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72)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72화(72/183)
<72화>
* * *
엘렌시아는 그 후 별다른 대거리 없이 자리를 파했다. 흥이 깨졌다는 이유에서였다.
로잔느는 의기양양하게 승리자의 미소를 짓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방향으로 봤을 때, 황제궁 쪽인 듯했다.
그렇게 황녀의 첫 다과회는 시작하자마자 엉망으로 끝나버렸다.
“좀 걷다 갈까.”
멜린다는 바로 돌아가지 않고 잠시 산책하기로 했다. 샌드위치를 한 입만 먹었음에도 속에 얹힌 느낌이었다.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남궁 쪽으로 향했다. 레이디 필로멜이 현재 기거한다고 알려진 곳이었다.
‘나를 만나주지 않으실 거야. 그분은 내게 그리도 잘해주셨는데, 난 저번에 봤을 때 인사도 제대로 안 했잖아.’
멜린다는 데뷔탕트에서 스쳐 가듯 필로멜과 눈이 마주쳤었다.
반갑게 다가가서 이야기 나누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남들 눈치에 고개만 숙였다.
근래 대부분의 귀족들은 필로멜의 위치를 가늠하고 있었다.
가짜 황녀였다가 이제는 국빈이 된 그녀의 입장은 전례 없고 참으로 모호한 것이어서 그들에겐 확신이 들지 않았다.
과연 지금 친하게 지낸다면 나중에 후환이 없을까.
멜린다의 아비, 루산 백작의 처지도 다를 바 없었다.
백작은 아내의 병환 치료에 도움을 준 전 황녀에게 감사함을 느끼면서도 당분간은 상황을 지켜보자고 딸에게 주의를 줬다.
그만큼 귀족 생태라는 것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환경이었다. 남부러울 것 없이 떵떵거리던 엘로스 가문도 하루아침에 망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때 별 기대 없이 터덜터덜 남궁 쪽 길을 걷던 멜린다의 눈에 보고 싶던 사람이 들어왔다.
“사고 쳐 놓고 도망가면 다예요? 제대로 사과하기 전까진 저 르귄이랑 말도 안 할 거예요.”
누군가가 고양이 한 마리를 혼내고 있었다.
“……레이디 필로멜?”
그러자 필로멜이 멜린다 쪽을 돌아보더니 “어.” 하고 소리 냈다.
“루산 영애!”
그녀가 밝게 웃었다.
* * *
필로멜은 멜린다를 남궁 후원으로 초대했다.
그녀는 멜린다의 걱정과는 다르게 아무런 싫은 내색 없이 멜린다를 반갑게 맞아줬다.
필로멜이 소박한 다과상을 내려다보며 머쓱하게 말했다.
“급하게 차려서 별것 없어요.”
“아니요! 엄청 맛있는걸요!”
멜린다는 손사래 쳤다.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맛있었다.
엘렌시아 황녀의 다과회에 있던 값진 디저트들은 모래 씹는 맛이었는데, 지금 먹는 것은 입에서 살살 녹았다.
그리고 무려 필로멜이 직접 우려낸 차라니!
하녀가 없냐는 질문에 그녀는 앞으로 단순한 건 자기가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 모습이 어쩐지 대단해 보였다. 소화가 잘 안 되는 것 같던 느낌도 한순간에 사라졌다.
‘역시 좋아하는 사람과 있는 시간은 편하구나…….’
필로멜의 스스럼없는 태도를 보며 멜린다는 한층 더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아무도 모르는 미래를 지레 걱정하여 이런 분을 소원히 하려고 하다니.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테야!’
그녀는 다시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 다짐했다.
그리고 필로멜과 잘 지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잘 설득하면 아버지도 이해해 주실 거다. 기본적으로 성품은 따듯하신 분이니.
‘나중에 다른 영애들도 설득해보자.’
멜린다는 여전히 필로멜 전 황녀를 좋아하는 영애 몇 사람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때였다. 멜린다의 눈에 풀밭에 늘어져 있는 고양이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고양이를 기르시는지는 몰랐어요.”
“……네, 뭐. 그렇게 됐어요.”
필로멜이 왜인지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희 집에도 고양이가 두 마리 있어요. 정말 귀여운 아이들이에요. 할 수만 있다면 필로멜 님께도 보여드리고 싶네요.”
멜린다는 그런 필로멜의 모습에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둘 사이의 공통점을 찾은 게 반가워 눈을 반짝였다.
“그러면 언제 제가 한번 루산 저택에 방문해도 될까요?”
“세상에! 정말요?”
“영애의 가족분들만 괜찮으시다면?”
“괜찮아요! 안 괜찮아도 제가 괜찮게 만들게요!”
뛸 듯이 기뻐하는 멜린다를 보고 필로멜이 후후 웃었다.
“제가 나중에 정식으로 초대장을 보낼 테니까 꼭 오셔야 해요! 약속하셨어요!”
“물론이죠.”
멜린다는 행복감에 젖었다.
