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66)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66화(66/183)
<66화>
* * *
같은 날, 필로멜의 처소.
필로멜은 인간 모습으로 돌아온 르귄을 보며 타박했다.
“왜 나무에 올라가 계셨어요?”
“그냥. 거기가 마음에 들어서. 그러면 안 돼?”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엘렌시아가 구해주겠다고 올라갔을 때 내려오실 수 있었잖아요.”
“아. 그 좀 멍청해 보이던 애? 그런데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그야 엘렌시아가 다칠 뻔했으니까…….”
“걔가 다치든 말든 나랑 뭔 상관이야.”
따지고 보면 그건 그렇다.
그가 그럴 정도로 상냥한 성격이 아니라는 사실도 필로멜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분이 약간 묘해졌다. 그가 필로멜에게 품은 흥미가 가신다면 그때는 그녀 또한 이런 취급을 받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 때가 오기 전에 이곳에서의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어.’
그리 다짐하던 그녀의 눈에 시계가 들어왔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저는 볼일이 있어서 어디 좀 다녀올게요.”
필로멜은 일어서려다 엉거주춤했다. 순간 찌르르, 통증이 엉덩이에서부터 전해졌다.
“윽.”
“다쳤어?”
“네. 아까 주저앉았을 때, 조금 다쳤나 봐요.”
“치료해 줄까?”
“됐어요. 정말 별것 아니에요.”
부위가 부위다 보니 치료해 달라고 하기엔 창피했다.
필로멜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남궁을 나섰다. 하지만 걸음걸이가 갈수록 이상해졌다.
‘점점 아파지는데…….’
기왕 나왔으니 볼일만 대충 끝내고 의원을 찾아가 약이라도 타야 할 듯했다.
필로멜의 목적지는 황제의 집무실이었다. 언제 한번 들러 달라는 전언이 시종을 통해서 왔었다. 추측하건대 국빈으로서의 처우와 관련된 문제인 듯했다.
필로멜은 힘을 내서 간신히 황제의 집무실에 당도했다.
“안녕하십니까. 간밤에 별일 없으셨나요?”
평범하게 인사를 건네는데, 목덜미가 서늘했다. 황제가 매서운 눈으로 이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내가 뭐 잘못했나?’
필로멜의 심장이 절로 쪼그라들었다.
“필로멜.”
그가 무척 낮게 이름을 부르며 천천히 다가왔다.
“……왜, 왜 그러시는지요?”
“어디 불편한가. 걸음걸이가 시원치 않군.”
“아, 넘어졌습니다. 별로 아프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아니. 넌 중상이다.”
중상? 이게 무슨 소리지?
“상태가 몹시 심각하군. 걸어 다니는 게 기적이다.”
그리 말하는 유스티스의 기세가 수십 배는 더 심각했다.
“지금 당장 궁의를 부르겠다!”
“그냥 제가 가면 돼요! 대체 왜 이러세요!”
“왜 넘어졌나.”
“그게 나무뿌리에 걸리는 바람에…….”
“알았다. 황궁에 있는 나무란 나무는 다 뽑겠다.”
“그게 왜 그렇게 되는 거예요!”
“필로멜,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다 알아서 하겠다.”
말이, 말이 전혀 안 통한다.
‘미친 건가?’
필로멜이 설명을 바라는 눈길로 폴란 백작을 바라봤다. 하지만 폴란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필로멜의 낯빛이 차츰 못 볼 것이라도 본 사람처럼 되어가자 황제도 슬슬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느꼈다.
“……폴란.”
“……예, 폐하.”
“나중에 따로 보도록 하지.”
그런 식으로 표현하라 이른 건 아니었다고!
폴란이 소리 없이 절규했다.
필로멜의 오해는 의원에게서 치료를 다 받은 후에 풀렸다.
* * *
마침내 데뷔탕트 당일이 밝았다.
필로멜은 거울을 보며 자신이 입은 드레스를 점검했다. 새 드레스 따윈 필요 없었는데 황제가 기어코 보낸 재단사가 만들어준 옷이었다.
그냥 있는 드레스 중에 대충 입으면 된다고 돌려보내려고 했더니 재단사가 하소연했다.
황제와 황녀, 두 사람이 저에게 맡긴 일을 저버릴 수 없다나.
재단사의 속내는 대강 짐작이 갔다.
