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96)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96화(96/183)
<96화>
“……꼭 지금 하셔야 하는 일입니까?”
필로멜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렇지는 않지만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얼른 처리하고 느긋하게 식사하는 편이 좋지 않나.”
“저는 최대한 빨리 폐하와 식사를 하고 싶습니다.”
“고맙다. 금방 가겠다.”
아니 고마운 게 아니라……!
필로멜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는 진짜 이 방법밖에 없었다. 심호흡을 한 후, 그녀는 “아!” 하고 소리 내며 배를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몸이 느리게 허물어졌다.
“필로멜!”
다행히도 바닥에 충돌하기 직전에 유스티스의 팔이 필로멜의 등을 받쳤다.
“왜 그러지!”
“배, 배가 너무 아파요…….”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였지만 말투는 마치 책이라도 읽는 듯 딱딱했다.
필로멜은 기본적으로 별반 연기에 재능이 없었다.
자연스레 그 모습을 지켜보는 폴란 백작과 시종들의 표정은 괴상해졌다.
그녀 자신도 알 수 있었다.
망한 꾀병이었다.
“배, 배가…….”
하지만 차마 중간에 그만두지 못하고 연기를 계속했다. 믿을 사람 하나 없는 연기였음에도.
“필로멜! 정신 차려!”
아니, 한 명은 믿었다.
필로멜을 품에 안은 황제가 부르짖었다.
“뭣들 하느냐! 얼른 궁의를 부르지 않고!”
“예, 예!”
그의 일갈에 시종들이 우수수 흩어졌다.
하지만 그들이 궁의를 불러오기까지의 시간을 못 기다리겠는지 황제가 직접 움직였다.
감긴 눈꺼풀 너머로도 환한 광채가 느껴졌다. 그가 필로멜을 데리고 이동 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대체 무슨 병이지!”
“그게…….”
황제의 물음에 필로멜의 배를 짚은 젊은 의원은 난처한 표정만 지었다. 마침 최고 궁의가 자리를 비운 탓에 그녀를 진찰하는 불운을 겪게 된 자였다.
“입이 달렸는데 왜 말을 못 하는 것이냐. 혹시…… 심각한 병인가?”
“그, 그렇다기보다는…….”
의원은 거의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
분명 자신의 소견으로는 아무 문제 없는데, 황제가 저리 나오는 바람에 바른대로 고하지 못하는 듯했다.
침대에 누워서 실눈 뜨고 상황을 바라보던 필로멜은 마음속으로 연신 의원에게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제발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신의 서가 정확히 언제쯤 제자리를 찾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아직은 아닌 것 같았다.
그때였다. 꼬르륵.
여전히 공복인 필로멜의 배가 크게 울었다.
“제기랄, 대체 어떤 병이면 배에서 저런 소리가 나지.”
필로멜은 저 입을 아주 풀로 붙여버리고 싶었다.
‘쪽팔려!’
급기야 황제는 해서는 안 될 말까지 내뱉었다.
“고치지 못할 시엔 너는 죽는다.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다. 이 황궁에서 의원이란 놈들의 씨를 말려주지.”
아, 더는 가만히 못 있겠다.
“폐하…….”
필로멜은 본인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없는 목소리를 냈다.
“필로멜! 많이 아픈가!”
황제가 침상 가까이 다가왔다.
“……조금 아픕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말아주세요. 저를 고치지 못한다 한들 그게 어찌 의원들의 잘못입니까. 황궁에서 의원들이 사라지면 아픈 자는 누가 돌보고요? 그들도 누군가의 부모, 형제, 자식입니다. 저는 예전부터 폐하께서 누구를 죽이니 살리니 그리 말씀하실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서…….”
필로멜이 어쩌고저쩌고 계속 말하자 그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알았다. 조심하지. 그래도 다행이다. 말할 힘은 있나 보군.”
그때, 의원실의 문이 열리더니 최고 궁의가 뛰어 들어왔다.
“송구합니다! 데리러 온 시종과 길이 엇갈리는 바람에…….”
