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86)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86화(86/183)
<86화>
* * *
필로멜과 나사르의 파혼 소식이 퍼져 나갔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던 결말이어서 그런지 그리 크게 화제가 되지는 않았다. 황제와 공작이 최대한 일을 조용히 진행한 것도 있었고.
국빈관 침실, 침대에 늘어져 있던 필로멜이 벌떡 일어섰다.
“계속 이렇게 있을 순 없어!”
그녀는 자신의 두 볼을 가볍게 찰싹 때렸다. 나사르는 나사르였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바로 책의 진실 파헤치기.
그리고 이건 엘렌시아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는 듯했다.
“으음, 대체 엘렌시아는 그 약을 어떻게 손에 넣었을까?”
카딘에 따르면 레모네이드의 맛이 난다는 지능 상승의 물약.
파는 상품 같다는 르귄의 추측과는 달리 그런 물약을 취급하는 곳은 아직 찾지 못했다고 한다.
어둠의 경로까지 이 잡듯이 뒤졌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마법사가 개인적으로 만든 물약이라든가?
하지만 그것도 정답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계속 황궁에 있던 엘렌시아가 접할 수 있는 마법사라 해봤자 궁정 마법사 정도다.
‘그렇지만 렉시온이 슬쩍 다른 궁정 마법사들의 연구실을 뒤진 결과 그런 물약을 만든 듯한 흔적은 없었다고 했으니까…….’
에밀리로부터 들어온 정보도 별것 없었다.
최근 엘렌시아는 그동안 배우지 못한 지식을 쌓기 위해 학업에 매진하는 중이라고 한다.
학업의 성과는 들쭉날쭉. 어떤 때는 천재처럼 뛰어나다가, 어떤 때는 그냥 범재 수준.
“뭐, 원인은 물약의 지속시간 때문이겠지.”
첫 번째 물약을 도둑맞았는데도 엘렌시아는 계속 다른 물약들을 마셨다. 물약이 처음부터 여러 개였거나 계속 공급받는 듯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엘렌시아 옆에 꼭 붙어 있는 에밀리 말에 의하면 두 쪽 다 어려워 보였다.
대량의 물약을 몰래 보관할 장소도 없었거니와, 다른 사람에게 주기적으로 받을 만한 틈조차 여의치 않았다.
머리가 복잡해진 필로멜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아니, 물약이 하늘에서 뿅, 하고 나타나기라도 하나?”
그 물약에 관해선 정말 의문밖에 안 남았다.
“걱정 마세요. 제가 반드시 다시 한 번 훔쳐보겠습니다!”
에밀리는 그리 공언했지만, 한 번 도둑맞은 뒤로 엘렌시아의 경계심도 올라갔는지 좀처럼 기회가 보이지 않는 듯했다.
지금 심정으로는 르귄의 도움을 받아 엘렌시아의 방에 감시나 도청 마도구라도 설치하고 싶었으나, 걸리면 국가적인 문제였다.
머리털을 탈탈 헤집은 필로멜이 외쳤다.
“아! 일단 물약 쪽은 보류!”
지금으로선 다른 쪽 구멍을 파보는 수밖에.
엘렌시아 본인에게서 나오는 정보가 없다면, 엘렌시아를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된다.
당연히 엘렌시아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면 카트린이었다. 황녀를 십수 년간 키운 자이니.
“엘렌은 변했어.”
그리고 필로멜에게 엘렌시아 대한 의심을 심어준 자도 카트린이었다.
황궁 감옥에 있던 카트린은 현재 다른 곳으로 이송된 듯했다. 폴란 백작이 말하기를, 이제 곧 정식 면회도 가능해질 것이라고 한다.
필로멜은 카트린을 만나서 엘렌시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언제, 무엇 때문에 달라졌는지 물어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카트린의 이름은 전혀 의외의 곳에서 들려왔다.
필로멜이 카트린의 면회가 정확히 언제 가능해지는지 물어보러 백작을 찾아가려던 때. 하녀 낸시가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윌리엄 하운즈라는 분이 필로멜 님을 뵙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윌리엄 하운즈?
하운즈라면 카트린의 성이었다.
카트린의 가족인가.
“들여보내라 할까요?”
필로멜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트린의 가족이 뭣 때문에 찾아왔을지 궁금했다.
카트린이 감옥에서 풀려나 더 좋은 환경으로 옮겨 갔다고는 하나, 그녀는 대역죄를 저지른 죄인이었다.
결코 살아서는 자유를 얻지 못하리라.
‘카트린의 행방을 찾기 위해 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엘렌시아를 데리고 고향을 떠났을 때부터 카트린은 계속 실종 상태였다. 가족이라면 필시 그녀의 행방이 궁금하여 필로멜을 찾아왔을 터.
계속 실종된 상태라 둘러대면 그들은 카트린이 언젠가는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평생 버리지 못할 수도 있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죽었다고 거짓말하는 편이 낫겠지.’
그러나 윌리엄 하운즈라는 남자가 찾아온 이유는 필로멜의 어림짐작과는 전혀 달랐다.
국빈관 응접실.
필로멜 맞은편에 다리를 꼬고 앉은 남자가 말했다.
“오, 네가 바로 카트린의 딸이구나. 난 카트린의 오라비 되는 윌리엄이다. 상단을 하나 운영하고 있지.”
다짜고짜 반말?
필로멜은 순간 당황스러웠으나 이해 못 할 것도 없다고 여겼다.
카트린의 오라비라면 그녀에겐 외숙이었다. 삼촌이 조카에게 편하게 대할 수도 있지, 그런데…….
‘너무 무례하잖아!’
윌리엄은 노골적으로 응접실 내부를 휘휘 둘러본 다음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 필로멜. 너 참 호강하고 사는구나.”
