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77)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77화(77/183)
<77화>
병을 깨끗이 비운 후에야 풀려난 카딘에게 렉시온이 물었다.
“그래서 어땠습니까?”
“어, 응. 꽤 맛있던데? 레모네이드 맛이었어.”
카딘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맛 말고 효과요.”
“음……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37 곱하기 9는?”
“333.”
“확실히 똑똑해졌습니다. 우리의 가설이 정답인 모양이군요.”
렉시온이 단호하게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가설을 확인한 후에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엘렌시아는 어떤 경로로 이 약을 얻었을까? 이 약에서 에스텔리온이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그 질문에 답을 줄 만한 사람은 없었다.
‘막막하다.’
사실, 그동안 필로멜도 손 놓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데뷔탕트 날, 미들네임이 책과 달라진 엘레시아를 보며 그녀는 가설을 세웠다.
‘현 엘렌시아의 영혼은 책에 나온 엘렌시아와는 다를지 모른다.’
당장 떠오르는 것은 악령 빙의 현상이었다.
필로멜은 실제 신관들이 악령 퇴치에 사용한다는 성수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저번처럼 황제와 엘렌시아의 식사 자리에 초대되어 갔을 때…….
“앗, 차가워!”
잔에 부어둔 성수를 슬쩍 엘렌시아의 뒷머리에다 뿌렸다.
그게 정해진 구마 의식이었다.
마음 같아선 에밀리한테 시키고 싶었지만 하녀가 그랬다간 크게 경을 칠 것 같아서 관뒀다.
적은 양이지만 엘렌시아는 당연히 알아챘다.
그때까지 실컷 황제한테만 말을 걸던 엘렌시아가 필로멜을 돌아본 것이다.
필로멜은 엘렌시아가 따지기 전에 선수를 쳤다.
“어머나! 전하, 죄송합니다! 그만 손이 미끄러지고 말았어요.”
“……어떻게 미끄러지면 제 머리에 뿌리는데요?”
엘렌시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날카롭게 물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필로멜은 뻔뻔하게 나갔다.
엘렌시아에 대한 공포심은 르귄이 자동 방어 마법을 걸어준 뒤로 많이 희석된 참이었다.
“필로멜, 당신…….”
그때 유스티스가 입을 열어 엘렌시아를 만류했다.
“엘렌시아. 필로멜이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까지 하지 않았나.”
“아빠!”
“이제 그만해라.”
엘렌시아는 억울한 눈치였지만 입을 다물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엘렌시아에게 악령이 씌었다는 가정은 필로멜의 헛다리였다.
사실 좀 말이 안 되는 가정이긴 했다. 엘렌시아는 신성력을 다룰 줄 알았다. 데뷔탕트 날 사람들 앞에서 시범도 보였다.
악령이 씌었는데 어떻게 성스러운 힘을 다루겠는가.
다만, 필로멜이 희미한 가능성에 걸어볼 정도로 책의 진실 찾기가 막다른 길에 놓여 있다는 증거였다.
모두 고민에 빠져 있는데 르귄이 빈 병을 집어 들었다.
“이건 내가 마탑에 가져가서 조사해 볼게.”
“하지만 물약은 다 마셨는데 조사할 게 있어요?”
필로멜의 물음에 르귄이 병을 가리켰다.
“평범한 마법 약 용기치고는 상당히 공을 들이지 않았어?”
유리병은 예쁜 별 모양이었다.
“겉모양에 이렇게 신경 쓴 걸 봤을 때, 높은 확률로 고급 상품이야. 뒤져보면 판매처를 알 수 있겠지.”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니면 그 책처럼 병의 구성 물질 자체를 조사해 볼 필요가 있을지도.”
“책이라면 제가 드린 책이요?”
“그래. 아직 확신할 단계는 아니어서 말 안 했었는데……. 그 책은 세상에 없는 물질로 구성됐을 가능성이 높아.”
렉시온이 지당한 의문을 표했다.
“세상에 없는 물질로 이루어진 물체라니, 그게 가능합니까?”
“자세한 건 다른 희귀 물질들과 더 대조해 본 다음에야 알 수 있지만…….”
황금빛 눈동자가 빛났다.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온 것이라면 가능하지.”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라니.
그런 게 정말 존재하는가.
필로멜은 의문스러웠으나 세 형제는 의외로 별말을 꺼내지 않았다.
각자 생각에 잠긴 듯했다.
“어디까지나 가설이야. 그래도 나 또한 꽤 흥미로워지는걸. 이런 곳에서 에스텔리온일지도 모르는 힘을 발견하게 될 줄이야.”
르귄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이동 마법으로 사라졌다.
그날의 사건은 필로멜이 다른 세계라는 하나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볼 계기가 되었다.
* * *
책의 진상을 파헤치는 일 외에도 필로멜의 일상은 다양한 사건으로 가득했다.
계절이 서서히 초여름에 접어드는 어느 날. 황제궁의 시종이 필로멜의 처소로 찾아왔다.
“황제 폐하께서 준비하신 선물이 드디어 완성되어 황궁에 도착했습니다. 시간 되실 때 호수로 와주십시오.”
“선물?”
“필로멜 님의 저번 탄신일 선물 말입니다.”
아, 까맣게 잊고 있었다.필로멜은 선반 한구석을 장식한 황금 배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유스티스가 저것과 같은 형태의 진짜 배를 준다고 했었다.
‘제작 중이라고 했는데 이제 완성됐구나.’
솔직히 배는 필요 없었다.
