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such thing as a war in France RAW novel - Chapter 42
042화
‘경솔했다.’
처음 베르게르 모헬에 관해 들었을 때는 그저 혈기 넘치는 젊은이라 생각했다.
상부에 대한 강도 높은 공개적 비판. 군인의 자세라고 할 순 없으나 자신의 확신에 모든 것을 걸 수 있다는 점은 부러울 만큼 당시 모헬 중위는 확고했다.
누군가는 무지함이 불러온 오판이라고. 또 누군가는 어떻게든 눈에 띄고자 하는 쭉정이라 평가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누군가에 자신 또한 속해 있었던 것 같다.
얼마 뒤 다시 모헬의 소식을 들었을 때, 평가는 완전히 달라졌다.
아르덴의 악마.
일개 하급 지휘관에게 붙을만한 명성은 아니나 이 말은 다른 이도 아닌 독일 포로들이 내뱉은 말이었다.
‘아르덴 숲에는… 악마가 삽니다. 보이는 즉시 대대든, 연대든, 심지어 사단이든 전부 그 자리에서 몰살시켜버립니다.’
‘숲에서 기다린 지 일주일이 지나자 이상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땅이 갈라질 만큼 포탄이 떨어지면, 악마의 군대가 나타날 징조라고.’
증언이라 하기엔 가히 정신병자들의 횡설수설에 가까웠지만 그 공포감만큼은 전달되기 충분했다.
패배한 공세에서 이토록 적에게 압도감을 선사한 지휘관.
과연 그는 누구일까.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이 일어났다.
전설은 마른에서도 이어졌다.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선두에 서서 적을 몰살시키는 부대. 6사단. 그중 33연대의 명성은 적아 구분 없이 퍼졌다.
그때쯤 모헬 중위는 소령이 되어 있었다. 유례없는 진급이었다.
그런 그를, 겨우 북부 전선에서 만날 기회가 생겼다.
자신에게 북부 전선으로 가라는 명령에 가믈랭은 누구보다 기뻐했다.
그리 고대하며 만난 그는.
“저희는 아라스로 가고 싶습니다.”
아라스로 도망쳤다.
이때까지의 위명은 전부 거짓이었을까. 그저 만들어진, 흔히 전장에 떠도는 소문에 불과했을까.
확인하고자 다시 만나 그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리고 이는 실수였다.
“…적에게 한 번 넘어간 지역입니다. 두 번은 아니 될 일입니다.”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도망친 게 아니다. 최전선을 포기한 거다. 그간 그가 보여준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최전선에서 더 공을 세울 수 있었을 것임에도 말이다.
아라스, 그곳은 그의 고향이자 부대이자 집이었겠지.
오랜 전우들과 함께한 추억이 서린 공간이자 적에게 빼앗긴 가슴 아픈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아라스로 향했다. 아마 그의 상관 페탱도 비슷한 심정이리라.
몰랐다.
그러나 이는 변명이 되지 않는다.
“젠장, 사과라도 해야 하는 거냐.”
그저 남의 입으로 들은 대로 그를 판단했으며, 이는 경솔한 행동으로 연결되어버렸다.
하나 확실한 것은, 그는 그저 혈기 넘치는 젊은 지휘관이 아니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남자였다.
다시는 함부로 남을 평가하지 않겠다고 가믈랭은 다짐했다.
***
바다로의 경주 끝에 일어난 전투는 많지만, 주로 거론되는 전투는 하나.
아라스 전투(1914:The Battle of Arras).
밀고 당기고는 수십 번 일어나지만 아라스가 대표적 이름이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마지막에 크게 붙어서 아라스에서 막고 끝나니까.
그렇기에 난 아미앵에 오기 전부터 강력히 아라스로 향하길 주장했다.
까라면 까는 게 군인이라지만 이번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6사단 전체가 안 된다면 우리 33연대만이라도 난 아라스로 보내달라고 할 작정이었다.
이에 페탱은 내게 물었다.
“자네가 이렇게까지 아라스로 향하는 데 이유가 있나? 아라스는 이미 최전선이 아니라 거점지일 뿐이야.”
“세 개. 최소 군단 세 개는 더 올 겁니다. 그때도 아라스가 거점일 것 같으십니까?”
아미앵-아라스-랑스-릴.
네 지역을 잇는 전선은 약 62마일, 100km 정도 된다.
현재 이 무식할 정도로 긴 전선의 공격을 주도하는 프랑스군은 루이 드 모드위이(Louis de Maud‘huy) 장군이 이끄는 10군.
반대로 상대는 바이에른 정예 사단이 포함된 제6군. 여기에 독일 북부 최고 지휘관인 루프레히트 왕세자는 1군, 2군, 그리고 7군에서 군단을 하나씩 떼서 밀리는 북부 전선을 정리할 생각일 거다.
북부에 올린 판돈이 다르다.
