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70)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70화(70/183)
<70화>
* * *
로잔느는 코앞에 벌어진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기둥 뒤에서 신기한 반지의 빛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회장 안에 소란이 일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하여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더니…….
로잔느는 칠흑 같은 사내를 마주하고 헉, 숨을 들이켰다.
단순히 지엄하신 황제를 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가까이서 본 황제는 로잔느가 이제까지 만난 어떤 사내보다도 아름다웠다.
새카만 흑발과 그에 대비되는 하얀 얼굴. 단단하게 단련된 육체. 깊고 푸른 눈동자. 눈 밑으로 음울하게 드리운 거뭇한 기운조차 남자의 매력을 돋보이게 했다.
로잔느는 단언할 수 있었다.
그 어떤 초상화로도 이자의 아름다움을 다 표현할 길이 없으리라.
이윽고 남자가 내민 손을 보며 그녀는 내포된 의도를 고민했다.
필시 무언가를 달라는 의미인 듯한데 과연 그게 무엇일까?
곧 그 답과 함께 이 상황이 벌어지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쉽게 그려졌다.
황제가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라면 딱 하나밖에 없었다.
로잔느는 붉은 반지를 낀 손을 들어 올렸다. 폭발적으로 밀어닥치는 감정의 홍수로 인해 그녀의 몸이 들썩거렸다.
폭, 로잔느의 손이 살포시 검은 장갑을 낀 손에 얹어졌다.
남자의 보석 같은 푸른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이 숨죽인 상태였기에 어떤 이의 속삭임이 똑똑히 들렸다.
“이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모르겠네. 갑자기 황제 폐하께서 모습을 드러내시더니 저기 있는 영애에게 춤을 신청하셨네.”
로잔느는 자신감으로 빛나는 미소를 흩뿌렸다.
* * *
필로멜은 경악해서 그 광경을 바라봤다.
유스티스가 손을 내밀자 로잔느는 달라는 반지는 안 주고, 본인의 손을 줬다.
잠시간 자신이 그녀의 뺨을 너무 세게 후려친 탓에 머리에까지 충격이 가해져 정신이 나간 게 아닐까 의심됐다.
“갑자기 황제 폐하께서 모습을 드러내시더니 저기 있는 영애에게 춤을 신청하셨네.”
주위에 있던 사람이 숙덕이는 소리를 듣고 필로멜은 그들의 착각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홀에는 한창 무도곡이 흘렀고, 남녀가 서로 짝지어 춤을 추는 중이었다.
그 가운데 난입하여 이성에게 손을 내미니 춤 신청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파격적인 사건에 웅성거림이 점차 커졌다.
“황제 폐하께서? 설마.”
“아니야. 분명히 신청하셨어.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하지만 폐하께선 춤을 안 추시잖아.”
“황후 폐하께서 돌아가신 뒤로 춤추시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저 영애가 마음에 드신 걸까?”
“그렇다면 폐하께도 드디어 봄날이…….”
“마침내 태양의 옆자리가 채워지는가.”
오해가 새로운 오해를 낳았다.
어느새 사람들 사이에서 로잔느가 차기 황후처럼 거론되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황제가 미혼의 여성에게 진짜로 춤을 신청했다 하여도 이 정도의 소란이 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는 유스티스였다. 아내하고만 춤을 췄던 애처가.
아내가 죽자 아예 춤을 추지 않았던 그였으니, 춤 신청에 대단한 의미가 부여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불어난 오해에 제일 들뜬 사람은 당연 로잔느였다.
황제의 손을 꼭 쥔 로잔느가 홀 중앙으로 그를 이끌려고 했다.
“미천한 춤 솜씨이지만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로잔느만이 아니었다.
붉은 머리를 지닌 중년의 남성이 뛰쳐나왔다.
로잔느를 닮은 생김새로 보건대 그 남성은 마논 자작이었다.
“폐하! 저는 마논 자작이라고 합니다. 이제 막 수도로 올라왔습죠. 미흡한 점이 많은 여식이지만 부디 잘 부탁드리옵니다.”