“…….”
대꾸 없이 필로멜은 찻잔을 입에다 가져다 댔다.
윌리엄은 그녀의 반응에 상관하지 않고 저 할 말만을 계속 떠들었다.
“황가의 귀빈이라. 하하, 우리 가문에서 이렇게 잘나가는 사람이 나올 줄은 몰랐지! 카트린 고것이 황후의 시녀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땐, 황가와의 인연은 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필로멜은 저의 외숙이라는 자를 보며 옅은 실망감을 느꼈다.
‘이 사람…… 여동생에 대한 걱정이라곤 손톱만큼도 없군.’
하기야 남자가 말한 하운즈 상단이라면 현재는 수도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즉, 나를 만나려고 했다면 더 빨리 올 수도 있었다는 뜻.’
필로멜이 카트린의 딸이라는 사실과 이곳에 머문다는 정보가 세상에 알려진 지도 벌써 여러 날.
그런데 윌리엄이 굳이 이 시점에 황궁을 찾은 이유는 안 봐도 뻔했다.
제 조카가 잡아도 되는 동아줄인지 아닌지 가늠한 거다.
역시나 윌리엄은 시답지 않은 소리를 잔뜩 늘어놓은 후,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이 삼촌이 조카님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뭐죠?”
“일단 이것 좀 봐봐.”
윌리엄이 들고 온 고급 가죽가방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필로멜에게 건네줬다. 면직물의 부들부들한 감촉이 그녀의 손을 간질였다.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이는 반투명한 재질의 천이었다.
“……요정 날개 천?”
윌리엄이 손가락을 부딪쳐 ‘딱!’ 소리를 내었다.
“역시! 이런 곳에 사니까 한눈에 알아보네! 그래.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요정 날개 천이야. 요정족의 날개를 면에 섞어서 짠 천이지.”
그러고는 영업사원이라도 되는 양 말했다.
“이것으로 드레스를 만들면 아주 끝내주지. 시중에 내놓기만 해봐. 귀부인들이 못 사서 난리일걸.”
그럼 뭐 해. 불법인데.
필로멜의 냉정한 눈이 윌리엄을 향했다.
“제가 알기로는 요정 날개 천의 제작과 수입은 제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을 텐데요.”
윌리엄이 눈에 띄게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건! 요정들에게서 날개를 억지로 떼어내는 놈들 때문에 생겨난 법이고! 우리 상단은 제대로 요정들의 자발적인 협조를 얻는다고!”
과연 그럴까?
필로멜은 일단 그를 추궁하는 대신 이유나 묻기로 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요.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이건가요?“
아니, 부탁은 부수적인 거고, 네가 내 조카이니까 보러…….”
“그런 것 치곤 정작 여동생에 대해선 안 물어보시네요. 용건이 뭔지나 말하세요.”
그는 기분이 상했는지 입아귀를 실룩이면서 말했다.
“이야기가 빨라서 좋구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요정 날개 천의 제작과 유통이 합법화되도록 네가 도와줘야겠다.”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
“제가 무슨 힘으로 법을 바꾸나요?”
“황제 폐하께 귀여움을 받고 있지 않느냐. 폐하께 잘 말씀드려 봐. 그 법은 폐하께서 직접 발의한 법이어서 그분의 마음을 돌려야만 해.”
필로멜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황제에게 그 법을 건의한 사람이 자신이었으니까.
그녀는 <황녀 엘렌시아>를 통해 일찍이 그 천에 대해 알고 있었다.
책에서 그 천으로 만든 드레스는 대유행한다. 하지만 동시에 요정족과의 갈등도 불러일으킨다. 돈에 눈이 먼 자들이 무차별적으로 요정들을 사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갈등을 해결하는 사람이 바로 주인공 엘렌시아였다.
‘엘렌시아가 미래에 해결하게 놔둘 수도 있지만, 그때는 이미 수많은 요정들이 희생된 후지.’
필로멜은 그냥 사전에 관련법을 만들어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했다. 그 법 때문에 윌리엄은 속이 타는 모양이지만.
필로멜이 들고 있던 요정 날개 천을 테이블에 올려놨다.
“그런 거라면 도움을 드릴 수 없겠군요. 이만 돌아가세요.”
“뭐, 뭐? 왜!”
“제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
“너도 우리 가문의 일원 아니냐! 하운즈 상단이 잘되어야 너도 잘되는 거다!”
“낸시, 손님 가신단다.”
윌리엄이 손을 뻗어 방 안을 가리키며 버럭 소리쳤다.
“네가 언제까지 이런 호사를 누릴 줄 알아! 지금은 폐하께서도 기른 정이 있어서 너를 생각해 주시겠지!”
“…….”
“하지만 친딸이 나타났는데 그게 얼마나 갈까? 이제 곧 피 안 섞인 너 따위는 잊으실 거다!”
“…….”
“그러니 아직 귀여움받을 때 우리 가문에 도움이 돼! 이 일이 잘 풀리면, 나도 훗날 너를 모른 척하지 않겠다!”
필로멜의 침묵을 오해한 윌리엄이 어르듯이 말했다.
“이게 다 너 좋고, 나 좋자고 하는 말이야. 네가 아직 어려서 뭘 모르는 모양인데 세상 사는 요령이란 게 있단다.”
드디어 필로멜이 입을 열었다.
“제레미아.”
아까부터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레미아가 앞으로 나섰다.
“흐이익…!”
그의 검을 본 윌리엄은 테이블 위에 있던 천을 챙긴 후에 후다닥 문으로 달아났다.
마지막 말을 남기며.
“네가 숙고할 만한 시간을 주겠다! 나중에 또 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