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89)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89화(89/183)
<89화>
* * *
렉시온이 건네준 요정 날개 천들을 확인한 세르피아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아아. 내 아이들의 신체로 만들어진 천이 맞습니다.”
그녀 곁에 있던 작은 요정들도 구슬피 울었다.
여왕의 손짓에 천이 들어 있던 상자들이 공중에 떠올랐다.
“이것은 저희가 받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죽은 자들의 무덤 옆에 묻어줄 생각입니다.”
별이 떠오른 밤하늘을 닮은 두 눈동자가 윌리엄을 향했다. 그녀의 분노에 공기가 진동했다.
“으으으으……. 싫어! 풀어줘!”
윌리엄이 힘껏 발버둥 쳤으나 그를 옥죈 밧줄에서 벗어나기엔 역부족이었다.
세르피아네는 물 흐르듯이 날아서 그 곁으로 다가갔다.
아름답고 차가운 손이 남자의 얼굴에 닿았다.
손보다 더 냉기가 서린 목소리로 여왕이 말했다.
“당신도 우리와 함께 가줘야겠어.”
그들과 함께 갔을 시에 벌어질 미래를 예감한 그가 절규했다.
“싫어! 난 대 벨레로프 제국의 국민이야! 벌을 받아도 내 고국에서 받을 거라고!”
세르피아네는 너무 아름다워 소름 끼치기까지 한 미소를 보였다.
“우리의 땅에서 우리 동족에게 죄를 지은 당신이 왜 이 나라에서 벌을 받지?”
그녀가 남자의 얼굴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걱정하지 마. 바로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산 채로 날개가 뽑혀 괴롭게 죽어간 동족들의 고통을 직접 느껴봐야지.”
“내가 한 짓이 아니야! 사냥꾼이 했어! 당신들도 알잖아!”
“멍청한 변명이네. 그 사냥꾼들을 사주한 게 당신이잖아.”
“그, 그건……!”
“죗값을 치르는 과정이 외롭진 않을 거야. 사냥꾼들도 우리 땅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니.”
“싫어! 난 안 갈래!”
그는 필로멜을 보며 애원했다.
“필로멜, 제발 도와줘!”
그러나 그녀에겐 제 외숙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도, 해주고 싶은 일도 없었다.
분노에 찬 작은 요정들이 윌리엄에게 하나둘 달라붙었다.
요정들에게 둘러싸인 채 비명을 지르던 남자가 곧 잠잠해졌다.
그게 윌리엄 하운즈에게 합당한 결말이었다.
* * *
떠나기 전, 세르피아네가 필로멜에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이걸로 고향에 잠든 동료들을 볼 낯이 생겼어요.”
필로멜이 난처해하며 답했다.
“아니요. 전 한 것도 없는걸요.”
“천만에요. 당신이 아니었다면 마탑주가 우리에게 이 남자의 존재를 알렸을까요.”
그녀가 발치에 누워 있는 윌리엄을 흘겼다.
그는 죽지 않았다. 단지 요정 가루에 취해 정신을 잃은 상태일 뿐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생각하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지만.
세르피아네는 이내 고개를 돌려 르귄을 바라봤다.
“당신에게 이렇게 귀여운 딸이 있는지 몰랐네요.”
황송해진 필로멜이 손을 내저었다.
“귀엽긴요, 뭘.”
동성마저 홀릴 정도의 미모를 지닌 요정 여왕에게 이런 칭찬을 듣다니. 부끄러웠다.
싱긋 웃은 세르피아네가 필로멜의 두 손을 맞잡았다.
“귀여울뿐더러 당신은 선하고 자애롭죠.”
“칭찬이 너무 과분해요.”
“전혀요. 우리를 위해서 요정 날개 천 금지 법안을 처음으로 생각해 낸 사람이 당신이지요?”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당신의 또 다른 아버지에게서 들었어요.”
황제가?
“세계수에서 삼 년마다 열리는 종족 회의에서 만난 적이 있거든요. 평소에는 과묵하기만 하던 사람인데 그땐 유난히…….”
세르피아네의 이야기는 이어지지 못했다. 르귄이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의 아버지야? 너, 돌아가! 남의 딸한테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얼른 가!”
여왕은 귀엽게 혀를 빼물었다.
“남자의 질투란 보기 흉하군요.”
“뭐? 쟤 괜히 불렀어.”
“후후, 어쨌든 귀여운 필로멜!”
그녀는 살짝 날아올라서 필로멜에게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그리고…… 쪽!