마논 자작은 아예 춤추러 가라고 황제의 등을 떠밀었다. 황제의 장인이 될 생각에 겁을 상실한 듯했다.
‘난장판이군.’
필로멜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황제의 성정을 생각하면 한바탕 피바람이 불 수도 있었다.
‘괜히 이 자리에 있다가 같이 화를 당하기 전에 도망가야지.’
필로멜은 들어왔던 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때, 이제껏 석상처럼 굳어 있던 유스티스가 움직였다.
그는 로잔느의 손을 떼어낸 후에 필로멜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폐하, 어디 가시옵니까?”
“황제 폐하!”
로잔느와 마논 자작이 애타게 불렀으나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입구 앞에서 그가 말했다.
“필로멜, 한 가지만 묻지. 혹시 네 친구인가.”
친구가 로잔느를 의미한다는 것을 필로멜은 반 박자 늦게 알아챘다.
“맹세코 아닙니다!”
저런 친구를 둘 바엔 평생 친구 없이 사는 쪽을 택할 테다.
“알았다. 홍염의 반지에 대해선 잊어라.”
필로멜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유스티스는 착용하고 있던 장갑을 벗어서 내던졌다.
“더럽혀졌더군. 새로 하나 만들어주마. 그리고 폴란.”
“예.”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를 폴란 백작이 뒤편에서 대답했다.
“마논이라고 했던가. 파봐서 나오는 게 있으면 싹 다 가져와. 일가친척 가리지 말고.”
“알겠습니다.”
“재미있군.”
음산하게 웃는 얼굴은 재미와는 거리가 있었다.
필로멜은 마논 자작과 그 일가친척들에게 미리 애도를 표했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필로멜은 아침 일과로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펼쳤다. 오늘도 신문에서 집중적으로 다루는 주제는 변함없었다.
[황제 폐하의 그녀, 로잔느 마논 영애란 누구인가?] [특종! 마논 자작 가문의 내부 관계자와의 대담.] [황녀 전하의 귀환에 이어 좋은 소식까지, 황가의 겹경사.] [마논 자작, 국혼을 논하기엔 시기상조…….]제국의 여러 신문사들은 연일 황제의 새로운 러브스토리에 관한 기사를 쏟아내고 있었다.
연회가 끝난 다음 날에는 일부 신문만 조심스레 황제가 웬 영애에게 춤을 신청했다는 목격담 정도만 싣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황궁에서 아무런 제스처가 없자, 차츰 기사가 불어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무차별적으로 쏟아졌다.
하지만 관련된 정보가 너무 없다 보니 대다수의 기사가 그냥 소설이었다.
[실의에 빠져 살던 황제 폐하의 눈에 어느 날 들어온 매력적인 영애.] [데뷔탕트 내내 그녀를 지켜보던 폐하께서 연회 마지막 날, 용기를 내시어 춤을 신청하다.]이러쿵저러쿵.
필로멜은 착잡한 눈으로 기사들을 읽어 내려갔다.
맞은편에 앉은 제레미아가 헛기침을 했다.
“너무 마음 쓰지 마라. 평생 죽은 아내만 기리며 살 수는 없는 법 아닌가. 너야 복잡한 심정이겠지만 사람 사는 게 그렇다.”
“제레미아, 무슨 착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아빠의 재혼을 앞두고 우울함에 빠진 소녀가 아니에요.”
르귄이 거들었다.
“그래. 필은 그런 파렴치한 놈을 여태 아빠로 알고 산 세월에 환멸을 느끼는 거야. 어디서 자기 딸뻘을 여자로 봐.”
“그것도 아니에요.”
필로멜은 창가로 가서 바깥 풍경을 내다봤다.
자신의 손에서 떠난 반지 하나가 이런 사태를 불러올지 상상도 못 했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돼라.’
그렇지만 이제 필로멜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황제도 반지에 대해서 잊으라 했으니 잊어도 되겠지.’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면 황제의 새 연인 소식에 모두가 정신이 팔린 덕에 필로멜에 대한 뒷말은 쏙 들어갔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