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such thing as a war in France RAW novel - Chapter 298
#298화(마지막 화)
“오구, 오구! 그래 내가 니 할애비다!”
“우으으-”
“어이쿠, 울지 마렴. 누구 자식 아니랄까 봐 바로 알아보는구나. 자, 이게 할애비가 무려 빨갱이들 본거지에 핵무기 정조준해서 얻은 노벨 평화상- 끄아아악!”
“베르게르, 어찌 애 앞에서 변한 게 없어!”
“내 자식들은 다 좋아했다고!”
“라파엘 이리 내놔!”
라파엘 리 모헬.
이 모헬 컴퍼니가 직접 생성하진 않았으나 자회사가 만든 신형 모델.
“그래그래, 이 할애비가 호오옥시 모르니 널 위해서도 뭔가를 남겨놔야-”
“됐습니다. 돈 한 푼 주지 마십시오. 다 제가 알아서 합니다.”
“에잉, 젊어서 모으고 늙으면 원래 베푸는 법이야.”
가스파르가 딱 잘라 말하는 게 약간 서운하지만, 난 한 발짝 물러났다.
‘태어나자마자 명예 쪽은 이미 끝을 봤으니…. 오냐 넌 돈이다.’
아무리 가스파르가 막아도 그건 정치권에서나 통하지, 이 모헬 가문의 재산은 여전히 내가 꽉 쥐고 있다. 아무리 자식놈이라도 막을 수 없다는 의미.
“우리 며느리는 어찌 하나만 만들었을꼬. 나 때는 전쟁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만들었는-아아악! 그만 때려! 나 이 나라 원수야!”
“베르게르, 대원수로 추서되고 싶어?”
“…아뇨.”
나보다 젊어서인지 나이를 먹어갈수록 샤를로트를 이길 방도가 없다. 역시 평화의 시대에 군인은 천대받는 법인가.
억울함과 별개로 최근 들어 점점 가벼워지는 마음은 말과 행동으로 마구 드러났다.
51년, 새로운 선거 시즌이 돌아왔음에도 개헌은 없었다.
자연스레 3선 임기를 다 채운 나는 불출마, 그 충격에 프랑스 전체가 요동쳤지만 선거는 정해진 대로 이행됐다.
오를레앙 당은 처음으로 단일 후보가 아닌 다수의 후보를 보냈고, 그중 샤를 드골이 가장 많은 득표를 하며 17대 대통령에 임명되었다.
아직 인수인계 중이나 이젠 20년을 살아온 이 집을 다음 주인에게 내줄 때가 왔다.
내 인생의 전성기가 전부 담겨 있는 이곳. 벽기둥 하나에 손만 얹어도 기억이 몸으로 흘러들어올 것만 같다.
그러나.
“음, 미련은 없네. 역시 하루빨리 떠나고 싶어.”
가끔 조작된 기억 보정으로 부대를 추억할 순 있어도 돌아가고 싶진 않은 법.
오늘 밤에라도 도주하듯 어서 벗어나고 싶다.
“당신 정말 그거 할 거야? 그 실시간 라디오 방송?”
“그럼 해야지. 말도 없이 떠나면 쓰나.”
“그런 거 신경 쓰는 사람이었으면 진작에 국민들한테 불출마한다고 말하든가. 저 밖에 시위대는 아직도 해산을 안 했잖아.”
흐음, 시위대라면 궁 안에서도 귓가에 희미하게 들리는 저 소음 말인가.
“다양한 사람이 어우러져 사는 거지.”
“어젠 경찰과 충돌도 있었다는데….”
“어허, 별거 아니야.”
비록 군대가 움찔하고 주변국이 초긴장 상태에 돌입하며 심상치 않은 국내 분위기부터 외교 라인까지 전부 불타버릴 것 같지만 별일 아니다.
왜냐면 난 어차피 가는 사람이니까. 그럼 내 일이 아니잖아?
“흐응, 이거지. 이거야.”
이런 무책임, 아니 해방감. 썩어가는 드골의 표정을 잠깐만 봤는데도 엔도르핀 과다분비로 병원에 실려 갈 뻔했다.
그 화룡점정이 바로 오늘 저녁 예정된 라디오 방송이다.
대통령 담화문…이라기엔 거창하고. 그냥 전국에 마지막으로 생중계될 나의 라디오 방송이 오늘 저녁에 예정되었다.
이번 방송은 매우 사적인 내용이 될 것이라 전달했으나 오늘 아침부터 전국 모든 주파수가 하나에 고정되어 있다는 소식은 꽤나 많은 기대를 받고 있는 모양이다.
아마 이임식을 빼면 마지막이 될 나의 연설. 사적인 만큼 지난 45년을 돌아보는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음,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루스벨트가 했다던 노변담화(Fireside Chats), 그거 해보고 싶었다.
왜 맨날 난 소통도 안 하고 끝까지 비밀에 감춰진 원수여야 하는 건데. 나도 국민들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라고.
