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98)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98화(98/183)
<98화>
르귄이 일어섰다.
“난 갈련다.”
“잠깐만요. 가시기 전에 제 인형 좀 수리해 주고 가세요.”
렉시온이 연구실 구석에 있던 자신의 형상을 가리켰다.
황실 측에서 제게 붙여 놓은 감시를 따돌리려는 목적으로 부친에게 부탁한 물건이었다.
감시의 눈을 피할 일이 있으면 그의 인형을 대타로 세워 놓았다.
반복적인 작업밖에 못 한다는 게 흠이지만, 없는 것보다는 훨씬 도움이 됐다.
인형의 이마에 갖다 댄 르귄의 손에 마법진이 맺혔다.
“오래 써서 고장이 난 거야. 이 짓도 오래 할 건 못 되는군.”
“어쩔 수 없죠. 필을 마탑으로 데리고 가려면.”
“필도 참 복잡해. 그냥 마탑으로 가면 안 되나?”
“솔직히 필이 현재 이곳에 남아 있는 게 저희에겐 다행이죠.”
“왜?”
“그 아이가 하려는 일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을 위해선 저희의 도움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필은 진작 자기 인생 찾겠다며 다른 곳으로 떠났을걸요.”
“그런가?”
“그러니까 필이 아직 저희를 필요로 할 때 확실히 마음을 사로잡아 둡시다.”
음, 하며 잠시 생각하던 르귄이 무언가 결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 이제부터는 다른 방향으로 노력해 보겠어.”
그 말을 남기고 대마법사는 퍼져 나가는 빛 속에서 사라졌다. 혼자 남은 렉시온이 중얼거렸다.
“제발 사고나 치지 않으셨으면…….”
위이잉.
그때, 그의 통신석이 번쩍거리며 진동했다. 마탑에서 온 통신이었다.
“예, 렉시온입니다.”
통신이 연결되자마자 고함이 그의 고막을 때렸다.
“렉시온! 대체 마탑주님은 언제 돌아오시는 거야? 그분의 인가를 받아야만 하는 일이 쌓였어!”
르귄의 또 다른 비서로, 현재 마탑주의 업무를 거의 도맡아 처리하는 자였다.
“조만간 마탑에 방문하시라고 말씀드려 볼게요.”
큰 한숨 소리가 통신석 너머로 들려왔다.
“그 중요한 일이라는 것, 아직 끝날 기마가 안 보여?”
“네. 르귄 님도 애쓰시는데 쉽지가 않네요.”
“마탑주님 정도 되시는 분이 애먹으실 일이라면……. 최상급 몬스터 퇴치? 숨겨진 고대 유적 조사? 아니, 대신전에 엄중히 보관된 성물이라도 훔치시나?”
딸내미에게 점수 따기요.
렉시온은 마탑주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 말을 삼켰다.
통신이 끝난 후,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 누가 상상이나 할까?”
악명 높은 마탑주가 요즘은 고양이의 모습을 한 채 애교도 부린다는 사실을.
제아무리 마탑주라 하여도 딸의 마음을 얻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 *
필로멜의 처소.
필로멜은 종이에 이제까지 알아낸 바를 적었다.
첫째, 엘렌시아는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사람이 바뀌었다.
둘째, 엘렌시아의 영혼을 반영하는 미들 네임 또한 <황녀 엘렌시아>에 나온 것과 달라졌다.
셋째, 엘렌시아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마법 물약을 사용한다.
넷째, 엘렌시아의 일기는 마침 그녀가 변한 시점부터 모르는 문자로 쓰였다.
다섯째, <황녀 엘렌시아>와 엘렌시아의 마법 물약 병은 다른 세계의 것일 가능성이 크다.
여섯째, 신의 서에 적힌 다른 세계의 침입자는 삿된 술수를 부리며 남의 몸을 빼앗는다.
일단 중요해 보이는 단서들만 모아놓고 보자면 이러했다.