이번 데뷔탕트에서 엘렌시아 못지않게 이목을 끌 사람이 필로멜이다. 황녀뿐만 아니라 그런 필로멜에게도 자신의 드레스를 입힐 기회이니 재단사로서는 포기하기 싫었을 테다.
‘엘렌시아가 내 드레스를 부탁했다는 건 의외지만.’
역시 엘렌시아는 착한가?
그렇다면 왜 필로멜의 앞에서만 착한 모습을 안 보여주는 걸까.
뻔히 보이는 답은 ‘위선’이었으나 필로멜은 일단 섣불리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눈앞에 닥친 데뷔탕트가 급선무였다.
현시점에선 아직 유명해지지 않은 마거릿이 어떻게 엘렌시아의 드레스를 담당하게 되었는지도 차후에 차분하게 고민하자.
“내가 분명히 최대한 검소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마거릿이 보낸 크림색 드레스는 우아하고 간소했으나 군데군데 묻어 나오는 고급스러움을 감추진 못했다. 그나마 화려하지는 않다는 점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필로멜의 모습을 지켜보던 르귄이 입을 열었다.
“좀 심심하지 않아? 내가 봐왔던 귀족 복장은 더 호화로웠던 것 같은데.”
“황궁에 얹혀사는 객이 호화로워 봤자 뭐 하겠어요. 세금으로 사치한다는 욕이나 먹지.”
“욕하는 놈이 있다면 내가 처리해 줄까?”
“……그냥 가만히 계시는 게 저를 도와주는 거예요.”
“흥. 매일 나보고는 아무것도 하지 말래.”
너무 솔직하게 말했나 싶어 필로멜은 오랜만에 아부를 입에 담았다.
“사건이 일어나 봤자 좋을 것 없으니까요. 그리고 르귄 님은 옆에 계셔주는 것만으로도 제게 큰 힘이 돼요.”
강화 마법을 걸어주니 물리적으로 힘이 되기는 했다. 오늘도 르귄의 마법을 받았더니 필로멜의 전신에서 힘이 넘쳤다.
로잔느와 재회할 미래가 기다려졌다.
이유는 몰라도 금세 기분이 좋아진 르귄이 키득키득 웃었다.
“넌 걱정 붙들어 매. 오늘도 내가 알아서 해줄게. 마침 좋은 생각이 났으니까.”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시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그러나 르귄은 아랑곳하지 않고 빛무리와 함께 사라졌다.
‘왠지 느낌이 안 좋은데……. 기우겠지?’
필로멜은 작게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이후 무도회장까지의 에스코트는 제레미아가 맡았다.
예법을 익히고 그럴싸한 기사로 탈바꿈한 그가 마차에 오르는 필로멜의 손을 단단히 지탱했다.
“싫으면 언제든지 나와.”
퉁명스러운 말 속에 그녀를 걱정하는 마음이 녹아 있었다.
“얼굴만 비치고 나올 거예요.”
“춤은 안 춰?”
“예전에 실컷 춰서 생각 없어요. 올해 데뷔하는 영애도 아니니 굳이 출 필요도 없고요.”
“그렇군……. 원한다면 내가 상대해 주려고 했더니.”
“제레미아가? 춤을요?”
너무 안 어울려서 필로멜은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그야 제레미아도 기사이니 원한다면 무도회에 참석할 수야 있지만, 춤을 추는 모습이 도저히 상상이 안 갔다.
그가 발끈했다.
“뭐가 웃겨.”
“죄송해요. 마음만 받을게요.”
제레미아가 농담으로 그녀를 웃겨주는 사이, 마차는 외궁 무도회장에 도착했다.
같이 들어가겠다는 제레미아를 만류하고 필로멜은 혼자 회장으로 들어섰다.
부친이나 형제들의 마음은 고맙지만 누구와도 나누어 들 수 없는 짐이 있었다.
가짜 황녀.
온갖 소문이 무성한 인물.
필로멜이 앞으로 어떤 인생을 택하든 다수의 관심은 자연히 따라오기 마련이었다.
지금 이 순간을 무서워서 피했다간 평생 홀로 서지 못할 터.
영원히 누군가의 보호를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건 필로멜이 혼자서 감내해야 할 무게였다.
‘괜찮아 어릴 적 건국제 축제에서 연설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아.’
필로멜은 당당한 걸음걸이로 회장으로 들어갔다.
“레이디 필로멜께서 드십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대번에 필로멜을 향했다.
경악. 관찰. 탐색. 흥미. 비소.