필로멜은 뱃놀이를 그리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다.
게다가 따지자면 황녀일 적에 받은 선물이니 지금의 자신이 갖기에도 좀 그랬다.
그래도 이왕 받은 선물, 한 번도 안 본 채로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닌 듯해서 필로멜은 길을 나섰다.
황궁 안에 위치한 거대한 호수에 이르렀을 때, 가장 먼저 놀잇배가 눈에 들어왔다.
과연, 섬세한 자태가 무척이나 유려한 배였다.
황금 모형으로 이미 형태를 알고 있었던 필로멜조차 처음 보자마자 탄성이 절로 나왔다.
배에서 시선을 조금만 옆으로 옮기니 소녀의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나들이 복장을 한 영애들이 호수 선착장 앞에 모여 있었다.
선두에 선 엘렌시아가 시종과 대화 중이었다.
“왜 제가 못 탄다는 거죠?”
“죄송합니다, 황녀 전하. 이 배는 황제 폐하께서 필로멜 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저도 탈 권리가 있다고요!”
듣기만 해도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지는 일인 것 같았다.
못 본 척 슬쩍 발길을 돌릴까 고민하던 필로멜 곁에 렉시온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남의 눈에 안 띌 만한 위치로 이동했다.
“렉시온,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완성된 배가 도착했다고 하여 구경하러 왔습니다.”
“렉시온도 저 배에 관심이 있어요?”
“당연하죠. 저도 제작에 참여했으니까요.”
“배도 만드세요?”
“정확히 말하자면 배 자체가 아니라 배에 걸린 마법 술식을 제가 짰습니다. 저 배도 일종의 마도구인 셈이죠.”
“그렇구나.”
필로멜은 고개를 끄덕이며 렉시온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렉시온은 마도구 관리가 업무 아니었나요? 제작에도 관여하시는 줄 몰랐네요.”
“워낙 금액이 큰 의뢰여서 저도 동원되었습니다.”
유스티스가 돈 좀 썼나 보다.
그런데 눈을 내리깐 렉시온이 조용히 말했다.
“대충 만든 건 아니지만 주인이 당신인 줄 알았다면 더 공을 들일 걸 그랬습니다.”
“괜찮아요. 마음만 받을게요.”
“설마 안 타볼 생각인가요?”
“반납할까 하는데요.”
“제가 만든 배를요? 한 번도 안 타보고요? 전 필이 꼭 타주었으면 좋겠어요.”
“…….”
이렇게까지 말하면 계속 싫다고 하기에도 미안하다.
“알았어요. 일단 타보기는 할게요.”
결국 렉시온의 눈빛에 진 필로멜이 선착장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엘렌시아 황녀를 상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시종이 필로멜을 보고 반색했다.
“그러니까 황녀님, 이 배는 필로멜 님의 소유물입니다. 제가 함부로 황녀님을 태워드릴 수가 없습니다.”
엘렌시아가 반박했다.
“하지만 이 배는 필로멜이 황녀였을 무렵에 아빠가 선물한 거잖아요. 그렇다면 필로멜에게 준 선물이 아니라 딸인 황녀에게 준 선물이죠. 지금 황녀는 저이니 결국 저의 것이나 다름없어요.”
그녀에게도 나름의 논리는 있었다. 어찌 보면 맞는 말이기도 했고.
엘렌시아 뒤에 있던 영애 세 명도 필로멜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놀잇배에 탈 수 있는 인원이 최대 네 명이라 엘렌시아를 제외하고 셋을 부른 듯했다.
셋 다 고위 귀족가의 자제이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필로멜은 가까이 두지 않았던 자들이었다.
엘렌시아가 의기양양하게 필로멜을 바라봤다.
“어때요? 제 말이 틀렸나요? 틀렸으면 말해봐요. 들어줄게요.”
필로멜은 지독한 귀찮음을 느꼈다.
여기서 책의 진상도 아닌 배 때문에 엘렌시아와 실랑이를 벌이기 싫었다.
어차피 렉시온은 자신이 배에 타주었으면 좋겠다고 했지, 배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필로멜은 선뜻 말했다.
“저는 괜찮으니까 이 배는 엘렌시아 님이 가지세요.”
엘렌시아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진심이에요?”
“네.”
“제가 가져도 된다고요?”
“그래요.”
그렇게 원하던 배를 양보한다고 했지만 엘렌시아는 기뻐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분한 듯이 양산을 쥔 손이 떨렸다.
‘정말 이상한 애야.’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처음 봤을 땐 속 모를 미소만 짓던 엘렌시아가 현재는 부정적인 감정도 잘 내비친다는 것이다.
엘렌시아는 기세를 바꿔 다시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좋아요! 필로멜도 좋다고 했으니, 제가 이 배에 처음으로 오르는 사람이 될게요. 그래도 되죠?”
“원하시는 대로.”
흥, 하고 필로멜을 지나친 엘렌시아가 가장 먼저 배에 오르고 영애들이 뒤따라 탔다.
마력으로 알아서 움직이는 배이기에 노 저을 사람은 필요치 않았다.
필로멜 곁에 있는 시종은 연신 “안 되는데, 안 되는데…….” 말하면서도 황녀 일행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했다.
필로멜은 별생각 없이 그 광경을 바라봤다.
‘나는 나중에 태워달라 하지, 뭐. 안 된다고 하면 몰래 타고.’
그런데 마지막 영애가 배에 오른 순간.
위잉위잉!
갑자기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경고음이 들리더니 배가 기우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