종합해 보자면 엘렌시아에게는 다른 영혼이 씌었는데 그게 다른 세계에서 온 침입자고, 침입자가 부리는 삿된 술수가 마법 물약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일기장에 적힌 문자는 다른 세계의 문자이고, <황녀 엘렌시아>도 그곳의 책일 터.
필로멜은 입안의 여린 살을 깨물며 고민에 빠졌다.
‘너무 상상력이 풍부한가? 다른 세계라니…….’
그렇지만 왜인지 터무니없어 보이지만은 않은 가설이었다.
종이에는 큰 글씨로 적힌 여섯 개의 문장 외에도 자잘한 낙서들이 여럿 있었다.
필로멜은 그것들도 차분히 훑어 내려갔다.
‘<황녀 엘렌시아>의 저자도 엘렌시아처럼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것 같다’라는 글귀.
필로멜은 이와 같은 추측을 처음 생각해 냈을 때, 책의 저자는 매운맛이 인기가 많은 남부지역 사람이 아닐까 했다.
그런데 <황녀 엘렌시아>가 다른 세계의 물건이라면 저자 또한 그 세계의 존재일 것이다.
엘렌시아도 매운맛을 좋아하는 것으로 보아선 그 세계에서는 매운맛이 보편적으로 선호되는 듯했다.
‘아니면 둘 다 매운맛이 선호되는 특정 지역에 살았다든가.’
필로멜은 작게 메모하고 다음 문장들로 넘어갔다.
엘렌시아는 아직 유명해지지도 않은 마거릿을 콕 짚어 자신의 드레스를 맡겼다.
마거릿이 만든 그녀의 데뷔탕트 드레스는 책에 묘사된 것과 상당히 유사했다.
예전에는 이런 현상들이 운명처럼 여겨졌다.
필로멜이 시기를 1년 앞당겼어도, 원래 일어나야 하는 일은 결국 일어나고 마는.
‘하지만 아닌 것 같아.’
드레스를 새로 맞춘다는 핑계로 마거릿의 의상실을 찾은 필로멜에게 마거릿이 말했다.
“글쎄, 제가 막연히 구상하던 드레스와 황녀님께서 원하시던 드레스가 기가 막히게 비슷하지 않겠어요? 정말 제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오신 줄 알았다니까요!”
엘렌시아의 데뷔탕트 드레스를 칭찬했더니 마거릿은 엘렌시아와 있었던 일을 술술 불었다.
그것은 운명보다는 엘렌시아가 만들어낸 연출에 가까웠다.
마치 1년 뒤에 있어야 할 일을 미리 알고 현실을 그에 끼워 맞추는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간 느꼈던 의문점들이 해소됐다.
‘나사르와의 부자연스러운 첫 만남.’
왜 서궁에 있어야 할 엘렌시아가 남궁 후원에 와서 나무에 올랐을까.
‘왜냐하면 나사르가 거기에 있었으니까.’
당시 엘렌시아의 옆에 있던 하녀는 에밀리였다. 나중에 본인에게 듣기로는 나사르가 입궁하면 그가 있는 장소를 알아내서 엘렌시아한테 알리는 것이 에밀리의 임무였다.
엘렌시아가 나무 위에 태평히 있던 고양이를 구태여 구해주려 한 이유도 짐작이 갔다.
‘1년 뒤 일어날 상황과 비슷한 상황을 만들려고.’
고양이는 그녀가 나무에 오르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엘렌시아는 미래를 보는가?
‘그건 아닐 거야.’
미래를 안다기에는 여러 허점을 보였다.
미래를 안다면 배에 타려다 물에 빠졌을 리도 없고, 로잔느가 첫 다과회를 망치도록 내버려 뒀을 리도 없었다.
‘그래. 미래보다는…… <황녀 엘렌시아>의 내용을 아는 것 같아.’
필로멜은 담담히 생각을 이어갔다.
그 책도 다른 세계의 물건이란 사실을 고려하면 그편이 더 타당한 추론이었다.
그 세계에 다른 <황녀 엘렌시아>가 있거나, 혹은 필로멜이 가진 <황녀 엘렌시아>를 예전에 그녀가 읽었다든가.