고양이들이 복덩이가 따로 없었다.
“그런데 필로멜 님의 고양이는 이름이 뭐예요? 아까 귄……? 귄 어쩌고 하지 않으셨어요?”
갑자기 필로멜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귄…….”
“귄?”
“귄귄이요!”
그 이상한 이름에 멜린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귄귄……?’
어쩐지 필로멜을 보는 고양이의 시선이 곱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멜린다는 그녀의 새로운 일면을 알아낸 것에 기뻐했다.
‘완벽하신 줄로만 알았는데. 이름 짓는 센스는 부족하시구나.’
역시 사람이 모든 면에서 뛰어날 순 없지! 그런 점도 왠지 귀엽게만 느껴졌다.
멜린다는 계속해서 필로멜에 대해 평소 궁금했던 점을 질문했다. 그녀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레이디 필로멜은 귄귄이한테 존대하세요?”
“……전 원래 고양이한테 존댓말 써요.”
“그렇구나. 그런데 아까는 귄귄이를 왜 그렇게 혼내고 계셨어요?”
“얘가 좀 사고를 쳐서요.”
“어떤 사고요?”
“방 안에 있던 도자기를 깨트렸지 뭐예요.”
“저희 고양이도 그런 적 많아요. 집에 뭘 못 두겠다니까요.”
필로멜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어휴. 요즘 귄귄이가 사고를 많이 치네요. 괜히 시끄럽게 굴고 자꾸 치대고.”
멜린다는 필로멜에게 뭐라도 도움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불쑥 이렇게 말했다.
“그거 발정기 증상 아닐까요?”
“……네?”
“그러니까 귄귄이가 발정이 난 게, 읍!”
황급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필로멜이 멜린다의 입을 막았다.
“거기까지만 말하는 게 좋겠어요, 루산 영애.”
* * *
티타임을 즐기던 멜린다가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간 후, 후원은 다시 필로멜과 네 부자의 차지가 되었다.
“크하하하! 발정기래! 발정기! 오구, 우리 귄귄이 발정기예요?”
카딘이 허리를 접으며 폭소했다.
“…….”
으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얼마 뒤, 그는 꽁꽁 묶인 채 나무에 거꾸로 매달리고 말았다.
“악! 잘못했어! 내려줘! 머리로 피가 쏠린다고!”
필로멜은 제레미아를 책망하는 눈길로 바라봤다. 멜린다가 한 말을 렉시온과 카딘에게 흘린 범인이 그였다.
“어쨌든…… 큭, 이제부터는…… 조심하는 편이…… 좋겠군요. 그 영애가…… 중요한 내용을 들었다면…… 귀찮을 뻔했네요.”
옆에서 렉시온이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르귄이 노려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필로멜은 이미 했던 질문은 다시 한 번 입에 담았다.
“……르귄, 정말 멜린다는 안 건드리는 거죠?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잖아요.”
오늘 대화를 나누며 필로멜과 멜린다는 서로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다. 멜린다는 영광이라며 몇 번이나 기뻐했다.
“안 한다니까. 내가 그렇게 나쁜 놈으로 보여?”
르귄에게서 몇 번째 같은 확답이 돌아왔다. 그제야 조금 안심한 필로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어디 좀 갔다 올게요.”
“어디 가는데?”
“어느 분이 국보를 깨트리셔서 황제께 사죄하러 갑니다.”
르귄 때문에 깨진 도자기에 대해 유스티스에게 보고해야 했다.
‘하필 국보일 게 뭐람.’
“내가 변상금 줄게.”
르귄이 툴툴대며 말했다.
“됐어요. 갑자기 돈이 어디서 났다고 둘러대요. 제 추측이지만…… 아마 이런 거로 크게 뭐라고 안 할 거예요.”
필로멜은 가볍게 거절의 말을 뱉고 돌아섰다.
그리고 산책할 겸 황제궁 앞까지 걸었다. 그런데 황제궁 앞에 희한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근위병들에게 붙잡힌 로잔느가 바락바락 고함을 치고 있었다.
“어디 내 몸에 손을 대! 내가 누군지 알아? 너희들 나중에 다 가만 안 둘 줄 알아!”
아무래도 황제궁에 무단으로 들어가려다 제지당한 듯싶었다.
필로멜은 유유히 그 옆을 지나쳤다.
필로멜을 본 근위병 하나가 인사했다.
“필로멜 님, 안녕하십니까!”
“고생하시네요.”
“아닙니다! 이게 저희의 업무인걸요. 자, 들어가시죠.”
궁으로 들어서는 필로멜의 뒤쪽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나는 막고 쟤는 왜 들여보내는 거야!”
참 기운도 좋다.
필로멜이 보기에 로잔느와 그 일가는 열심히 파멸의 구렁텅이로 달려가고 있었다.
로잔느가 벌이고 다니는 짓은 안 들으려야 안 들을 수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필로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적어도 추락하기 전까지는 그 행복 실컷 즐겨두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