다.
그야 제국에선 매운맛은 그냥 매운맛일 뿐이다. 시큼한 맛이나 신맛처럼 일부 좋아하는 사람은 있지만 일반적인 관점에서 맛있다는 인상은 절대 아니었다.
이제까지는 그쪽 지방에서는 매운맛을 선호하니 음식을 먹는 사신의 입장에서 표현하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왜인지 곱씹을수록 저자의 취향이 반영된 것 같다는 느낌이 선명해졌다.
엘렌시아도 매운맛을 좋아한다. 하필이면 매운맛.
‘우연이겠지……?’
입맛이야 얼마든지 겹칠 수 있는 거고.
하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는 위화감에 필로멜은 손을 꼭 그러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