필로멜의 이마에 뽀뽀했다. 부드러운 입술이 닿은 자리에 온기가 일었다.
세르피아네가 외쳤다.
“수많은 우리 동족을 위험에서 구한 자여, 그리고 고통 속에 죽어 미처 눈 못 감은 아이들에게 안식을 선사한 자여!”
작은 온기가 필로멜의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당신에게 요정의 가호를 내리겠습니다! 밝은 앞날이 당신 앞에 펼쳐지기를. 그리고 호칭도 선사하지요.”
저 높은 하늘로 떠오른 여왕을 따라 작은 요정들도 비상했다. 기절한 윌리엄도 마찬가지였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먼 길.
르귄의 힘을 빌려 단번에 돌아갈 수 있음에도 그들은 기나긴 비행을 선택했다. 죽은 자들의 안식을 기리는 여정이 될 터였다.
그렇게 세르피아네와 작은 요정들이 떠나갔다.
르귄이 제 아들들과 딸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도 돌아가자.”
필로멜은 의문이 하나 생겼다.
“그런데요. 왜 세르피아네 여왕에게 연락하셨어요? 그분 이야기를 들어보니 둘이 별로 친하지도 않은 것 같던데.”
“네가 그랬잖아.”
“……?”
“좀 기분 나쁜 정도로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며.”
“그러긴 했죠.”
“그렇다면 그놈을 죽이고 싶을 만큼 싫어하는 존재들에게 알리면 되지.”
“그래서 요정들에게……?”
“그래. 너도 걔네가 하는 짓은 안 말렸잖아.”
뼈에 사무친 그들의 원한을 자신이 어찌 말리겠는가. 말리고 싶지도 않았다.
오히려 슬픔과 분노를 절제한 세르피아네가 자신에게 부탁했을 땐, 돕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그것이 그들에게 씻지 못할 죄를 저지른 윌리엄과 혈연관계, 아니 같은 종족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으니.
르귄은 웃으며 말했다.
“바람이 차다. 이만 돌아가자.”
필로멜은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솔직히 아직도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어…….’
왜인지 방금 그가 한 말은 단지 윌리엄을 죽이고 싶어서 요정들을 불렀다는 뜻으로 들렸다.
하지만 이제껏 봐온 그의 모습을 떠올린 필로멜은 고개를 저었다.
‘에이, 설마 그것뿐이겠어? 나름대로 정의심이 있었겠지.’
결론적으로 요정들의 복수를 도와준 걸 보면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인 듯했다.
“같이 가요!”
필로멜은 르귄을 따라 두 형제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다음 날, 국빈관 응접실.필로멜은 윌리엄이 찾아왔던 어제처럼 새로운 손님을 만나고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쪽이 변호사이신 와이트 씨?”
기름칠한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긴 중년의 남자가 대답했다.
“예, 예. 그렇습니다. 레이디 필로멜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일 따름입니다.”
다소 비굴해 보일 정도로 예의 바른 태도였다.
“하운즈 상단의 고문 변호사이신 와이트 씨가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을까요?”
뜨끔한 속내를 감추며 필로멜은 여상하게 물었다.
‘혹시 내가 상단의 몰락에 일조했다는 사실을 알고 손해배상이라도 청구하러 왔나……?’
[하운즈 상단, 하루아침에 몰락하다! 상단주, 윌리엄 하운즈는 야반도주?]오늘 조간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기사 제목이었다.
대부분의 요정 날개 천은 요정들이 가져갔지만, 상단이 은밀히 판매하려고 다른 곳에 두었던 일부가 치안대에 적발됐다.
그동안 거래를 해왔던 정황도 발견됐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하운즈 상단은 크고 작은 여러 불법 행위를 저지르고 있었다.
탈세, 담합, 뇌물상납 등.
물론, 윌리엄이 장부를 조작해 어려운 상단의 사정을 숨기고 있었던 것까지 낱낱이 밝혀졌다.
하운즈 상단이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 이런 시기에 이 와이트란 변호사가 필로멜을 찾아온 것이다.
와이트는 손을 비비며 말했다.
“다름이 아니옵고, 레이디 필로멜께 좋은 제안을 드리려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말씀하세요.”
“사실, 이거는 윌리엄 씨와 저만 아는 비밀인데요.”
변호사의 목소리가 갑자기 작아졌다.
“레이디 필로멜께도 하운즈의 재산을 물려받으실 권리가 있습니다.”
“……네?”