신나게 가족들과 오후를 보내고, 뉘엿뉘엿 해가 질 때쯤 빅터가 찾아왔다.
“각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래, 시작할까.”
발표하는 장소는 내 서재. 장소부터 가장 편안하고 사적인 곳을 골랐다.
바로 앞에 귀마개를 쓴 이가 신호를 주자 앞에 있는 카메라가 돌아가며 방송이 켜졌다는 불빛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국민 여러분.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듣게 될 모든 분들. 프랑스 대통령, 베르게르 모헬입니다.”
철조망 같은 은색 마이크 안으로 내 목소리가 흘러 들어가는 게 느껴지자 비로소 난 이 순간이 체감되었다.
수천만의 사람들이 오직 나에게 경청하는 순간.
잠깐이지만 프랑스 전체가 고요한 상태라도 된 것 같았다.
“오늘 저는 대외 정책이나 앞으로의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나오지 않았습니다. 멋들어진 연설이나 다음 세대를 위한 충고 또한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은, 프랑스에 사는 한 파리 시민 베르게르 모헬에 관해 알려드리는 아주 개인적인 시간입니다.”
하도 훈시를 많이 해서일까. 한번 시작한 말은 거침없이 다음 말과 연결되어서 나왔다.
“저의 이력이야 알아서들 찾아보시고, 먼저 한 가지 사실을 고백하겠습니다. 여러분이 20년 전 투표소에서 투표한 14대 대통령 베르게르 모헬은 사실 여러분이 뽑은 게 아닙니다.”
“…. 각하. 각하?”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빅터가 날 은밀하게 부르려 했지만 난 가볍게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투표 과정에는 아무런 부정이 없었으나, 사실 14대 대통령은 페르디낭 포슈 원수의 거대한 계획이었습니다. 1919년 다음 대전쟁을 예견한 포슈 원수는 이후 소장이던 저를 원수로, 원수에서 엘리제 궁으로 보내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
“참 충격과 공포다. 그죠?”
아, 손발이 떨려오는 게 당장이라도 죽은 포슈의 망령이 달려와 마이크를 낚아챌 것만 같다.
그간 감춰져 왔던 비밀의 폭로는 언제나 흥분되는 법.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이 적고 오래 묵혀졌을수록 폭로할 때 미칠듯한 쾌감을 선사한다.
“여기에 제 비밀도 하나 알려드리자면, 사실 전 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대전쟁 끝나면 전역할 예정이었던 터라, 딱히 관심도 없었지요.”
믿거나 말거나. 오늘 떠나는 이 자리에서 난 숨김없이 두 원수의 악행을 만천하에 드러낼 것이다.
“그런 저를 당시 윗분들은 가두고, 줘패고, 강제로 진급시키고 복무 기간까지 연장하게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 계획에 클레망소 전 총리와 페탱 대원수께서 적극 참여하셨다는 점입니다.”
그때 서럽고 억울해서 밤잠 설치던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언젠가는 휘슬블로우를 하겠다 다짐했었는데 35년이 지나서야 그 다짐을 실행한다.
“물론 저 또한 어느 순간부터 진심으로 프랑스를 위했습니다. 비록 포기에 가깝긴 했지만 날이 갈수록 책임감과 희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 스승들에게 배우고 그들의 가르침을 밑거름 삼아 다음 세계 대전을 준비했습니다. 어쩌면 대전쟁 이후로의 저는 프랑스의 의지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여러분의 열망, 비통, 울분, 공포가 합쳐진 결정체. 그게 바로 저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모든 것이 극단적으로 집약되다 못해 한 인간으로 표출된 거다. 그게 바로 지난 시절의 나의 정체성이었다.
그들이 나의 모든 행동을 신뢰하고 공감하며 지지했다는 게 그 증거다.
그때의 난. 감히 표현하건대 프랑스 정신집합체 그 자체였다.
“문제가 생기면 많은 이들이 저에게 해답을 바랍니다. 그들은 제가 정답을 말해주길 바라며 어서 방향을 손가락 끝으로 가르켜주길 바랍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말씀드립니다. 저도 잘 모릅니다. 제가 신도 아니고 어떻게 모든 걸 알겠습니까.”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나도 안다. 온갖 미사여구로 수식되어 반신의 경지에 올라버린 원수. 이성과 과학 따위도 한 수 접어버리는 종교에 가까워진 난, 사실 별거 없는 아주 평범한 놈이다.
“이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전 제 주제를 아주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89년생 오를레앙에서 태어난 아주 평범한 시골 촌뜨기. 그게 저의 정체입니다.”
“유일하게 아는 것이라곤 스스로의 주제뿐인 제가 말합니다. 전 그리 대단하지도, 딱히 뛰어나지도 않다고. 왜 4선을 뛰지 않냐고요? 왜 헌법을 개정해서 더 집권하지 않냐고요? 그건 제가 할 깜냥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게, 진실입니다.”
