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93)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93화(93/183)
<93화>
* * *
두 사람은 즉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필로멜은 직접 엘렌시아의 고향에 가기로 하였다.
르귄은 자기가 혼자 갔다 와도 괜찮다고 했지만, 제 일인데 남에게만 맡겨놓기도 미안했다.
‘엘렌시아와 카트린이 살았던 집을 다시 한 번 보고 싶기도 하고.’
제레미아는 국빈관에 남아 떠나는 그들을 배웅했다.
“쳇, 여기 가만히 있기에도 좀이 쑤시는데.”
그가 불평했으나 한 명은 여기 남아야만 했다.
필로멜은 그를 보며 말했다.
“죄송해요. 누가 찾아오면 적당히 상대하고 돌려보내줘요. 인형은 말을 못 하니까 제레미아가 대신 제 뜻을 전달해 줘야 해요.”
제레미아 옆에는 필로멜과 똑같이 생긴 인형이 서 있었다.
르귄이 마법으로 만든 인형이었다. 겉보기만으로는 실제 인간과 구분이 안 되었고, 간단한 동작까지 따라 할 수 있었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말을 못 한다는 것.
그래서 옆에서 보조할 사람이 꼭 필요했다.
제레미아가 투덜댔다.
“알았어. 얼른 다녀와. 르귄은 안 와도 되고.”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
“왜 또 싸워요. 자자, 출발합시다. 제레미아, 달콤한 디저트 사다 줄게요!”
화아아아아아!
곧이어 환한 빛이 퍼졌다.
눈을 떠보니, 두 사람은 산속에 있었다.
르귄이 나무만 무성한 사방을 둘러보더니 눈가를 찌푸렸다.
“잘못 왔나? 인가가 안 보이는데.”
이곳은 그가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장소여서 지도에 표시된 좌표에 의지하여 이동 마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엘렌시아의 고향 같은 시골 마을은 지도상의 위치와 실제 위치가 다른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필로멜은 가지고 온 유티나 지방 지도를 펼쳤다.
“많이 벗어나진 않았을 거예요. 조금만 걸어요.”
“그냥 내가 너를 안고 날까? 하늘 위에서 찾는 거야.”
“나실 수도 있어요?”
“당연하지.”
필로멜과 르귄이 그러한 대화를 나눌 때였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히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땅바닥 위에 잡다한 물건들이 놓여 있고, 대여섯 명의 청년들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껄렁한 분위기로 보아선 평범한 모임은 아닌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수풀에 몸을 숨기고 그들이 하는 일을 지켜봤다.
곰 인형을 손에 든 한 남자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에이, 돈 될 만한 것은 하나도 없네.”
냄비 뚜껑을 열어보던 남자가 대답했다.
“인마, 보석함에 유일하게 하나 남은 반지 챙긴 놈이 너잖아. 그거 싫으면 내놔.”
“에이, 주머니에 들어온 순간 내 것이지. 그리고 내 말은 명색이 황녀가 살았던 집치고 괜찮은 게 없다는 뜻이었지.”
……황녀가 살았던 집?
다른 이가 곰 인형 사내의 말을 받았다. 그는 화장품 병들을 살피던 중이었다.
“이놈아, 이게 다 보물이다.”
곰 인형 사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이게 어떻게 보물이야?”
“멍청한 놈. 새로운 황녀, 엘렌시아야말로 요즘 제국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 아니냐.”
“그게 왜?”
“그런 황녀님께서 평민으로 생활했을 때 사용했던 물건이라고 광고해 봐. 아주 날개 돋친 듯이 팔릴걸.”
“그렇게 잘 팔린다고? 그냥 잡동사니잖아.”
“원래 유명인의 물건이라면 쓰레기여도 팔려.”
냄비 사내가 한 마디 얹었다.
“그 엘렌시아가 황녀님이라니 아직도 안 믿긴다. 걔가 빨빨거리며 동네를 돌아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화장품 사내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엘렌시아는 참 예뻤지. 예쁜 여자의 물건이라면 더 환장해서 가지려는 변태들이 있어.”
곰 인형 사내가 환호했다.
“와, 그럼 이거 다 보물이네! 그 집으로 돌아가서 더 가져오자!”
냄비 사내가 낄낄거렸다.
“뭐가 남았겠냐. 우리가 휴지통까지 뒤져서 싹 쓸어왔잖아.”
그때, 여태껏 묵묵히 책더미를 뒤지던 사내가 소리 질렀다.
“어! 이거 대박인데!”
“왜, 뭔데 그래?”
남자가 분홍색 공책을 높이 들어 올렸다.
“일기장인가 봐!”
“누구의?”
“표지에 그려진 이 유치한 그림 좀 봐라. 카트린 아줌마가 이걸 썼겠냐? 당연히 엘렌시아겠지.”
다른 사내들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진짜?”
“이 중에서 제일 소장 가치가 높겠네.”
“팔면 얼마 나올까?”
“이거 팔아서 얻은 돈은 모두 공평하게 나눠 갖는 거 알지?”
“미쳤냐! 내가 발견했잖아!”
