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8)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8화(8/183)
<8화>
* * *
곁에 있던 방해꾼들이 사라진 뒤 필로멜의 일상은 순조로웠다.
빈틈없는 일정과 어디에서나 따라붙는 남들의 시선,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는 가끔 그녀의 숨을 턱 차오르게 했지만 나름 버틸 만했다.
다행히 유모와 기존 하녀들이 없어져 마음은 한결 편했고, 델레스 백작 부인과 새로 온 하녀들은 자기 본분을 잘 지켰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아침 식사를 하기 전에 홀로 방 안에서 책장을 넘기던 필로멜이 중얼거렸다.
유모와 그 일당이 사라지고 서서히 남들의 인정도 받게 된 건 좋다. 그래도 아직 안심하긴 일렀다.
적어도 혼자 도주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 한다.
지금은 9살의 어린 나이이고 아이의 몸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 앞으로 몇 년간은 어렵겠지만, 추후 황궁을 떠났을 때 먹고 살 수 있어야 했다.
‘일단 용돈을 쪼개 도주 자금은 차곡차곡 모아놓고 있는데……. 또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도주 방법?
이건 나름대로 생각해 둔 바가 있었지만, 이 계획을 살리기 위해서는 큰 난관이 있었다.
그건 바로 황제한테 점수 따기.
도망치는 데에 쓰기 딱 좋은 아이템이 있는데 문제는 이게 황가의 보물이었다. 황제 혹은 황제에게 인정받는 후계자나 되어야 쓸 수 있는 보물.
“하지만 어떻게 점수를 따냐고…….”
최근 황제가 필로멜을 다시 보긴 했지만 겨우 그 정도로 사이가 극적으로 가까워지진 않는다.
가끔 식사 자리에 불려 갔지만 그 이상의 관계 진전은 없었다.
‘음……. 어쩌지?’
그렇다고 황가의 보물을 포기하기엔 그만한 아이템이 없는데.
습관적으로 <황녀 엘렌시아>를 다시 읽던 필로멜이 눈을 빛냈다.
“그래, 이거다!”
필로멜은 곧바로 설렁줄을 당겨 델레스 백작 부인을 부른 다음 어떤 물건을 가져와 달라 부탁했다.
얼마 후, 백작 부인이 녹색 가루가 든 약병을 가져왔다.
“말씀하신 산살초를 빻아서 만든 가루입니다.”
“감사해요!”
“뭘요. 그런데 산살초 가루가 왜 필요하신지 물어도 될까요? 보통은 약재료로 쓰이는 물건인데요.”
“이걸로 차를 우려서 폐하께 드릴 거예요.”
“……황제 폐하께요?”
“네! 폐하께선 술을 자주 즐기시잖아요. 제가 책에서 봤는데 산살초를 끓인 물이 숙취 해소에 좋대요!”
필로멜은 일부러 순진한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겪어본 바, 백작 부인은 아이의 동심을 지켜주고 싶어 하는 좋은 어른이었다.
“음……. 그렇군요. 폐하께서도 황녀님의 효심을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
예상대로 부인은 표정을 잠시 흐렸지만 곧 웃으며 필로멜을 응원했다.
“그럼 찻주전자와 찻잔도 준비할까요?”
“거름종이도 부탁해요!”
“후후, 금방 가져다드릴게요.”
델레스 백작 부인이 방을 나가자마자 필로멜은 약병의 뚜껑을 열고선 코를 가까이 댔다.
“으아, 냄새!”
톡 쏘는 시큼한 냄새가 진동했다.
산살초 차를 황제에게 줄 거라는 필로멜의 말에 백작 부인이 모호한 반응을 보인 이유가 이거다.
산살초가 숙취에 좋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나, 과음한 다음 날 산살초 차를 즐겨 마시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바로 지독한 냄새와 냄새보다 두 배는 더 지독한 맛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게 있으니 괜찮아.’
필로멜은 방 깊숙한 곳에 있는 금고 앞으로 가서 문을 열고 자기 팔뚝만 한 유리병을 꺼냈다.
병 안을 가득 채운 옅은 금빛 액체가 출렁였다. 바로 세계수 열매의 즙이었다.
쓰디쓴 산살초 차에 세계수 열매즙을 타면 놀랍게도 쓴맛이 중화되어 먹을 만해진다고 한다.
책에서 엘렌시아가 아버지께 받은 세계수 열매즙을 산살초 차에 넣었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사실이었다.
‘좋은 것에 좋은 걸 섞으면 더 건강에 이로워지겠지.’라는 단순한 발상에서 이런 기막힌 우연이 나오다니.
‘역시 진짜 황녀는 뭐가 달라도 다른 법인가.’
필로멜은 씁쓸하게 웃었다.
어쨌든 그렇게 엘렌시아에 의해 그냥 산살초 차보다 숙취 해소에 더욱 탁월하며 원기 회복도 돕는 일명 ‘특급 산살초 차’가 탄생한다.
그전까진 누구도 감히 귀한 세계수 열매즙을 지독한 차에 넣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엘렌시아가 ‘특급 산살초 차’의 첫 발명자인 셈이다. 물론 필로멜이 가로챌 테지만.
‘미안! 엘렌시아. 어차피 넌 이거 없어도 잘 먹고 잘 살 테니 나한테 양보해 줘.’
속으로 대충 양해의 말을 구하고 나니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
필로멜은 그녀가 가져온 거름종이로 산살초 차를 우린 다음, 티스푼으로 금빛 액체를 떴다.
최상의 맛을 내려면 비율이 중요하다.
필로멜은 책에 나온 대로 티스푼으로 두 술을 넣었다. 조심조심 티스푼을 휘저어 찻물을 섞는 그녀의 콧잔등에 땀이 맺혔다.
