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01)
을 위한 세계는 없다-101화(101/817)
〈 101화 〉 특별 교육 (2)
* * *
***
남자는 꿈속에서 눈을 떴다.
가장 먼저 그의 시야에 들어온 건, 드높은 빌딩과 사람으로 가득 찬 도시의 풍경이었다.
잘 포장된 도로와 무수한 자동차, 마천루 아래 향긋한 커피 하우스, 출근하는 남성과 노인, 최신 스마트폰과 지팡이, 피로한 워킹맘과 엄마 손을 잡은 꼬맹이의 발그레한 뺨까지.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은 광경이었으나, 이곳은 현실이 아닌 꿈이었다.
남자의 시선이 닿는 그 어떤 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일시 정지된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모든 게 정지된세계.
‘…수준 높은 꿈은 아니군. 급했나?’
잠시 그 풍경을 바라보던 남자는 짧은 감상을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황이나 두려움은 없었다. 이런 꿈이 처음이 아닌 까닭이었다.
‘날 부른 녀석은… 동쪽에 있나.’
그는 정지된 사람들 사이를 지나 도시의 동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정지된 건널목 건너고, 온갖 차도를 제멋대로 가로지르기를 한참.
그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해변이 펼쳐진 곳이었다.
바다처럼 드넓은 수평선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으나, 이곳은 바다가 아니었다.
미국이 오대호라 부르는 넓은 호수이자, 시카고의 심장, 그리고 시카고 차원문이라 불리는 거대한 차원문이 열려있는 곳.
그곳, 미시간 호수.
남자는 해변에 서서 호수를 눈에 담았다.
정확히는, 드워프들이 만들어놓은 거대한 인공섬 위에서 번쩍이는 차원문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정지된 꿈속에서, 오직 차원문만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왜 이렇게 늦었는가?]그가 차원문을 바라보기 무섭게, 차원문 너머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벼락이 직접 말하는 것처럼 거대한 목소리였다.
“대뜸 꿈으로 불러낸 주제에, 첫마디가 그건가?”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차원문이 변명하듯 빛을 토해냈다.
[급한 일이었다. 설명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급한 일이라. 그래, 그럼 어디 얼마나 급한 일이었는지 설명해봐.”
남자는 어디 들어나 보자는 태도로 말했다. 그러자 차원문 너머의 목소리가 힘없이 대답했다.
[소용없다.]“…소용없다고?”
[이미 늦었으니까.]남자는 그제야 일이 심상치 않게 흘러간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눈살을 확 찌푸린 채, 거듭 질문했다.
“계약자로서 명한다. 대체 뭐가, 어떻게 늦은 건지 설명해라. 지금 당장.”
차원문 너머의 무언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보이지 않는 힘을 휘둘러 남자를 붙잡았다.
“…뭐 하자는 거냐.”
[내겐 너희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재주가 부족하다. 직접 보아라.]직접 보라고? 무엇을?
남자가 의문을 떠올리는 순간, 그의 몸이 하늘로 솟구쳤다.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발아래를 확인했을 땐 시카고와 미시간 호수 모두 손톱만큼 작아진 상태였다.
“막무가내로 끌고 가기 전에, 목적지라도 말해라, 좀.”
당황할 법도 하건만, 남자는 침착하게 물었다. 아메리카 대륙을 벗어나 태평양을 건너는 시점이었다.
저 멀리 호주 대륙이 보일 때쯤, 목소리가 대답했다.
[우린 지구인들이 로드 하우 아일랜드라 부르는 곳으로 간다.]로드 하우? 남자는 아카데미를 떠올리곤 턱을 쓸었다.
오늘 아침까지 별문제 없던 곳에 무슨 변고가 일어났단 말인가?
그가 고민을 끝내기도 전에,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땅에 내려놨다.
땅에 발을 디딘 남자는 누가 따로 설명해주지 않았음에도, 이곳이 로드 하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꿈속 세상이 일그러질 정도로 막대한 가능성이 모여있는 장소가 이 세상에 두 곳이나 있을 리 없었으니까.
[보이는가?]목소리가 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가능성 때문에 아무것도 안 보인다.”
남자는 미간을 좁히며 주변을 훑었다.
아무리 시선을 집중해봐도, 그의 눈에 보이는 건 아이가 그린 낙서처럼 어지럽게 이어지는 외곽선과 뒤섞인 색뿐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가능성은 중력과 같아서, 강하게 뭉쳐있을수록 주변의 꿈을 빨아들이고 일그러트리는 법이니까.
[끄응, 인간이란.]그 꼴을 지켜보던 목소리는 대뜸 남자에게 보이지 않는 힘을 불어넣었다.
힘의 목적은 간단했다. 주변을 둘러싼 가능성을 상쇄하고, 남자의 시야를 밝히는 것.
그는 갑작스러운 힘을 견뎌내며 앞을 노려보았다.