절대 민주주의 정신을 수호하기 위해서도, 프랑스의 미래를 걱정해서도 아니다. 두 번째 세계 대전이 끝난 이래로 난 그냥 과거에 쌓아온 업적을 까먹으며 살아가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만약 제가 돌아온다면 그건 절대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저는 이제 대통령 베르게르 모헬이 아닌, 원수 베르게르 모헬이기 때문입니다. 즉, 제가 돌아온다면 이유는 딱 하나. 전쟁입니다.”
겸사겸사 이번 기회에 확실히 못 박아두려 한다.
나의 유일한 쓸모.
내가 그나마 잘하는 딱 한 가지.
전쟁.
그 짓거리가 또 터지는 날이 비로소 내가 돌아오는 유일한 날이 되리라.
“전쟁의 참극은 한때 그 앞에 무릎 꿇었던 제가 잘 압니다. 누구보다 많은 동료를 잃고, 누구보다 많은 사람을 죽인 제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단 말입니다.”
“프랑스 국민들께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절대 전쟁을 쉽게 입에 올리지 마십시오. 함부로 무기를 들지도, 남을 위협하거나 반응하지도 마십시오.”
“프랑스가 총구를 겨눌 때는 오직 방아쇠를 당길 때입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총은, 매우 무겁습니다.”
그게 프랑스의 신뢰의 근간이자 패권을 도전받지 않는 최선의 수이다.
다시 돌아와서, 난 나의 이야기를 끝맺어 보려고 한다.
“지난 45년간 저는 군인으로 살아왔습니다. 애석하게도 죽을 때까지 군인으로 살겠지만 감사하게도 프랑스의 법은 63세에 은퇴할 수 있도록 해주더군요. 예, 전 이제 떠나렵니다. 부디 붙잡지도, 슬퍼하지도 마십시오. 전 할 만큼 했습니다.”
내 찾아보니 전시에 죽은 군인 빼고도 평균 수명 49세일 때 정년을 61세로 만드는 법이 제정되었다. 어느 미친놈이 그딴 발상을 했는지 몰라도 이 나라는 그리 노동친화적이진 않은 것 같다.
즉, 살고 싶은 놈은 알아서 떠나야 한다는 말씀.
“전쟁이 터지자 누구보다 먼저 아라스로 돌아왔던 병장 쟝 폴.”
“최초로 기관단총을 주무기로 썼던 병장 망 쟁.”
“동기 구하겠다고 튀어나갔다가 포탄 맞고 죽었던 보렐.”
“심심해서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던 샤를 드골.”
“전차 무섭다더니 전차에 뼈를 묻은 윌리암 페르.”
“팔병신 페리스.”
“제5군을 지휘했던 사령관 샤를 란레작.”
“언제나 최선을 다하던 사령관, 루이 데스페레.”
“아라스 33연대를 훌륭하게 이끌었던 장 폴 슈티른.”
“파리를 혼자 남아서라도 지키겠다던 파리 총독 갈리에니.”
“섬나라에서 온 든든한 동맹, 더글러스 헤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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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우이자 보호자였던 프레드릭 다비드.”
“기병 출신 개혁가 모리스 가믈랭.”
“나의 스승 페르디낭 포슈.”
“그리고 나의 아버지, 필리프 페탱.”
“이 자리에서 나열하지 못하는 여러 이름.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알려지지 않은 영웅들.”
2분 넘게 이름을 나열했음에도 여전히 수십, 수백에 이르는 자들이 자꾸만 떠오른다.
“그대들에게 내가 할 말은 단 하나. 진심으로 고맙다.”
눈가가 흐려질 것만 같은데 그보다 입가의 미소가 멈춰지지 않는다.
정말 하고 싶은 말도 많고. 알려지지 않은 이름들을 더 알리고 싶으나 어느새 종이는 단 한 장만이 남았다.
튀어나오는 의지를 애써 억누른 채, 난 마지막 장에 하나 남은 문단을 끝까지 더듬더듬 읽어나갔다.
“프랑스의 용사들이여. 그대들은 나의 명령을 따른 것뿐이며 그 어떤 죄도, 책임도 없습니다. 오직 영광만이 그대들을 비출 뿐입니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자들. 그리고 그 시대를 이어받을 후대들. 그대들이 누리는 모든 것은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졌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나조차도. 정말 많은 이들의 희생과 도움으로 여기까지 도달했다.
내가 살아 숨쉬는 공기.
지금 평안하게 서재에서 낭독하는 시간.
사지 멀쩡하고 제정신인 상태로 살아가는 이 순간까지.
정말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들이 연속된 결과다.
“이제 저는 아주 개인적이고도 이기적인 시간을 끝내며 떠나겠습니다. 더는 앞장서서 여러분을 지키는 것이 아닌, 이제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고자 합니다.”
마지막 한 문장.
과거 수많은 이들이 날 이 자리까지 끌어올린 단 한 가지 이유.
난 천천히 종이 위의 단어를 짚어가며 읽어 내렸다.
“원수는 책임을 지는 자리이다. 모든 책무를 다한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민들께 전역을 신고합니다.”
그대로 눈을 감으며 난 종이를 내려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