필로멜은 르귄에게 돌려받은 그 책을 서랍에서 꺼내 들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현재로서 할 수 있는 조사는 전부 끝마쳤다고 한다.
엘렌시아, 아니 엘렌시아의 몸에 들어간 침입자는 어떻게 그 세계에서 <황녀 엘렌시아>를 읽게 된 걸까?
‘대체 이 세계의 미래가 왜 다른 세계의 책에 적혀 있을까? 다른 세계의 책이면서 왜 이곳의 언어로 적혀 있고?’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고민해 봐도 그럴듯한 가설 하나 생각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다른 세계’란 것이 어떤 곳인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전설에 나오는 신계나 마계?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세계?’
필로멜은 생각에 잠겨 책상을 손가락 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신의 서에 적힌 ‘다른 세계’에 대한 내용은 너무 모호했다.
‘누군가 속 시원히 설명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네.’
하지만 그 책에 기록을 남긴 사람들 모두 먼 옛날의 사람들이었다. 누구 한 명 신의 서에 대해 물어볼 만한 자는 없었다.
“휴. 어렵다.”
필로멜이 크게 한숨을 내쉰 그때였다.
“필!”
르귄이 필로멜의 방에 들이닥쳤다. 그는 어쩐지 평소보다 의욕에 찬 기색이었다.
“무슨 일 있어요?”
필로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우리 여행 가자!”
“……예? 갑자기요?”
“그동안 이런 답답한 곳에서 사느라 여행 못 다녀봤지?”
“확실히 여행이라고 할 만한 외출은 거의 없었네요.”
하나밖에 없는 제위 후계자가 마음 놓고 여행을 다닐 순 없었다. 안전상의 이유도 있었고, 시간적 여유가 안 되기도 했다.
그나마 나사르와 생젠에 방문했던 때가 제일 여행에 가까웠다.
‘나사르…….’
다시금 떠오른 얼굴에 필로멜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사르는 현재 에이브리든 공작저에 틀어박혀 있다고 한다. 엘렌시아의 생일 연회를 비롯한 모든 바깥 활동을 자제한 채.
“저를 친구처럼 느낀다고 하셨으니 친구로나마 곁에 있고 싶습니다.”
마지막에 봤을 때 그는 애써 밝은 얼굴을 한 채 그리 말했으나, 역시 힘들지 않을 리 없었다.
필로멜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르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행 가고 싶지 않아?”
그녀는 말을 골랐다.
“이렇게 대뜸 물어보셔도…….”
어느 쪽이냐 묻는다면 가보고 싶긴 했다.
필로멜이 적은 ‘나중에 해보고 싶은 일 목록’에서도 상단에 적혀 있었다.
그래도…….
“죄송하지만 지금은 영 그럴 기분이 아니에요.”
필로멜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왜?”
르귄은 어쩐지 상심한 표정으로 물었다.
“다른 일로 머리가 복잡해서요.”
“무슨 일?”
필로멜은 그에게 신의 서와 다른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요약해서 설명했다. 황당무계한 이야기일 텐데도 그는 그런 내색 없이 필로멜의 말을 경청했다.
다 들은 후 르귄이 말했다.
“그럼 더욱더 나와 여행을 가야겠네!”
“……왜 그렇게 되죠?”
“그 옛날 책에 대해 알 법한 존재를 만나러 갈 거니까.”
“그게 언제 적 기록인데 그런 사람이 아직 살아 있을까요?”
“사람은 죽었겠지.”
‘사람’이라는 단어를 강조한 뒤에 르귄은 히죽 웃었다.
“사람이 아닌 존재라면 여태껏 살아 있을 수도 있잖아.”
“사람이 아닌 존재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체 중에서 가장 오래된 존재. 드래곤들보다도 나이가 많지.”
필로멜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았다.
자신도 알고 있는 존재였다.
“……세계수.”
르귄이 자신만만히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 지금부터 세계수를 만나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