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00)
을 위한 세계는 없다-100화(100/817)
〈 100화 〉 특별 교육
* * *
비단 위에 누워있는 자보다, 진흙탕을 구르는 자가 먼저 큰 산에 도달하는 법이다.
『깊은 탑에서 내려오는 오래된 격언』
***
“가, 감히, 가축이… 감히…!”
웃기는 말이었다.
목장이 아닌 아카데미에서, 그것도 뒤통수가 박살 난 상태로 저런 말을 내뱉을 수 있다니.
양치기들이 그동안 양들을 얼마나 하찮게 봤는지 절절히 느껴지는 말.
세티는 웃으며 대답했다.
“가축이라뇨. 양치기님, 후보생이나 검은 양이라고 부르셔야죠.”
“닥쳐! 닥치란 말이다…!”
양치기는 욕을 내뱉으며 도망쳤다.
뒤통수에서 피를 질질 흘리고, 방향 감각을 잃은 몸을 휘청거리면서도, 어떻게든 세티와 거리를 벌리기 위해 움직였다.
정상적인 판단은 아니었다.
만약 뒤통수가 깨지지 않았다면… 그녀는 당장 금제를 발동하거나 머리를 뒤집어쓰고 싸웠으리라.
하지만 기습을 허용한 양치기는 그런 생각은커녕 제대로 발을 뻗지도 못했다.
털썩, 그녀는 고작 몇 걸음 만에 발이 꼬여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크흑…!”
양치기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버둥거리다가, 점점 커지는 발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길게 늘어진 밤 그림자 아래, 피에 젖은 망치를 든 소녀가 느긋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세티… 이… 쓰레기 같은 년…”
양치기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떨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 망치에 묻은 피는 그녀의 피였으니까.
“가축이면, 가축답게…”
그녀는 뒤늦게 금제를 떠올리곤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세티가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딱! 손가락을 튕겼다.
“무릎 꿇어라…!”
뒤틀린 마나로 이루어진 마법이 세티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고, 세티는…
입꼬리를 올린 채 양치기를 내려다봤다.
“어, 어찌… 금제가…?”
“금제가 무서웠으면 당연히 기습하지도 않았겠죠? 아, 머리통이 깨져서 거기까진 생각 못 하셨나?”
암담하게 물드는 양치기의 얼굴을 보며, 세티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엄지손톱보다 조금 큰 검은 색 결정.
금제의 주문을 흡수하는 마도구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 그녀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목줄에서 풀려난 세티는 더 이상 양이 아니라는 것.
“세티, 이 매국ㄴ…!”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망치가 날아왔다.
콰직 흉측한 소리와 함께 양치기의 다리에서 감각이 사라졌다.
양치기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필사적으로 마나를 끌어모았다.
‘머리, 지금이라도 머리를 써야 해…’
부질없는 짓이었다.
세티는 양치기 본인보다도 양치기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순순히 반격의 기회를 내줄 생각이 없었으니까.
쿵!
망치가 떨어졌다. 달빛 아래, 오염된 검은 피가 번졌다.
세티는 세심하게 망치를 조준했다. 최대한 고통을 주되, 절대로 죽지 않도록.
쿵!
다시 한번, 망치를 내려친다. 땀이 흐른다. 온갖 감정이 뒤섞인 땀방울이 눈물처럼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래로, 아래로.
그리고 그렇게 아래로 떨어진 땀이 피 웅덩이 위에 파장을 일으킬 때쯤.
세티는망치질을 멈췄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바닥에 처박힌 양치기에게 향했다.
위력을 조절한 덕분일까? 양치기는 아직도 입을 움직일 수 있었다.
“크, 크흑… 이, 이런 짓을… 벌이고도… 너희… 쓰레기들이… 쿨럭, 무사할 것… 같으냐…”
“….”
양치기는 피가 섞인 숨을 내뱉으며 지껄였다. 고통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건지, 횡설수설에 가까운 말투였다.
“쓰레기들…! 세 가지 가능성을 가지고도… 두 개도 감당하지 못한… 결함품들…! 그게, 너희 자매다!”
무술, 마법, 신성. 마나를 다루는 세 가지의 방법,
세티와 자매들은 세 가지 가능성을 전부 타고났음에도, 두 가지를 쓰는 것조차 버거워했다.
한국 정부는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세 가지 방법을 전부 쓸 수 있도록 자매들을 닦달했다.
고문, 협박, 그 외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역겨운 짓거리들로.
“특히… 너… 세티, 네가 가장… 쿨럭, 쓰레기다… 신성도 잃고… 무술만 남은…”
세티는 망치를 내려놓고 허리를 굽힌 뒤, 양치기와 눈높이를 맞췄다. 혐오와 증오가 뒤섞인 눈동자가 허공에서 얽혔다.