“저는 상단의 고문 변호사이지만 하운즈 가문의 사적인 일도 도맡아 처리했습니다.”
“그래서요?”
“윌리엄 씨의 부친이자 레이디 필로멜의 외조부이신 선대 상단주께서 작고하실 때,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실종된 딸, 카트린에게 재산의 반을 남기겠다고요!”
“……제 친모에게 돌아온 유산은 없다고 아는데요.”
“그야 그럴 수밖에요. 윌리엄 씨, 아니 그 못된 놈이 선대의 유언을 숨기고 재산을 홀라당 가로챘으니까요!”
“……아하.”
와이트는 낯빛을 굳히더니 길길이 뛰는 시늉을 했다.
“늙은이가 죽을 때가 되어선지 헛소리를 한다는 둥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소리도 했습니다!”
“…….”
“그 못된 놈은 유언장을 맡은 저를 꼬여내서 유언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꾸며냈습니다. 그럼 자연히 모든 재산은 유일하게 남은 자식인 그에게 갈 테니까요.”
“그래서 윌리엄 외숙에게 협조하셨다고요?”
그는 손수건을 꺼내더니 눈물을 찍어내는 척했다.
“흑…… 그러지 않으려 했건만…… 당시 병든 노모의 약값이 필요해서 그만…….”
결론적으로 사기 행각에 동참해 놓고 피해자 행세는.
차를 한 모금 들이마신 후에 필로멜은 사무적으로 물었다.
“몰랐던 사실을 알았네요. 그런데 저는 왜 찾아오셨죠?”
변호사의 눈빛이 변했다. 여기부터가 본론인 듯했다.
“저는 이제 도저히 양심을 외면하지 못하겠습니다! 카트린 씨의 행방은 찾을 길이 없으니 레이디께서 어머니의 권리는 대위하시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는 열성적으로 말을 이었다.
“제게 그 유언장이 아직 있습니다. 이걸 소송의 증거물로 제출하면 레이디의 몫을 되찾는 데 적지 않은 보탬이 될 겁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저를 도와주시겠다고요?”
“예? 그, 그야 제 노고에 대한 성의 표시만 해주신다면 그 외에는 아무것도 바랄 게…….”
한마디로 유언장을 받고 싶으면 돈을 내놓으란 소리였다.
필로멜은 헛웃음을 지었다.
‘요즘 나한테 와서 이상한 요구 하는 게 유행인가?’
필시 이 변호사는 그간 윌리엄에게 돈을 타냈겠지. 안 주면 유언장을 세간에 공개하겠다고 협박하면서.
윌리엄이 고꾸라지자 이번에는 자신에게 왔을 뿐이다.와이트는 손수건으로 제 얼굴에 나는 땀을 닦았다.
“레이디, 결단을 서두르셔야 합니다. 이대로 가다간 윌리엄 그 인간의 가족들이 재산을 다 빼돌릴 수 있어요.”
이자는 필시 윌리엄의 가족들과 필로멜 양자를 저울질했을 터. 어느 쪽이 더 큰 돈을 저에게 줄 수 있을까 하며.
상단이 회생할 가망이 안 보이자 필로멜에게 붙은 것이다. 윌리엄의 가족들은 곧 빈털터리가 될 예정이니.
“와이트 씨, 이제라도 돈 한 푼 안 받고 ‘진짜’ 양심에 따를 의사는 없나요?”
“그, 그건 좀……. 저도 생계가 있다 보니 하하……. 레이디, 그렇게 안 봤는데 생각보다 통이 크지 않으신…….”
그때 뒤에 있던 제레미아가 물었다.
“어쩔 테냐? 이번에도 절차인가 뭔가를 따를 건가.”
필로멜은 가만히 곱씹었다.
“절차라…….”
어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중앙 치안대에 가서 뇌물 먹은 조사관과 입씨름을 했었지. 이번에도 절차대로 하려면 또 중앙 치안대에 가서…….’
절로 한숨이 흐른다.
“지쳤어요. 당신에게 맡길게요, 제레미아.”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검을 쥔 제레미아가 변호사에게 한 발짝, 두 발짝 다가갔다.
와이트가 의자 등받이에 바싹 붙었다.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혹시 제 몸에 어떠한 위해라도 끼친다면 나중에 보상을 아주 두둑이…… 으아악!”
변호사의 비명이 울려 퍼졌으나 그를 위해 달려와 줄 사람은 없었다.
남궁의 궁인들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지정된 시간 이외에 필로멜을 찾는 경우가 없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