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80)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80화(80/183)
<80화>
* * *
다행히 괴상한 모양의 구름은 손님 중 누군가가 알아채기 전에 사라졌다.
사람으로 변한 르귄에게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못 봤어도 다른 곳에 있는 사람이 봤을지도 모른다고 따졌더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진짜 구름이 아니고 환상 마법이야.”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주변에만 마법을 걸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는 평범한 구름만 보인다고 했다.
‘십년감수했다…….’
얼음조각상까지는 그렇다 쳐도 구름은 아니지, 아니야.
필로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지금도 참석자들은 필로멜을 자기 생일 축하에 궁정 마법사까지 동원하는 유난한 이로 알 텐데 저런 낯부끄러운 짓까지 시켰다는 오해를 살 순 없었다.
르귄을 돌려보낸 후, 필로멜은 연회장으로 복귀했다.
손님들은 입석으로 자유로이 연회를 즐기다가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지정된 좌석에 착석했다.
열두 명의 손님이 세 개의 테이블에 나누어 앉았다.
참석자 중 유일한 남성인 나사르는 필로멜 옆에 앉혔다. 그나마 자신이 이 중에서 제일 나사르와 안면이 있었다.
식사를 하며 필로멜이 그에게 물었다.
“여기 있는 거, 혹시 불편하지는 않아요?”
나사르가 눈매를 곱게 접어 웃었다.
“그럴 리가요. 정말 좋은 연회입니다.”
“하지만…… 남성분이 나사르 한 명뿐이잖아요.”
“그 점이 제일 마음에 듭니다.”
“……?”
뭐지? 여자들 사이에 있는 걸 즐기나?
필로멜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다른 영식을 초대하는 편이 좋았을까요?”
“…….”
“이를테면, 나사르의 절친한 친구인 오델리 후작 영식이라든가…….”
갑자기 그의 수려한 입매가 굳어졌다.
“저는 친구 필요 없습니다.”
필로멜은 더더욱 의문에 빠져들었다.
‘어라. 예전에는 친구가 많았던 것 같은데……. 그사이 인간관계가 협소해지기라도 했나?’
오찬이 끝난 후에는 필로멜이 참석자들로부터 차례로 선물을 받았다. 귀걸이, 공단 리본, 책갈피, 나들이 모자 등 종류도 다양했다.
마지막은 나사르의 선물이었다.
그는 필로멜에게 리본으로 묶은 간소한 꽃다발을 건넸다.
“이건…….”
푸릇한 줄기에 넓게 펴지는 여러 겹의 순백의 꽃잎이 보였다.
필로멜도 익히 아는 꽃이었다.
“……필로멜 꽃.”
그녀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꽃이었다.
그런데 희한한 점이 있었다. 그녀가 아는 필로멜 꽃보다 꽃봉오리가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째서 이 꽃이 아직까지도 피어 있죠?”
제일 큰 의문이었다.
필로멜 꽃은 유티나 지방에서만 피어나는 하루살이 꽃이었다. 정확히는 하루도 아니고 하룻밤 동안에만 꽃이 피어났다가 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도 실물로는 본 적이 없었다.
하룻밤이 지나기 전에 유티나에서 수도까지 꽃을 이동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뛰어난 이동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를 부리면 못 할 것도 없었지만, 필로멜은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이 꽃이 보고 싶진 않았다. 꽃의 꽃말이 마음에 안 들기 때문이었다.
필로멜 꽃에는 ‘인생무상’, ‘덧없는 청춘’, ‘좋은 시절의 허무함’ 등의 꽃말이 있었다.
아름다운 자태에도 불구하고 짧은 수명을 가진 비애를 빗대어 표현한 말이었다.
뭐, 사람 이름으로 붙이기엔 좀 어색한 감이 있는 꽃이었다. 꽃말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사르가 필로멜의 의문을 해소해 줬다.
“품종 개량을 통해 꽃의 수명을 훨씬 연장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꽃봉오리도 커졌지만요.”
그는 이어서 작은 주머니도 필로멜의 손에 쥐여주었다.
“종자입니다. 저희 집 정원에서도 꽃을 피워냈으니 이곳에서도 잘 자랄 겁니다.”
헝겊 천 아래로 씨앗의 감촉이 느껴졌다.
“아직 이 꽃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필로멜 님께서 하나 지어주십시오.”
필로멜은 꽃다발에 코를 대고 향기를 맡아봤다. 평범하게 좋은 꽃향기였다. 희미하지도, 슬프지도 않은.
이 꽃에는 평범하게 예쁜 꽃말이 붙을 테다.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기분 좋아졌다.