“됐다!”
슬쩍 맛을 봤더니 묘하게 단맛이 나는 게 맛만 좋았다.
‘엘렌시아, 너는 마음씨가 착해서 이 귀한 차를 숙취를 앓고 있는 어느 기사에게 줬을지 몰라도 나는 달라.’
좋은 건 권력자한테 줘야지.
필로멜은 일찍 깨우친 세상의 이치에 따라 그길로 황제의 침실로 향했다.
차 쟁반은 뜨거워서 위험하다며 델레스 백작 부인이 대신 들고 따라와 줬다.
어제 황제는 오랜만에 고위 귀족들과 정찬을 가졌다고 들었다.
식사가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고 하므로 오늘 아침 그가 숙취를 앓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런데 침실로 향하던 중, 필로멜은 폴란 백작과 마주쳤다.
폴란 백작은 필로멜의 설명 듣고는 눈시울을 붉혔다.
“드디어 두 분 사이에도 봄기운이……! 마침 폐하께서 곧 기침하실 시간입니다. 가시죠.”
‘역시 숙취로 아직 일어나지 않았나 보다.’
필로멜은 내심 기뻐하며 황제의 침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침실의 문을 열고 백작이 먼저 들어섰다.
“폐하, 누가 오셨는지 보시지요!”
침대 위에서 괴로움에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울리니까 소리치지 마.”
누워 있던 유스티스가 부스스 잠에서 깨어났다.
‘이때다!’
필로멜은 백작 부인으로부터 차 쟁반을 받아 들고 침대로 가까이 다가갔다.
“폐하, 강녕하신지요?”
필로멜은 그동안 열심히 연습한 예의 바른 태도로 인사를 했다.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유스티스가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필로멜? 네가 왜 여기 있지.”
“폐하의 건강에 도움이 될까 하여 산살초 차를 가져왔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한 잔 드시지요.”
뒤에서 폴란 백작이 거들었다.
“황녀 전하께서 직접 우리셨다고 합니다. 전하의 효심이 갸륵하지 않으십니까.”
유스티스는 퀭한 얼굴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를 내려다봤다.
구리구리한 냄새 때문인지 창백한 낯빛이 더욱 안 좋아졌다. 세계수 열매즙은 산살초의 맛은 잡아주어도, 냄새까지 잡아주진 못한다.
‘설마 그렇다고 안 마시는 건 아니겠지?’
걱정이 된 필로멜은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비록 냄새는 이렇지만 맛은…….”
윽, 필로멜의 인상이 순간적으로 찡그려졌다.
‘술 냄새!’
산살초 향에도 가려지지 않는 술 냄새가 황제에게서 풍겼다.
필로멜의 눈에 테이블을 가득 채운 빈 술병들이 들어왔다. 그 전에 마신 걸 시종들이 안 치웠을 리 없으니, 저건 어젯밤 사이 마신 술병들일 것이다.
‘정찬이 끝난 후에도 저만큼이나 또 마셨다고?’
저절로 눈이 동그래졌다.
“나한테서 떨어져.”
필로멜의 생각을 읽었는지 유스티스가 뒤로 몸을 물렸다.
“하지만…….”
쟁반을 든 필로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무거워서 더는 무리인데!’
찻주전자와 찻잔이 놓인 쟁반을 어린아이가 오래 들고 있는 건 무리였다.
“……이리 내놔.”
한숨을 쉰 유스티스가 쟁반을 가져가 침대 위에 놓았다. 그는 찻물과 눈싸움이라도 하듯 한참을 노려보더니 단숨에 찻잔을 비웠다.
“……?”
잔뜩 금이 가 있던 미간이 곧 매끈해졌다.
“맛이…… 나쁘지 않군.”
예상대로의 결과에 필로멜이 빙그레 웃었다.
“그렇죠? 세계수 열매즙을 탔더니 쓴맛이 사라졌습니다.”
“셰계수 열매즙?”
“네! 폐하께서 제게 주신 거요.”
“……너 먹으라고 줬거늘.”
“저는 이제 아픈 곳이 없는걸요. 그렇지만 폐하께선 자주 숙취로 고생하시니까…….”
폴란 백작이 맞장구쳤다.
“이제 황녀 전하를 생각하셔서라도 이제 술을 줄이시지요. 아무리 폐하께서 강건하시다지만, 십 년이나 술을 그리 들이켜시면 건강에 이상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시끄러워.”
“황녀 전하께서 아직 어리신데…….”
“시끄럽다니까.”
둘의 대화를 들으며 필로멜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술을 많이 드셨구나.’
평소에 그와 만날 일이 없어서 몰랐다.
‘게다가 십 년 전이라면…….’
필로멜이 태어났을 무렵이다. 동시에 이사벨라 황후가 죽었던 해이고.
아마 그는 황후가 죽은 후로 실의에 빠져 과음을 하며 살았나 보다. 겉만 멀쩡하지 속은 영 폐인인 모양이었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내도 죽은 마당에 알고 보니 딸마저 가짜라니.’
하지만 필로멜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 누굴 동정해?’
언젠가 자신을 죽일 사람이다. 그러니 도망치기 전까지 마음을 약하게 먹어서는 안 됐다.
“필로멜.”
그때 잔을 쟁반에 내려놓은 유스티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덕분에 머리가 좀 맑아졌군. 혹시라도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거라.”
됐다!
필로멜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황제는 상과 벌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기특한 일을 했으니 보상으로 소원을 물을 것이라 생각했다.
무엇을 해달라고 해야 할까.
‘겨우 이거 가지고 그 아이템을 달라고 하기엔…… 너무 일러.’
그렇다면.
잠시간 고민하던 필로멜이 원하는 것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