“실패한… 가축 년… 네년의… 가치는… 씨받이, 크흑, 뿐이었거늘…”
“…씨받이?”
세티는 새삼스레 꿈에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목장 주인들이 씨 좋은 수컷을 찾고 있다는 그 역겨운 말.
설마설마했는데, 역시 단순한 꿈속 헛소리가 아니었나.
“쿨럭, 우리가… 너희, 자매들의… 순결을… 남겨둔, 이유가… 뭐라고… 생각했느냐…?”
그녀와 자매들의 여성성을 모욕하기 위한 말이었음에도, 세티는 방긋 웃었다.
저 말이 양치기만의 생각이 아니라, 한국 정부 전체가 가진 생각이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아하, 그래서 혼자 헐레벌떡 뛰어왔구나? 기대도 안 한 씨받이가, 좋은 수놈을 물어왔으니까?”
양치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증오 어린 눈빛만으로도, 세티는 자신의 말이 정답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알려줘서 고마워.”
“쿨럭… 뭐?”
“여명과 정부 사이에 어떻게 선을 놓을지 고민이었는데… 이제야 확신이 들었어.”
여명? 천여명은 단순히 자신을 불러내기 위한 미끼였던 게 아니었단 말인가?
“그게… 무슨… 컥!”
양치기가 무어라 말을 이어가려는 찰나.
푹 세티의 손가락이 그녀의 관자놀이에 박혔다.
“그리고 너희가 오해하는 게 하나 있는데, 나는 신성을 잃은 적 없어.”
머리가 꿰뚫렸음에도, 어째서인지 양치기는 즉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 사실에 끔찍한 공포를 느꼈다.
“신들이 나를 버린 거지. 경기 중에 성녀를 죽이라는 너희의 명령을 들었다는 이유로.”
“으아… 으…”
뻐끔거리는 입, 비명이 되지 못한 아우성.
세티는 양치기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런데, 새로운 신께서 나를 찾아오셨어.”
양치기는 몸을 떨었다.
세티의 말이 진실임을, 그리고 그녀의 손을 타고 흘러오는 마나가 바로 그 증거임을 깨달은 까닭이었다.
무술이나 마법과는 궤를 달리하는, 종교인들은 축복이라 부르는 마나.
“다섯 신보다 훨씬 더 좋은 분이셔. 그분께선 제물을 가리지 않거든.”
“아, 안 ㄷ…!”
“쉿.”
세티는 다른 손을 들어 양치기의 입을 막았다.
달빛도 눈을 돌린 걸까? 때마침 달빛이 기울어지며 그녀의 머리를 등졌다.
밤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며 두 사람을 덮고, 세티가 축복을 완성한 그 순간.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양치기의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언니를 끌고 간 양치기.저의 첫 제물을… 바치나이다.”
무언가 자신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감각을 마지막으로, 양치기는 비명을 질렀다.
뒤늦은 비명이었다.
***
까마귀 수인, 코르부스에게 뒤처리를 맡겨둔 채, 아카데미를 달리기를 한참.
뒤늦게 약속 장소에 도착한 여명은 세티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세티?”
그녀는 수풀 사이에 앉아 달을 보고 있었다. 어딘가 후련한 표정이었다.
“왔어? 조금 늦었네.양치기들이 꽤 강했나 봐?”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조금 예상외의 일이 생겨…”
세티에게 다가가던 여명은 움찔,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앉아있는 수풀 주변에 검은 피가 가득 고여 있어서? 아니, 아니다.
그의 발을 멈추게 한 건, 그녀가 앉아있는 의자였다.
정확히는, 네발로 엎드린 복면의 여성.
팔다리를 부들거리고 있는 꼴을 보면 죽은 건 아닌 듯싶었는데, 대체 왜 세티가 저런 여자를 의자 삼아 앉아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여명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거 뭐야?”
“응? 뭐가?”
여명은 대답 대신 그녀의 아래로 눈짓했다. 세티는 잠시 뜸을 들인 뒤, 가볍게 대답했다.
“아, 이거? 별거 아냐. 날 쫓아온 양치기야.”
“…그게 별거 아니냐?”
“지금은 우리 양치기거든.”
어디 미국 대통령이나 할 법한 말을 내뱉은 뒤, 세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락, 풀 밟는 소리가 작게 번진다.
여명은 혹시라도 양치기가 돌변해 달려들까 긴장했으나, 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얌전한 인형처럼.
“…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양치기가 저렇게 된 거야?”
“그리 대단한 건 아니고… 머릿속에 있는 흑마법을 조금 만져줬지.”