서로 집단군 하나씩일 때는 병력의 질, 보급 수준과 포위 위험이 없는 프랑스가 유리했으나 큰 거 세 장에 짤짤이 예비 사단까지 올리는 독일이다.
이에 프랑스는 콜 대신 체크를 외칠 수밖에 없다. 공수 입장이 뒤바뀌게 된 거다.
“사단장님, 전 최전선으로 가려고하는 겁니다.”
“…아라스가 최전선이라. 아군을 너무 안 믿는 거 아닌가? 나름 선전하고 있는 상황인데.”
“전 아군이 아니라 루프레히트 왕세자를 믿습니다.”
참으로 부정한 발언이지만 진심이다.
내겐 함께 싸울 아군은 변수이고 독일군은 상수로 느껴진다. 계산이 가능한 음수가 계산 불가능한 양수보다 낫다.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
왕세자라는 타이틀 없이도 충분히 능력으로 독일 내에서 순위권 찍는 명장. 제6군에 군단 세 개 더 받았으면 한판 뒤집기 들어가려 할 거다. 잃은 게 있으니 더더욱.
아라스가 아니면 안 된다는 강력한 의지에 페탱은 기꺼이 내 손을 들어줬다.
페탱 또한 아라스를 지키고자 하는 열망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그렇게 아미앵에서 하루를 보낸 다음 날. 우린 바로 아라스로 출발했다.
또 전선으로 향한다는 생각에 병사들 사이에 퍼진 긴장감과 두려움, 칙칙함이 나한테까지 여실히 느껴졌다.
꼬박 하루를 걸어 도착한 아라스.
아라스에 가장 먼저 들어선 우리 33연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적이 빠르게 점령하고 떠난 지역이라 큰 피해는 없다고 들었는데, 아니었다.
우리가 알던 몇몇 건물들은 불타거나 무너져 잔재가 그 위치를 대신했다.
거리는 한산했으며 활기차던 아라스는 온데간데없고 유령 도시가 아라스라는 지명을 이어 쓰는 것 같았다.
지나가면서 창문으로, 커튼 사이로 보이는 어린아이들과 여성들이 그나마 사람의 존재를 알려줬다.
내가 샤를로트와 거닐던 거리는 더는 없다.
병사들이 외출을 쓰고 나가서 술을 진탕 마시던 술집은 사라졌다.
아라스는, 더 이상 아라스가 아니게 되었다. 우리의 기억들이 이젠 역사 뒤편으로 사라져버린 기분이었다.
누구보다 이를 확연히 느끼는 33연대 병사들은 전장과 또 다른 현실에 웅성거렸다.
처음 아라스로 향한다는 소식에 마냥 좋아하던 이들조차 이젠 우울감을 숨기지 못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서 난 파비앵을 불렀다.
“파비앵, 우리 애들 좀 광장으로 모아주게.”
“알겠습니다.”
아직 제대로 된 정비조차 못 했지만, 시내 한가운데 있는 광장으로 병사들이 집결했다.
단상조차 없는 광장에서 난 바리케이드처럼 잔재들이 쌓여 있는 작은 언덕 위로 올라갔다.
다른 부대도 근처에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다시 아라스로 돌아왔다. 느낌이 어떠냐.”
다들 비 맞은 강아지마냥 축 처진 꼴에 난 비릿한 미소와 함께 물었다.
“긴말하지 않겠다. 다들 꼬라지 보면 어떤지 잘 알겠으니. 내가 어디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내 밑에서 싸우면 죽을 확률이 적으니까 좋다고. 여기서 확실히 말해주겠다! 그거 다 개소리다. 내가 신도 아니고 어떻게 죽을 운명인 놈을 살려?”
그저 간단히 훈시나 하려는 줄 알았던 파비앵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는 게 느껴졌지만 일단 무시했다.
“사실 그 반대다. 우리가 언제 후방에서 적당히 편히 쉬기나 했냐? 아르덴에서 개처럼 뛰고 마른에선 아군 포탄에 죽을지 적 포탄에 죽을지 모를 인생이었다. 그리고 우린, 다시 아라스에 왔다.”
보충병들도 있겠으나 대부분은 여전히 아라스 33 보병연대 출신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개떼처럼 죽어나가겠지. 난 그거 못 살린다. 아라스라서 안전하지 않냐고? 아니, 장담하는데 아라스는 곧 지금보다 더한 꼬라지로 변할 거다.”
내 몸 하나 건사할 자신 없는데 여기 있는 수많은 사람 목숨까지 책임질 수는 없다.
“대신에, 내 딱 하나 약속한다. 내 밑에서 싸우면 개죽음은 없다. 너희가 죽으면 그 덕에 누군가는 살았단 의미고, 적은 더 죽었을 테니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 그건 오직 무의미한 희생을 줄이는 것뿐이다.
“난 명예니 전공이니 다 모르겠다. 그냥 싸워라. 올해 크리스마스? 꿈도 꾸지 마라. 내년, 아니 내후년도! 너희에게는 딱 두 가지뿐이다. 내 밑에서 개처럼 싸우거나, 아니면 죽어서 편히 쉬거나.”
