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Sejong in my Joseon RAW novel - Chapter (467)
내 조선에 세종은 없다-468화 (외전 완결)(468/468)
468화 [나무백과] “세종(조선)”
세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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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대 군주
[펼치기·접기]세종 관련 틀
조선 왕세자·왕세손·황태자·황태손
북한산 국립기념지 “건국 4대”
조선인이 뽑은 위대한 인물 100인
이달의 문화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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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펼치기·접기]조선의 제4대 임금
세종 태황제 | 世宗 太皇帝
출생 개국 3년 한성부 정안군 사저
즉위 개국 23년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사망 개국 74년(향년 71세) 한성부 창덕궁 舊 동궁
휘 제(禔)
본관 전주 이씨
부모 태종 문황제 이방원 / 원경황태후 민씨
형제자매 12남 17녀 중 장남
정비 문효황후 주소화
자녀 2남 2녀
종교 성리학 [1] [1]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정작 성리학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유자임을 부정한 적은 없으므로 기재.
묘호 세종(世宗)
시호 성신건업영무순효홍방제생문치태황제(聖神建業英武純孝弘邦濟生文治太皇帝)
연호 건무(建武)
목차
[펼치기·접기]∨ 1. 개요
조선의 제4대 임금이자 발명가, 과학자, 소설가, 요리사.
묘호는 세종. 시호는 태황제. 본명은 제, 별호는 한성거사였다.
조선의 전성기를 열어젖힌 성군이자 인류 역사에 남은 위인으로, 황제국 조선의 실질적인 개국조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 2. 생애
∨ 2.1. 즉위 이전
개국 3년 한성부 정안군 사저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태종은 태조의 다섯째 왕자였으나, 태황제가 다섯 살 되던 해 무인정사를 일으켜 형인 정종을 옹립하고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태종이 왕위를 물려받자 원자가 되었다.
한편 태종의 집권에 반발한 태조는 조사의를 끌어들여 근거지인 동북면에서 난을 일으켰는데, 원자 이제는 당시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태조를 사로잡을 계책[2]을 진언하여 처음으로 두각을 드러낸다.
[2] 일명 태조포책. 원자가 열 살도 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후대의 윤색을 의심하는 시각도 있으나, 태황제의 주요 업적들이 이미 유년기부터 쌓아올려진 것을 감안하면 이는 사실로 보여진다.무엇보다 태황제가 줄곧 자신이 태조의 후계자임을 강조했던 점을 고려하면, 자칫 악연으로 비춰질 수 있는 이 일화를 굳이 창작해서 넣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태조를 사로잡은 원자는 이후 조총 개발과 한양 건설을 주도하며 일약 태종의 신임을 얻게 된다.
이렇게 얻은 신임을 바탕으로 세자는 국사에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으며, 태종 역시 정식적인 대리청정 이외에도 세자에게 국정의 많은 업무를 위임하였다.
이로 인해 태종 통치기의 상당 부분은 사실상 세자와의 공동통치 기간으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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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업적
∧ 3.1. 내정
∧ 3.2. 외정
∨ 3.3. 각종 발명
자세한 항목은 세종/발명품, 장영실, 비악 항목 참조.
태황제가 조선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위인으로 존경받는 이유는 바로 기술 개발과 발명에 있다.
전기를 비롯한 각종 발명은 인류의 진보를 수백 년은 앞당겼다고 평가받으며, 그가 개발한 종두법과 보건위생학은 질병으로 죽어갔을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기술 분야뿐만 아니라 과학적·실증적 연구의 토대 또한 그의 치세에 놓여졌으며, 사후에도 그가 남긴 수많은 기록들이 폭발적인 인구 증가 및 경제 성장과 맞물려 기술 발전을 견인하기도 했다.
화약 개량은 총포의 발전을 촉진하는 한편으로 비악 개발로 이어져 조선의 영향력과 재정을 대대적으로 확충했으며, 유럽에 그의 이름이 ‘비악왕’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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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평가
만고일제(萬古一帝).