세티는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하지만 반쯤 괴물이나 다름없는 양치기를 노예로 만드는 마법이라니, 무슨 수로?
세티가 뭔가를 숨기고 있음을 직감한 여명은 조심스레 질문했다. 아니, 질문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입술이 열리는 것보다, 어느새 다가온 세티가 그의 몸을 끌어안는 게 조금 더 빨랐다.
“…응?”
갑작스러운 포옹이었다. 여명은 그녀를 밀어내지도, 그렇다고 끌어안지도 못한 채 물었다.
“…세티? 왜 그래?”
세티는 대답 대신 양손에 힘을 주고 여명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가슴 언저리에서 세티의 숨결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여명은 그 숨이 용의 그것만큼이나 뜨거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잠깐, 아주 잠깐만…”
“….”
“이러고 있어 줄래?”
무언가를 억누르는, 애달픈 목소리. 여명은 그제야 세티를 끌어안고, 등을 쓸어줬다.
하지만 힘껏 끌어 안아주지는 못했다.
그도 혈기왕성한 나잇대의 남자였고, 마음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 까닭이었다.
여명은 머릿속으로 알지도 못하는 불경을 외우면서, 눈치 없는 달을 올려다봤다.
세티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계속.
***
두 사람의 포옹은 오래가지 않았다.
여명이 애꿎은 불경을 다섯 번쯤 반복하고 나서야, 세티는 기다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여명, 우리 계획 기억해?”
“그럼, 당연히 기억하지.”
여명이 유명세를 얻고, 그 이름값을 이용해 정부 인사들을 한자리에 끌어모은 뒤… 일망타진하는 계획.
“그 계획… 계속해도 될까?”
세티의 질문에는 진한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만약 거절당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여명은 그녀의 두려움을 이해했다.
처음 계획을 세울 당시, 그는 오직 복수만을 꿈꾸는 쇠똥구리였다. 다른 미래를 선택할 여유도,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그는 천여명이 되었다. 연일 뉴스를 달군 신성이자, 모두가 주목하는 존재.
원한다면, 언제든 쇠똥구리의 복수가 아닌 여명의 미래를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세티가 두려워하는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더 이상 복수를 원하지 않는 것 아닐까? 찬란한 미래를 포기하느니, 복수를 포기하지 않을까…
타당한 의문이었고, 당연한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여명은 단 한 번의 대답으로 모든 두려움을 밀어냈다.
“죽일 놈들을 전부 죽일 때까지, 난 멈출 생각 없어.”
“….”
“오히려 네가 걱정이지.”
“…나? 내가 왜?”
“이제 금제에서 벗어났잖아. 복수 대신 자매들과 함께 다른 나라로 도망쳐도 되는 거 아냐?”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티는 아무 말 없이 입술을 삐쭉였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표정.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여명은 빙긋 웃으며 그의 허리를 붙잡고 있던 세티의 손을 잡았다.
드문드문 굳은살이 박혀 있지만, 언제 만져도 곱고 아름다운 손.
“우리 거래, 잊은 건 아니지?”
“…거래?”
“너는 날 돕고, 나는 널 돕는다. 단, 서로의 목숨은 걸지 않고.”
여명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인 그것은, 두 사람이 처음 손잡던 순간에 했던 말이었다.
기억 깊은 곳에 묻혀있던, 최초의 약속.
세티는 진주를 들켜버린 조개처럼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그리고 그 정적이 길어지기 전에, 세티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여명. 그, 저기… 계획 말인데…”
“응.”
“정부를 이용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찾았어. 저 양치기도 그 계획에 이용하기 위해 살려둔 거고…”
그녀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내가 저 양치기의 명령으로 너를 유혹했고…”
한숨 한 번.
“여명 네가, 그… 나한테 반해서…”
심호흡 한 번.
“한국이 너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그런 상태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그런 계획인데…”
세티는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말끝이 흐려지고, 눈초리가 묘하게 돌아갔다.
여명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미인계에 당한 척하자고?”
부끄러움을 참고 내뱉은 말이 단 한 줄로 정리돼버리자, 세티는 더 이상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웃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
여명은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입술을 만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뒤,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음…여기까지만 하자.”
“…응? 뭘?”
“더하면 기숙사 통금을 어기는 게 아니라 외박을 하게 될 거 같네.”
그러면 투명망토를 써도 둘러댈 말이 없거든.
여명이 그렇게 덧붙이자 뒤늦게 그 말을 이해한 세티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녀의 자매들조차, 한 번도 본적 없는 표정이었다.
***
다행히, 두 사람은 외박하지 않았다.
통금시간을 3시간 정도 어기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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