멋들어진 훈시 같은 건 웅변 좀 배운 놈들이나 할 수 있는 거고, 난 그런 거 못 한다.
그냥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게 전부다.
“다시, 우린 아라스로 돌아왔다. 곧 적은 이곳으로 몰아칠 거다. 그리고 난 평화로웠던 아라스를 기억하는 제33연대의 한 일원으로서 이곳을 내줄 생각이 없다.”
길게 말하긴 했는데, 요약하자면 어차피 여기서 개같이 싸워야 하니 정신 차리란 말이다.
‘뭐 다들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지휘관이 말하는데 졸지만 않았으면 다행이지 뭐.’
그리 생각하며 내려오려는데 가장 앞줄에 있던 익숙한 얼굴이 갑자기 제 손의 총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비교적 가깝기에 자세히 보니 윌리암 페르 병장이었다.
‘음? 저 새끼 왜 처울려고 해.’
아니 혼낸 건 아닌데? 내가 그리 강하게 말했나? 그냥 정신 바짝 차려라, 뭐 이런 말 하려던 건데….
“…I can do!”
병장이 총을 치켜드니 옆에서 눈치 보던 이등병도 은근슬쩍 뭣 모르고 따라 한다. 이어서 하나둘씩 총을 하늘 높이 들고 외쳐댄다.
아, 시발 하지 마. 그거 하지 마.
“I can do!”
“다 죽여! 못 죽일 거 같으면 죽어!”
“가즈아아!”
“와아아!”
여름 유격 훈련 때 구호를 잠시 저거로 한 적이 있는데 역시 어딘가 모자라 보여서 바로 그만뒀다. 역시 미래에도 이상한 구호는 과거에서도 이상하더라고.
솔직히 남의 나라 언어로 아이 캔 두가 뭐야. 심지어 문법적으로 맞지도, 딱히 상징적이지도 않다.
유격 당시 괴상한 발음으로 애들이 힘들다고 징징거리니 ‘그래? 그럼 영어로 아이 캔 두 외쳐봐!’ 수준의 장난이었다. 진짜로.
근데 지금 이 상황은… 그때에 대한 뒤늦은 반항이냐. 저것들이 뱉는 말들이 어째 다 내가 해본 말들인 거 같은데.
한 놈이 시작하니 뒤이어 모두가 외치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애들 앞에서는 냉수도 함부로 마시지 말라더니… 아니, 근데 이것들이 애는 아니잖아? 나랑 같은 20대인데?
이리 내 마음은 심란하고 쪽팔려서 미치겠는데 옆에서 파비앵이 손을 든다. 그래, 네가 좀 나서서 막아봐.
“…우린, 할 수 있다.”
“…….”
다시 보니 권총집에서 권총을 꺼내 하늘 높이 치켜든 거였다.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거지? 파비앵, 지금 상사 달았다고 반항하는 거지? 제발 그렇다고 해줘.
그런 것 치고 결연한 파비앵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진지하다. 진지하지 마. 너까지 왜 진지하게 그러고 있는데.
이윽고 하늘 높이 외치던 이들의 시선이 나로 목표를 바꿨다.
뭐, 왜.
부릅뜨고 나도 어쩌라는 듯이 대치하려 했으나.
‘언제 이렇게….’
광장에서 짧게 말하고 끝내려던 게 어느새 타 부대, 나아가 시민들의 이목까지 끌었다.
지금 이 순간 아라스 전체가 나를 주시하는 기분이었다.
시발, 아냐. 아니야.
지휘관 훈시조차 귓구녕에 안 처박고 짬에 이상하게 말아먹은 것들이랑은 다르다고. 절 저 머저리들이랑 같은 취급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 외치고 싶었으나 환경의 압박을 일개 개인이 이겨내는 일은 쉽지 않다. 그 집단이 다양하고 거대할수록 더더욱.
조용히 난 손을 움직였다. 아니, 손이 스스로 움직였다. 마치 모두의 의지가 내 의사와 상관없이 몸을 조종하는 기분.
허리춤에 장식용으로 달고 다니던 MAS 1873이 뽑혀 나온다.
다시 말하지만, 내 의지가 아니다. 이건 굳이 표현하자면…. 눈치다. 수많은 이들이 눈치를 주니 솔로몬 애쉬 선생님이 말씀하신 동조 현상이 일어난 거다.
“아… 아….”
입은 떨어졌지만, 혀가 거부한다. 애매한 소리가 내 입술 사이로 나오자 더더욱 광장은 조용해져서 경청한다.
모두가 날 보며 침묵으로 외친다. 어서 ‘그’ 말을 하라고.
“…아이 캔 두.”
“와아아아!”
하하. 보고 있나, 미래 대한민국? 너흰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난 역사에 길이 남을 거다.
병신 같은 구호를 외친 지휘관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