외정과 내정 모두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면서도 개인사에 있어서도 흠결이 없었던 성군.
그의 통치 기간은 역사상 가장 눈부신 성과를 이룬 시기였다.
태황제는 선대 태조가 갖고 있던 동북에의 영향력을 계승하여 더욱 발전시켰다. 먼저, 북방의 여진족과 남방의 대마도를 효과적으로 복속시켜 국경의 안정을 도모했다. 이는 단순한 군사적 승리를 넘어, 교묘한 경제적·문화적 복속까지 이뤄낸 성과였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태황제의 대항해 정책이다. 그는 조선을 해양 강국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원대한 비전(飛前)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정화의 원정에 조선인을 동참시켜 대규모 함대를 건조하고 숙련된 항해사들을 양성하였으며, 이를 통해 조선의 영향력을 해외로 확장시켜 나갔다.
무엇보다 태황제의 가장 큰 업적은 명나라 정복이다. 그는 요동 정벌과 선덕제의 선공으로 발발한 조-명 전쟁에서 뛰어난 전략과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외적을 물리쳤고, 나아가 중원을 정복했다.
그의 치세에서 조선은 원나라와 같은 세계 제국을 지향하였지만, 그 규모와 안정성에 있어서는 비교를 불허하였다. 그렇게 세워진 황제국 조선은 현재까지도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으로써 태황제의 위대한 유산을 증명하고 있다.
내정에 있어서도 태황제의 업적은 탁월했다. 그는 조선의 중앙집권체제를 완성하여 국가 운영의 효율성을 크게 높였다. 행정 제도를 개혁하고 각종 보조도구를 도입하였으며 관료 체제를 정비하여 국가 전체의 행정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법제 정비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육법 편찬을 시작하였다. 이는 국가의 법체계를 체계화하고 현대화하는 중요한 작업이었으며, 이후 조선의 법치 기반을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태황제는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역대 왕조사의 개수와 편찬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는 단순한 역사 기록을 넘어,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미래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태황제는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으로 산업혁명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는 새로운 기술의 개발과 보급을 장려하고 산업 기반 시설을 확충하는 등 장기적인 국가 발전을 위한 기초를 닦았다.
태황제의 뛰어난 판단력은 유능한 인재들을 끌어모으는 데에서도 빛을 발했다. 실제로 태황제 치세 그의 주변에는 걸출한 인물이 가득했는데, 그의 동생인 진왕 이도를 비롯하여 명재상인 황희, 맹사성, 허조 등이 조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더불어 태황제는 신분이나 조직의 벽을 뛰어넘어 인재를 등용하는 혜안을 보여주었다. 노비 출신이었던 장영실을 직접 면천시켜 중용한 것이나, 무관이었던 이천을 전향시켜 등용한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외치(外治)에 있어서도 태황제의 업적은 빛났다. 김종서와 최윤덕 같은 뛰어난 장수들이 그의 곁에서 영토를 개척하고 국방을 수호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들의 활약으로 나라의 변방은 안정을 찾았고, 백성들은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
학문의 발전 또한 태황제 시대의 특징이었다. 이 시대에 정착된 자유로운 풍토는 길재로부터 이어지는 사림 학맥을 비롯하여 수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여 문화와 학문의 발전을 이끌었다. 이는 태황제가 학문을 장려하고 인재를 아끼는 정책을 펼친 결과였다.
결론적으로, 태황제의 시대는 정치, 경제, 군사, 과학, 문화 등 모든 면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룬 황금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현명한 통치와 뛰어난 인재 등용, 그리고 그를 보좌한 신하들의 노력이 어우러져 이 시대를 역사상 가장 번영한 시기로 만들었다.