“대체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게냐! 죽고 싶어서…….”
간신히 하고 싶은 말을 참은 황제가 침대를 가리켰다.
“필로멜을 진찰해라.”
최고 궁의는 의아한 얼굴로 황제를 보며 필로멜에게 다가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필로멜의 몸을 진찰한 그녀의 얼굴색이 바뀌었다.
그러고는 장난스러운 눈동자로 자신의 환자를 내려다봤다.
‘들켰구나. 그냥 꾀병인 거.’
젊은 의원과 달리 관록이 쌓인 그녀라면 황제에게도 있는 사실 그대로 고할 수 있을 거다.
그녀는 지난 뱃놀이 사건 때, 물에 빠진 엘렌시아가 꾀병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황제에게 덤덤히 알린 전적도 있었다.
그런데 궁의는 황제에게 가는 대신 필로멜의 귀에다 속삭였다.
“전치 몇 주로 해드릴까요?”
“…….”
잠시 고민한 필로멜은 똑같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루면 돼요.”
싱긋 웃은 최고 궁의는 필로멜의 병세를 적당히 꾸며내어 황제에게 고했다.
“다행이군. 푹 쉬어라.”
필로멜은 의원실을 나가려던 황제의 소매를 붙들었다. 그가 벌써 서고로 돌아가면 곤란했다.
“조금만 더 이곳에 계시면 안 될까요?”
“……내가 없는 편이 편할 텐데.”
“몸이 아파서 그런지 누가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요. 기왕이면 폐하께서. 역시…… 주제넘은 부탁일까요?”
“아니다. 그리하겠다.”
침상 옆에 앉은 유스티스는 그러게 무리하지 말라는 둥, 몸을 챙기라는 둥 잔소리를 하다가 이내 침묵했다.
그는 묵묵히 자리를 지키다가 시간이 꽤 흘러 필로멜이 잠든 척하자 몸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최고 궁의의 도움으로 필로멜의 꾀병 행각은 들키지 않고 넘어갔다.
신의 서 역시 제시간 안에 본래 자리로 돌아갔는지, 그 후 아무런 소동도 일어나지 않았다.
필로멜은 하루 동안 의원실에서 요양하며 신의 서에 나온 내용에 대해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한동안 남궁에는 황제가 보내는 물품들이 들이닥쳤다. 세계수의 열매를 비롯한 각종 보약 재료였다.
* * *
국빈관, 식당.
필로멜은 황제와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저번에 미처 못 한 일을 하러 왔다.”
그리 말하며 유스티스가 남궁에 들른 것이 바로 삼십 분 전의 일이었다.
‘저번에 미처 못 한 일’은 점심 식사를 가리켰다. 며칠 전, 황제 전용 서고에 그를 못 들어가게 하려고 필로멜이 한 말이었다.
“저와 같이 식사하시죠. 지금 당장.”
직후, 그녀가 배를 잡고 쓰러지는 바람에 무산되었던 그 식사를 하러 황제가 친히 행차했다.
자신을 황제궁으로 부르지 그랬냐는 필로멜의 물음에 황제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몸도 성치 않은데 오다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러지?
저번 꾀병 소동으로 인해 그에겐 필로멜은 엄청난 약골이라는 인식이 생긴 듯싶었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부정하지도 못했다.
식사 분위기는 매우 조용했다. 접시와 포크가 맞닿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
“…….”
두 사람은 묵묵히 음식물을 입에 가져갔다.
‘조용하니까 조용한 것대로 어색해…….’
그동안 그와 식사를 할 때면 항상 엘렌시아도 자리에 있었기에 오래간만에 느껴 보는 고요함이었다.
어렸을 적에는 필로멜 또한 황제 앞에서 그런대로 재잘재잘 떠들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말을 아끼게 되었다.
문득, 옛 기억이 떠올랐다.
아홉 살인가 열 살 때의 일이었다.
황제와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로 한 어느 날, 그에게 급히 처리해야만 하는 일이 생겼다.