필로멜은 근사하게 웃었다.
“정말 고마워요, 나사르.”
선물 수여가 끝나자 다과회가 열렸다.
테이블의 좌석 배치는 오찬 때와 달라졌으나, 나사르는 여전히 필로멜의 옆자리였다.
나머지 두 자리에는 멜린다와 고드리프 영애가 앉았다. 네 사람은 한담을 나눴다.
고양이에 대한 화제가 나왔을 때였다. 고드리프 영애가 무언가 떠오른 듯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 필로멜 님의 고양이는 이름이 뭐예요?”
“아, 이름은…….”
멜린다가 필로멜보다 먼저 대답했다.
“귄귄이요!”
나사르가 칭찬했다.
“독특하고 좋은 이름입니다.”
하지만 고드리프 영애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은 걸 보아서는 나사르만의 의견인 듯했다.
멜린다는 안 해도 될 말까지 했다.
“그런데 요전번에 보니까 귄귄이가 발정기여서 필로멜 님이 고민이신 것 같더라고요.”
그러자 고드리프 영애가 당혹스러운 제안을 했다.
“아, 저희 고양이도 암컷인데 마침 발정기예요. 다음에 한번 둘을 소개해 주면 어떨까요?”
고양이 새엄마가 생기게 둘 순 없어 필로멜은 대충 둘러댔다.
“우리 귄귄이는 중성화시킬 예정이어서요.”
그런 소소한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홀로 남궁 후원에 나타난 엘렌시아가 명랑하게 외쳤다.
황녀의 등장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로멜이 엘렌시아 곁으로 다가가서 인사했다.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필로멜, 생일 축하해요!”
“별말씀을요. 진짜 생일도 아닙니다.”
그러자 엘렌시아가 티 없는 미소로 화답했다.
“그래도 축하해요. 생애 처음으로 저의 생일이 아닌 날에 축하받는 거잖아요.”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엘렌시아에겐 뼈 있는 말을 순진한 척 하는 재주가 있었다.
필로멜은 미소를 흩트리지 않고 대답했다.
“그런데 이곳에는 무슨 일이시죠? 황녀님께 초대장을 보낸 기억은 없습니다만.”
엘렌시아는 짐짓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해요! 저는 필로멜이 초대장을 보내기만을 기다렸는데 제게만 안 주다니요.”
“달라는 뜻을 전해주셨으면 드렸을 텐데요.”
“우리 사이엔 그런 말 없이도 당연히 주는 줄 알았어요.”
“죄송합니다. 황녀님같이 고귀한 분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은, 소박한 연회라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러게요. 상당히 소박…….”
사위를 한 바퀴 빙 둘러보던 그녀의 눈에 필로멜의 얼음조각상이 들어왔다.
만개한 꽃과 다른 조각상까지. 빈말로도 소박하다고는 말하기 힘든 연회였다.
하지만 필로멜의 연회가 화려하다고 인정하기도 싫은지 엘렌시아는 흠흠, 목청을 가다듬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어쨌든 필로멜의 연회를 보고 제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필로멜은 왜인지 불안한 마음에 한쪽 눈가를 찡그리며 엘렌시아를 바라보았다.
“저도 곧 생일 연회를 열려고 해요! 제 생일은 이미 지났지만 이곳에서 축하받지는 못했잖아요. 그래서 크게 열려고요. 특별히 이 자리에 계신 분들도 빠짐없이 초대할게요!”
역시나.
엘렌시아의 선언에 영애들은 겸연쩍은 얼굴을 했다.
초대받지도 않은 자리에 나타난 거로도 모자라 자기 연회를 홍보하다니. 대단한 무례였다.
하지만 무례를 저지른 사람이 다름 아닌 황녀여서 아무도 내색하지 못했다.
‘이걸 어쩐다.’
필로멜 혼자라면 이미 엘렌시아에게 미움받는 처지이니, 무례함을 꼬집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다만,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마음에 걸렸다. 그들은 황녀의 눈 밖에 나선 곤란했다.
다들 아무도 말이 없으니 엘렌시아는 나사르를 콕 집어 물었다.
“나사르는 제 연회에 오실 거죠?”
그는 가슴에 손을 얹고 깊숙이 몸을 숙였다.
“전하, 송구합니다. 안타깝게도 그날은 선약이 있어 참석의 영광을 누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나사르 에이브리든답게 완벽하게 예를 갖춘 거절이었다. 표정도 진심으로 아쉬워 보였다.
단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엘렌시아는 아직 연회 날짜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