태황제의 치세는 후대의 군주들에게 모범이 되어, 지금까지도 이상적인 통치의 표본으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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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여담
∨ 10.1. 가정사
태황제의 자세한 계보에 대해서는 세종/가족관계 항목 참조.
• 가족관계가 무척이나 화목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태조에게 효도했다는 이야기나 형제들과의 돈독했던 우애는 당대부터 널리 알려져있었고, 남편이나 아버지로서도 자상했던 인물이었다.
피비린내 나는 조선 초의 혈사를 끊어내고 말 그대로 효심도, 부부간의 사랑도, 우애도 지극했던 실로 모범적인 장남.
• 가족들에게 무척 관대했지만, 현대까지 심심찮게 종친들에 대한 논란이 많이 나오는 것에 반해 의외로 이 시대 종친들은 별다른 물의를 빚지 않았다. 태황제의 가족애에 보답한 드문 사례.
• 황실뿐 아니라 세계 여러 왕조의 할아버지기도 하다. 장남인 무종 선황제의 서자들과 그들의 자손이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 왕조를 세웠기 때문. 러시아와 낙랑을 포함해 20개국이 넘는 이씨 왕조는 모두 세종 태황제를 시조로 삼고 있다.
한편 유구 왕실도 외가 시조로 섬기고 있다. 이쪽은 사실상 태황제의 딸인 자순대비가 2대 임금 취급이라 외가 시조라고는 해도 사실상 직계 왕실 선조로 받드는 수준이다.
∨ 10.2. 음모론
[안개가 끼었고, 밤에 유성(流星)이 떨어졌는데, 크기가 모과만 하였다.]– 태종 2년(1402년) 10월 25일 을해 1번째 기사
• 태황제가 남긴 업적들 중 도저히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들 때문에 외계인설, 초고대문명 발견설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특히 선황 시절 수장고에서 기괴한 문자가 발견되면서 이것이 외계와의 통신을 위한 문자가 아닌가 하는 설이 제기된 적이 있다.
진왕(당시 충녕대군)이 진상한 한글의 초기 형태라는 게 정설이지만, 하여튼 창작자들에게는 흥미로운 설정이라 창작물에 자주 등장한다. [82] [82] 잉글랜드 공화국의 각본가 셰익스피어는 인기 연속극 <시간초월자 외계인이 힘을 숨김>에서 닥터가 한때 세종이었다는 설정을 추가하기도 했다.
• 한편 태황제의 가계가 명확히 밝혀졌다는 치명적인 약점 때문에 외계인설이 시들해지자 초고대문명 발견설이 대두된 적이 있다.
태황제가 사실 백제 금동대향로가 아니라 옛 충청도 지역에 존재했던 초고대문명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상은 그가 주기율표처럼 도저히 당대인으로서는 알 수 없는 지식을 갖고 있었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음모론이다.
그러나 후대에 남겨놓은 그 유명한 “여백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는 그냥 별다른 근거 없이 넘겨짚은 것이 들어맞았다는 설도 있다.
• 됴흔생각에서 활동했던 대문호 ‘한성거사’의 정체가 바로 세종이었다는 사실이 후대에 밝혀졌지만, 그렇게 방대한 저작을 한 사람이 창작했을 리 없다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극단적인 경우 모든 작품이 위작이고 한성거사‘들’이 작품을 널리 알리기 위해 유명인의 이름을 빌린 것 뿐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학자들 대다수는 적어도 문효황후 시기 활동한 ‘1대’ 한성거사는 태황제가 맞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 10.3. 명언의 달인
어느 경전에도 나오지 않는 숱한 명언들을 많이 남겼고, 그의 신하들은 이걸 다 매모장에 받아적었다(…)
그의 명언들은 현재까지도 살아남아서 끊임없이 회자되는 중이다.
자세한 내용은 세종/어록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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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대중매체
워낙 조선의 전성기를 열어젖힌 명군인지라 사극에서도 단골 소재가 되어왔다.