어린 필로멜은 넓은 식탁을 앞에 홀로 남겨졌다.
미안하지만 혼자 먹으라는 황제의 전언이 있었지만, 고집스레 음식에 손도 안 대고 기다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날 상에 올라온 주요리는 바로 그녀가 키운 잉어로 만들어졌으니까.
당시 필로멜이 살았던 서궁 후원 연못에서 키웠던 잉어였다.
키웠다고는 해도 어린 황녀가 한 일이라곤 가끔 물고기 밥을 던져준 것뿐이었으나, ‘필로멜의 잉어’라는 타이틀이 중요했다.
직접 키운 잉어까지 대접할 정도로 저가 황제를 좋아하고 존경한다는 표현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정말 유치했네.’
그렇지만 기껏해야 어린애 머리에서 나오는 아이디어가 어떻게 안 유치하고 배기겠나.
당시 필로멜이 황제의 호감을 사려고 했던 행동들 전반이 비슷비슷하게 유치한 편이었다.
통통하니 살이 오른 잉어를 황제에게 먹일 생각에 흐뭇하게 미소 짓던 어린애였으니까.
그런 잉어가 눈앞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모습을 보던 어린 필로멜은 가슴이 찢어졌다.
“폐하께서 오시기 전에는 저도 식사 안 할 겁니다!”
오기가 생겨서 고집을 부리며 시종들을 난처하게 했었다.
머리로는 의젓해져야 한다고 의식하면서도 행동이 늘 따라주진 않았던 시기였다.
다행히 황녀의 식사를 못 챙겼다는 이유로 그들이 경을 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배가 너무 고파지자 필로멜이 슬그머니 포크와 나이프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흠흠, 그래도 배를 곯으며 몸을 상하게 하는 짓은 불효이죠. 황제 폐하께 심려를 끼칠 순 없는 법.”
눈치가 보이던 식사가 끝난 후에도 필로멜은 아쉬움에 계속 식탁 앞에 남아 있었다.
이왕 왔으니 황제를 기다렸다가 얼굴이라도 한 번 비치고 갈 심산이었다.
그런데 배도 배불리 채웠겠다, 가만히 기다리려니 졸음이 몰려왔다. 턱을 괸 필로멜은 깜빡 졸고 말았다.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에 잠이 달아난 건 시간이 꽤 흐른 후였다.
눈을 떠보니 유스티스가 자리에 앉아서 식사하고 있었다. 그는 한창 다 식어 빠진 잉어의 살을 발라내고 있었다.
“일어났나. 식사를 끝냈으면 돌아가지 않고 왜 남아서 고생인가.”
필로멜은 덜컥 걱정이 들었다. 맛없는 요리를 먹였다고 생각하면 어쩌나 싶었다.
“폐하, 다 식었으니 드시지 마세요. 시종에게 새로 음식을 내오라 이르시는 것이…….”
“됐다. 먹을 만하다.”
“하오나…….”
그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끝까지 잉어요리를 먹었다. 살 한 점 안 남을 때까지.
‘그런 일도 있었지…….’
한순간이지만 그땐 그가 아버지처럼 느껴졌었다.
필로멜은 이상한 감상에 들려는 정신을 바로 했다.
정신 차리자. 지나간 일이다.
그녀는 굳게 다물고 있었던 입을 열었다.
“폐하.”
“왜 그러지.”
“예전에 제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 하지 않으셨나요? 그, 고백이라고…….”
“…….”
그에게서 막대한 재산을 양도받은 날, 엘렌시아의 등장으로 듣지 못했던 말이 있었다.
황제가 자신에게 자꾸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 중 하나가 그 고백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못 해서 이러는 것이라면 말할 수 있게 판을 깔아주자.
그러나 유스티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필로멜은 슬슬 불안해졌다. 얼마나 대단한 말을 하려고 이리 뜸을 들이는 걸까.
머리를 팽팽 돌려봤으나 그게 어떤 내용일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고백? 그런 거창한 단어를 대면서까지 나한테 할 말이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