필로멜은 당장에라도 싸움이 날 듯 분위기가 살벌해진 사내 무리를 보며 생각했다.
‘일기장 찾을 수고는 덜었네.’
르귄의 손에서 희미한 빛이 번져 나갔다.
“처리할까?”
“나쁜 놈들이긴 한데…… 그래도 죽이지는 마세요.”
르귄이 풀숲을 헤치고 그들 앞으로 나아갔다. 범죄 현장을 딱 걸린 사내들이 소리쳤다.
“누, 누구야!”
“너도 이걸 노리는 거냐!”
“이건 우리가 먼저 찜했어!”
“외지인이면 외지인답게 썩 꺼지라고!”
화아아아아!
달려들던 사내들이 눈 깜짝할 새 바닥에 쓰러졌다.
르귄이 눈의 흰자위만 드러낸 채 움찔거리는 한 사내의 품에서 일기장을 빼냈다.
필로멜에게 일기장을 건네준 그가 말했다.
“그런데 한 놈이 도망쳤어. 나한테 덤비지 않고 처음부터 도망가더라. 데려올까?”
필로멜은 일기장에 묻은 흙먼지를 떼며 대답했다.
“내버려 둬요. 딱히 자경단 활동을 하러 온 건 아니니까요.”
현재는 이 일기장 안을 확인하는 게 급선무였다.
겉표지에 귀여운 곰돌이가 그려진 분홍색 일기장.
과연 이 안에 엘렌시아의 비밀이 적혀 있을까?
필로멜은 근처에 있던 바위에 걸터앉고서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일기장을 펼쳤다.
‘일단은 첫 페이지부터.’
엘렌시아의 첫 일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3년 전에 쓰였다.
[o월 x일, 날씨 맑음.엄마가 귀여운 일기장을 사줬다. 앞으로 매일매일 일기를 쓸 거다!]그다음 일기는 그로부터 일주일 후의 날짜였다.
[o월 x일, 날씨 맑음.일기 쓰기로 한 걸 깜빡하고 말았다. 내일부터는 진짜, 진짜 매일 쓸 거다!]그리고 한 달 뒤.
[o월 x일, 날씨 흐림. 일기는 그냥 내 마음 내킬 때 쓰기로 했다. 오늘은 엄마가 저녁 식사로 비프 스튜를 해줬다. 맛있었다.] [o월 x일, 날씨 맑음. 오늘의 아침 메뉴는 맛없는 양배추 스프였다. 점심은 딱딱한 빵이었고, 저녁은 삶은 감자였다.] [o월 x일, 날씨 비. 아랫집 재클린 언니가 큰 마을에 나갔다가 슈크림이라는 과자를 먹었다고 자랑했다. 슈크림은 되게 맛있고 부드럽다고 했다. 나도 먹고 싶다…….] [o월 x일, 날씨 맑음. 엄마가 완두콩과 당근 요리를 만들어 줬다. 완두콩은 먹고 당근은 몰래 버렸다.] [o월 x일, 날씨 흐림. 아침은 빵, 점심 감자, 저녁 돼지고기구이.]필로멜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거의 먹는 내용밖에 없잖아.’
엘렌시아가 그렇게 먹보였나?
‘매운 음식을 좋아하긴 했어도 그런 인상은 딱히 없었는데…….’
여하튼 중요한 것은 일기의 앞쪽이 아니라 갑자기 사람이 변한 시기에 적힌 부분이었다.
필로멜은 빠르게 일기장의 페이지를 넘겼다.
“어?”
그러다 손이 멈췄다.
어느 지점부터 짧았던 일기가 갑자기 길어졌다.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 ■■ ■■■■■ ■■ ■■■■ ■■■■ ■■■ ■■ ■■ ■■ ■■■■■ ■■ ■■ ■■ ■ ■■ ■■ ■■■■ ■■]무수히 이어지는 문자의 나열.
흰 종이 위로 그녀가 알지 못하는 글자들이 늘어서 있었다.
모르겠다. 전혀 모르겠다.
단순히 의미를 해석하지 못하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아예 처음 보는 생소한 문자였다.
필로멜은 혼란에 빠졌다.
제위에 오를 후계자로서 교육받는 동안 웬만한 문자는 거의 다 접했다.
뜻은 몰라도 글자 자체는 눈에 익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 글자는 달랐다.
아예 처음 볼뿐더러, 그녀가 아는 어떤 문자와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소수 부족만이 쓰는 문자? 아니면 고대 문자?’
하지만 그런 문자라면 엘렌시아가 사용하는 게 이상했다.
필로멜이 심각한 표정으로 일기장을 바라보자 르귄이 다가왔다.
“왜 그래?”
“르귄, 이 문자를 아세요?”
필로멜이 내민 페이지를 본 그가 미간을 좁혔다.
“모르겠는걸. 처음 봐.”
“고대 문자가 아닐까요?”
“글쎄. 고대 유적을 여러 곳 다녀봤지만 이런 문자를 본 적은 없는걸.”
“어디 외딴 섬의 소수 부족이 사용하는 문자라든가…….”
“왠지 아닐 것 같은데.”
두 사람은 한참이나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으나 이렇다 할 가설을 세우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