초기에는 주로 근엄한 성군의 모습으로 묘사되었지만, 개인적인 일화가 많이 발굴된 최근에는 그의 다양한 면모를 조명하는 작품들이 늘어나고 있다.
매체에서 묘사되는 태황제는 나라와 가족을 생각하는 성군, 희대의 사랑꾼, 발랄한 천재 발명가, 악덕 상사, 혹은 태조의 유지를 받들어 명을 무너뜨리려는 야심가까지 다양하다.
• 초기 영화 중 하나이자, 당대 인기 여배우 황진이가 주연을 맡았던 화담 서경덕 감독작 <문효황후>에서 주인공인 문효황후의 남편으로 등장했다. 초기 작품인 만큼 위엄있는 임금으로 묘사되지만,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 자체는 정사에 의거해 잘 다뤘다는 평.
• 대하사극 <아침의 나라>에서 발랄한 면모를 드러내 보였다. 51화 조사의의 난에서 태조포책을 헌책하는 장면부터는 사실상의 진주인공.
• 인기 소설 <판서댁 천재서자>에서는 모든 서자의 절멸을 외치는 흑막으로 등장했다. 출판사가 황실 직영이라 오히려 허락받기가 편했다고 한다.
이외의 작품들에 관해선 세종/창작물, 벽조목 對 은거울 논쟁/창작물 문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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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얼어붙은 손을 호호 불면서 폰을 슥 집어넣었다.
틈틈이 바뀐 세상을 배워나가고 있는 데는 역시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위키만 한 게 없었다.
‘중간중간 헛소리가 좀 끼어있긴 해도.’
폰을 집어넣은 남자의 팔 안쪽으로 손 하나가 쏙 들어왔다.
“많이 기다렸어?”
남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응.”
“진짜? 미안. 화장 좀 고치느라.”
“우리 식구들은 그런 거 신경 안 쓴다니까.”
“내가 신경 쓰인단 말이야.”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다.
“하기야, 나도 너희 집 갔을 때 신경 쓰이더라. 너희 오빠 눈치 보느라 죽는 줄 알았어.”
“미안…… 그래도 네가 워낙 소문이 안 좋았으니까. 내가 그런 사람 아니라고 해도 못 믿는 눈치더라.”
여자가 남자의 손을 꼭 부여잡고서 말했다.
“어쨌든 허락받았으니까 괜찮아.”
어째 명나라 무너뜨릴 때보다 시간은 더 걸린 것 같지만,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그 정도야 웃어넘길 의사가 있었다.
“이제 우리 집 허락만 받으면 되는 거니까.”
그렇게 말한 남자의 손이 초인종을 향할 때, 여자가 외쳤다.
“잠깐!”
“왜?”
여자가 까치발을 높이 들고 담벼락 대추나무 너머로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손님맞이로 분주한 집안에선 북적북적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지만, 여자는 발을 동동거리면서 물었다.
“너희집은…… 어머님께선 허락 잘해주시겠지?”
남자는 긍정하는 대신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엄마보단 아버지를 신경 써야 할걸? 습관이란 게 생각보다 무섭더라고.”
“…….”
“괜찮아.”
잔뜩 긴장한 여자의 얼굴을 남자가 웃으면서 꼬집었다.
“같이 있잖아.”
“그렇네. 같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불안해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다.
두 사람은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한옥집의 벨을 눌렀다.
대문이 열리고,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훈훈한 온기만이 감돌았다.
어느 흔한 겨울밤이었다.
<내 조선에 세종은 없다> -完-
< 작가 후기 >
안녕하세요, 핏콩입니다.
드디어 <내 조선에 세종은 없다>가 완결되었습니다.
468화의 대장정을 함께해주신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본작은 개인적으로도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지난 21개월 간의 집필을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게 되어 기쁜 마음입니다.
이번 작에서 부족했던 점은 보완하여, 늦지 않은 시일 내에 차기작으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