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
을 위한 세계는 없다-1화(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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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 재수 없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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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데 한순간이면 족하고, 악당이 되는데 하루면 족하다.
『깊은 탑에서 내려오는 오래된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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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는, 현실이 아니야.”
청소 현장을 찾아온 ‘고객’은 대뜸,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
“내가 하던 게임 속인 거 같은데, 아닐지도 몰라. 만화, 영화, 소설, 게임… 문어발처럼 이것저것 다 해 먹던 프렌차이즈 세계관이라서.”
그가 무어라 지껄이건, 청소부들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오늘은 유독 치울 것들이 많은 탓이었다.
빨갱이 엘프 둘, 밀수꾼 넷, 그리고 아마 밀수꾼의 호위였을 뒷골목 양아치들까지.
청소부들은 그들이 구더기 밥이 되기 전에 비닐 가방에 담고, 붉게 물든 바닥에 약을 뿌렸다.
고객도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청소부 트럭 앞에 앉아 계속 입을 나불거렸다.
“사실, 별생각 없었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어쩌면, 나 말고 이 세계에 떨어진 인간이 더 있는 거 아닐까?”
“거 뭐, 세계관 외전 소설을 쓴 작가라던가, CF 감독 같은 사람들 말이지.”
“그런 사람들이 나처럼 게임 캐릭터로 왔을 리는 없고… 어떻게 왔을까. 빙의? 환생?”
반쯤 농담처럼 지껄이는 그의 말에는 어떠한 정합성이나 논리도 없었다.
피식거리는 웃음소리 사이로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마치, 정신병원 복도에서 들을 수 있는 미친놈의 헛소리와 닮아 있었다.
뭔가 불길하면서도 꺼림칙한… 그런 목소리.
그쯤 되자, 몇몇 청소부들이 눈에 띄게 손님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물론 행동으로 옮기는 청소부는 아무도 없었다.
엘프를 포함해 사십 명이 넘는 사람을 도륙한 살인마와 싸우고 싶은 사람은 이곳에 없었으니까.
대신 조금이라도 빨리 청소를 끝내기 위해, 손과 발을 더 분주히 움직일 뿐이었다.
“어째 나만 떠드는 거 같네.”
그런 분위기를 읽은 것일까? 고객은 나불대던 입을 다물었다.
허나 침묵은 길지 않았다.
청소부들이 마지막 비닐 가방을 트럭에 던져 넣을 때쯤, 손님은 대뜸 손을 들어 한 청소부를 가리켰다.
“야, 거기, 너.”
고객이 가리킨 건 오물 청소기로 바닥을 닦고 있던 청소부였다.
다른 청소부들과 마찬가지로, 두꺼운 작업복 차림에 방독면으로 얼굴을 가린 청소부가 고개를 돌려 고객을 바라봤다.
“그래, 너. 질문 좀 하나 하자.”
“…질문 말입니까?”
오물 청소기를 든 청소부의 방독면 안에서, 젊은 청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대단한 질문은 아니고. 환생으로 이 세계에 왔으면 환생자, 빙의로 오면 빙의자라고 하잖아? 그럼 게임 캐릭터로 온 나는 뭐라고 불러야 할 거 같냐?”
청소부는 슬쩍 다른 청소부들을 바라본 뒤, 고객에게 대답했다.
“주인공… 아니겠습니까?”
“주인공? 왜 그렇게 생각해?”
“그, 게임 속에 들어오셨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런 비범한 일을 겪으신 분은… 주인공이라고 불러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청소부의 대답에 고객은 피식 웃었다. 만족스럽다기보단,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근데, 틀렸어. 이 세계관에 주인공은 따로 있거든.”
“…그렇습니까?”
“말했잖아. 프렌차이즈 세계관이라고. 게임 캐릭터가 어떻게 주인공이겠냐? 그러니 다른 명칭을 생각해봐. 게임하면 딱 떠오르는 게 뭘까?”
청소와는 동떨어진 질문의 연속이었음에도, 오물 청소기를 들고 있던 청소부는 꽤 진지하게 고민했다.
혹은, 그런 척했다.
눈치 빠른 동료들이 오물 청소기를 낚아채고, 다른 흔적들을 싹 치워 낼 때까지, 계속.
마침내 청소부 중 하나가 눈짓으로 청소가 끝났음을 알리자마자, 그는 입을 열었다.
“…플레이어. 어떻습니까?”
“플레이어? 오, 그거 맘에 드네. 플레이어, 플레이어라…”
대답이 만족스러웠던 걸까, 고객은 플레이어란 단어를 몇 번이고 혓바닥 위에 굴리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잠시 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꽤 괜찮은 별명을 떠올렸으니, 넌 마지막이다.”
“…마지막이요? 뭐 말입니까?”
고객은 대답 대신, 허공에서 무언가를 ‘잡었다’.
그러자 마치 원래 그곳에 있던 것처럼, 기다란 철검이 고객의 손에 쥐어졌다.
“자, 잠깐…!”
검을 본 순간, 눈치 빠른 청소부 하나가 총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고객이 청소부들에게 달려드는 게 더 빨랐다.
“이런 젠장! 도망쳐!”
“경보기! 경보기 눌러!”
“아악!”
비명이 튀고, 피가 그 뒤를 물들였다.