그 모든 게 버무려진 관심이 그녀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필로멜은 지지 않으려고 뻣뻣이 목을 세우고 안으로 향했다.
인파가 양쪽으로 갈라지며 그녀에게 길을 내주었다. 몇몇 사람은 필로멜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당당한 건 좋지만 이건 좀 부담스러운데…….’
필로멜이 조금이라도 눈에 덜 띌 만한 장소를 찾아서 구석으로 가려던 차였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와 작은 태양, 황녀 전하께서 드십니다!”
그들의 등장으로 필로멜에게 집중됐던 관심이 옮겨갔다.
2층의 황족 전용 입구에서 손을 잡은 그들이 나왔다.
필로멜은 어쩐지 익숙한 듯 낯선 광경에 감상에 젖었다.
홀 안에 들어선 엘렌시아가 많은 사람들을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오.”
“황녀 전하.”
지켜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탄성이 흘렀다. 예법에 어긋나는 행위임에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매력적일 터다.
십 년 넘게 평민들 사이에서 자란 황녀가 귀족들에겐 얼마나 신선하고 흥미로울까.
<황녀 엘렌시아>에도 자세히 묘사된 내용이었다.
지나치게 냉담한 황제와 달리 자비롭고 따스한 황녀. 상반되면서도 조화로운 부녀는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그림이 됐다.
필로멜과는 달리.
‘나는 예법을 따르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는데 엘렌시아는 따르지 않아도 호감을 사는구나.’
불과 2년 전 데뷔탕트에서는 저 자리에 자신이 있었다. 그때는 저 자리에서 얼른 벗어나고만 싶었다. 그리한다면 자유롭기만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왜 마음 한구석이 쓰라린 걸까. 자신이 빠진 자리는 저리도 완벽한데도.
하지만 필로멜은 표정을 허물어트리는 대신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자신은 저 자리에 미련이 없다. 그래야만 한다.
“들으라! 이분은 엘렌시아 황녀 전하시다!”
다행히 폴란 백작이 엘렌시아에 대한 발표를 시작해서 필로멜은 주의를 돌릴 수 있었다.
백작은 엘렌시아의 출생, 필로멜과 뒤바뀌게 된 경위, 그리고 다시 황궁으로 돌아온 과정 등을 설명했다.
물론 뒤바뀌게 된 경위는 카트린의 죄를 덮어주기 위한 거짓이었고, 돌아온 과정에도 허구가 섞여 있었다.
백작의 이야기 속에서 필로멜은 상당히 미화되었다.
우연히 발견한 황후와 똑 닮은 소녀를 못 본 체하지 않은 선인.
기존의 지위를 포기하고 죄인으로 내몰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황제의 친딸을 찾아준 은인.
어차피 필로멜이 엘렌시아를 내버려 두었어도 일 년 뒤면, 카트린의 양심 고백으로 그녀는 황궁에 왔을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자들이 봤을 때, 필로멜의 행동을 의롭다고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나…….
“이에 따라 벨레로프 황가는 레이디 필로멜의 은혜에 깊은 감사를 표하고, 최고 훈장을 수여하며, 국빈으로서 귀중히 맞이할 것을 약속한다!”
백작의 감동 넘치는 웅변에 사방에서 박수 소리가 터졌다.
필로멜은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다행히 이내 주제가 엘렌시아의 미들 네임으로 넘어감에 따라 필로멜도 관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대신관이 엘렌시아의 미들 네임을 계시받았다는 대목에서 사람들은 환호했다. 벨레론 신의 가호가 여전히 이 땅에 있다는 상징이었다.
모두가 황녀의 미들 네임이 발표되기만을 기다렸다. 책을 본 필로멜은 안 들어도 아는 내용이었다.
엘렌시아의 미들 네임은 히알립소. 엘렌시아 히알립소 벨레로프가 그녀의 완전한 이름이다.
책의 결말부에서 밝혀지는 내용인데 ‘히알립소’란 고대 언어로 꺼지지 않는 희망을 의미했다. 즉, 엘렌시아의 존재 자체가 희망을 나타냄으로써…….
“대신관이 들은 이름은 바로 타스펠!”
‘……어?’
“이분은 엘렌시아 타스펠 벨레로프 전하시다!”
우레와 같은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홀을 가득 메웠다.
필로멜은 망연히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웃고 있는 엘렌시아를 바라봤다.
‘타스펠이라고? 히알립소가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