가장 먼저 총을 뽑아 든 제임스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긴급 경보기를 누르려던 덕배는 가슴을 길게 베여 두 조각이 났고, 그 옆에 있던 춘식이는 유언도 뭣도 아닌 비명만 남기고 쓰러졌다.
그 셋의 죽음을 시작으로, 청소부들은 무참히 살해 당했다. 쓰레기를 치우는 것처럼 빠르고, 잔혹하게.
“어째서… 경보기가…”
마지막으로 쓰러진 건 작업반장이었다. 그는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울리지 않는 경보기를 애타게 눌렀다.
분명 신호가 가고 있었음에도, 경보기에선 아무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당연히 안 울리지. 너희들 몸값 계산 끝난 지가 언젠데.”
뭐가 그리 즐거운지, 고객은 피식거리며 작업반장의 시체를 짓밟았다. 애써 치운 바닥이 다시 피범벅이 될 때까지, 계속.
작업반장의 상체가 전부 너덜너덜해지고 나서야, 녀석은 발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 이름을 지어준 청소부가 몸을 떨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 대체 왜…?”
“아, 혹시라도 오해는 하지 마. 뭔가 원한 같은 게 있는 건 아니니까.”
“….”
“레벨 업까지 경험치가 아주 조금 남아서 말이야.”
플레이어는 웃으며 뺨에 튄 피를 닦았다.
“…경험치?”
“기왕 프롤로그 시작하는 거, 9렙 보다는 10 렙이 낫거든. 특성도 열리고, 새 기술도 배우고…아카데미 루트는 초반에 확 시선을 끌어야 후반이 편해.”
고객은 태연하게 미친 소리를 지껄이곤, 칼을 털었다. 후두둑, 바닥에 핏방울이 번졌다.
“약속대로, 넌 마지막이야. 마침 경험치도 딱 맞네.”
플레이어가 다가갔지만, 마지막 청소부는 도망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제자리에 서서, 고객… 아니, 플레이어를 노려봤다.
용기인가, 아니면 도망가지 못할걸 알고 포기한 건가? 플레이어에겐 어느 쪽이건 상관없었다.
“야, 너 이름이 뭐냐?”
플레이어는 녀석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물었다.
“…쇠똥구리.”
“하! 똥 치우기 담당이라 쇠똥구리냐? 작명 실력 하난 기가 막히네.”
플레이어는 슬쩍 칼에 힘을 실었다. 칼날이 쇠똥구리의 목을 파고들면서, 주르륵 피가 흘렀다.
“쇠똥구리, 혹시 유언 있냐? 10렙 기념으로 들어 줄게.”
“…얼마였지?”
“뭐가?”
“우리 목숨값.”
“목숨값? 생각보다 싸던데. 두 당 25만원 줬어. 나머지는 너희 월급에서 빼면 된다나?”
쇠똥구리는 주먹을 쥐고 몸을 떨었다. 비명이 나오려는 이를 악물고, 숨을 참았다.
“…시발.”
그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다른 누구도 아닌 윗대가리가 자신들을 팔았다. 고작 인건비를 아끼겠다고.
…이것이 정말 현실이란 말인가?
그가 아무리 물어본들, 현실은 냉담했다. 함께 동고동락했던 청소부들은 바닥에 널브러진 피와 오물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곧, 그도 그렇게 될 것이다.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 몹이 다 그런 거 아니겠냐?”
“몹? 몹이라고? 넌 니가 죽인 사람들이… 저 사람들이 몹으로 보이냐?”
쇠똥구리가 씹어뱉듯 말하자, 플레이어는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죽이면 경험치랑 아이템 나오는 게 몹이지. 그럼, 사람인가?”
“이 정신 나간 또라이 새… 컥!”
쇠똥구리의 마지막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검이 그의 목을 지나갔고, 목에서는 유언 대신 피가 쏟아졌다.
그 다음, 방독면을 쓴 머리통 하나와 목 없는 시체 한 구가 쓰러졌다.
“레벨 업.”
플레이어는 자신이 만든 시체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허공에 뭔가 있는 것처럼 빈 하늘을 이리저리 두들기다가, 힘이 어쩌니, 민첩성이 어쩌니 같은 소리를 지껄이며 자리를 떠났다.
아닌 밤 중의 살육극은 그렇게 끝났다. 목격자도, 생존자도 존재하지 않는 조용한 끝마침이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플레이어가 떠난 자리에서, 목 없는 시체가 몸을 일으켰다.
시체는 방향을 잡지 못해 한참 동안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차갑게 식어가는 손으로 바닥을 더듬거리며 무언가를 애타게 찾았다.
철퍽.
한참을 돌아다니던 시체는, 피 웅덩이 위에서 찾던 것을 발견했다. 깔끔하게 잘린 머리통.
시체는 조심스럽고 섬세한 손으로 머리를 들어 올려, 원래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올려놨다.
치이익
목에 머리를 올리자, 베인 상처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며 피와 살이 다시 붙었다.
기적 같은 일이었으나, 시체는 여전히 시체였다. 심장이 멈춘 몸뚱아리는 여전히 차가웠고, 호흡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죽은 청소부는 되살아날 것이다. 살아있던 시절보다 더욱더 강하고, 더욱더… 즐겁게.
『오, 나의 간택자.』
플레이어가 죽음을 뿌리고 간 자리에서, ‘그것’은 소리 없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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