[이제 보이는가?]“…그래, 조금은 보이는군.”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아카데미 외곽 어딘가에 있을 법한 풀밭과 그 위에 나란히 앉아있는 한 쌍의 남녀였다.
일그러진 외곽선 때문에 정확히 보이진 않았지만…
어두운 밤, 두 남녀가 나란히 앉아 얼굴을 겹치고 있다니. 무슨 짓을 하는지 뻔했다.
[어떤가? 지금이라도 대책을 세워야 한다.]긴장이 탁 풀린 남자와 달리, 목소리는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남자는 한숨 쉬며 대답했다.
“…내 눈에는 발랑 까진 연놈들이 한밤중에 입술 부딪히는 꼴밖에 안 보인다만.”
[…]“어린놈들 연애질에 무슨 대책을 내놓으란 거냐. 아카데미에 구취제거제라도 보급할까? 아니면 콘돔?”
그가 비꼬기 무섭게, 목소리가 다시 한번 남자의 몸에 힘을 불어넣었다.
[…조금 더 선명히 봐라.]후욱!
이번에는 꿈이 흔들릴 정도로 막대한 양이었기에, 남자는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남녀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고 있는 작은 구슬 하나.
“가능성? 눈에 보일 정도라니, 저건…”
[저 정도면 운명이라고 불러도 모자라지 않다.]목소리의 말마따나, 타고난 가능성이 꿈속에서 시각화될 정도라면 운명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막대한 중력이 블랙홀을 만들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저 정도 가능성 또한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테니까.
“윤성이인가? 아니, 윤성이는 아닌 것 같은데…”
남자는 조심스레 두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운명이 내뿜는 빛이 얼마나 강한지, 구슬을 등진 둘의 얼굴은 여전히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저 둘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저 구슬이다. 확인해 보라.]남자는 목소리의 말을 따라 눈을 가늘게 뜨고 빛나는 구슬을 똑바로 바라봤다. 잠시 후, 그는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보이는가?]“…그래, 보이는군.”
구슬은 하나가 아니었다. 한쪽이 볼록 튀어나와 있는 게, 두 개의 구슬이 하나로 합쳐진 모양새였다.
“이런 운명을 가진 사람도 몇 없는데… 하나로 합쳐진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군. 혹시 누가 누구의 운명을 흡수한 건지 확인했나?”
[아니. 내가 이변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한쪽이 다른 쪽을 흡수한 뒤였다.]남자는 이마를 쓸었다. 시련은 이제 막 시작했거늘, 벌써 이런 일이 발생할 줄이야.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남자는 한탄인지 한숨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대책은 둘의 정체를 알아낸 뒤에나 세울 수 있을 것 같다. 아직 시간에 여유가 있으니, 우선 얼굴부터 확인…”
그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그의 감각이, 정확히는 목소리가 불어 넣어준 힘이 무언가에 반응한 까닭이었다.
……
정지된 꿈속 세상으로, 침묵이 찾아왔다. 기나긴 침묵이.
“…누구냐.”
침묵을 견디지 못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도서관에 맞먹는 방대한 정보가 떠오르고 있었다.
이 시간대, 이런 곳에서,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녀석은 기껏해야…
“…파순이냐? 아니면 마오란 레락?”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체를 들켜서 고민하는 건가? 아니면 단순히 블러핑?
남자가 고민하며 뒷걸음질 친 순간.
툭.
무언가에 등을 부딪쳤다.
그조차 몇 번 느껴본 적 없는, 소름 돋는 무언가.
남자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그곳에는… 거대한 그림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악……”
그것의 정체를 알아본 남자가 무어라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
『쉿.』
그것은 손가락을 들어 입을 막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그 시늉만으로도, 꿈이 일렁거리며 남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나의 간택자가 처음으로 운명을 취하는 순간이니라.』
『도돌이표 따위가 훔쳐볼 정도로 가벼운 순간이 아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본 건 모두 잊거라.』
남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이미 꿈에서 깨어났으므로.
그리고 대부분의 꿈이 그러하듯, 그는 지나간 꿈을 기억하지 못했다.
***
1학년 기숙사의 아침은 조용했다.
시끄러운 기상나팔도, 학생 특유의 시끌벅적함도 없었다.
체력이 좋거나 아침잠이 적은 학생들은 이미 일어나 수련실로 떠난 뒤였고, 마법사 지망생들은 사감이 돌아다니기도 전에 아침 명상에 들어갔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최고의 초인 아카데미다운 모습이라고 말할 풍경이었으나… 진상은 조금 달랐다.
특별 교육.
바로 며칠 전 교장님께서 발표한 새로운 교육 과정이 모든 부지런함의 원인이었다.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처음 발표를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학생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아카데미의 기존 정규 교육 과정에 문제가 있다면 모를까, 수십 년간 명문을 자랑하던 아카데미 아닌가.
이제 와서 외부 교사를 부르니 어쩌니 해봤자, 결국 생색내기일 게 뻔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초빙 교사 목록을 보기 전까지만.
그러나 아카데미가 부른 ‘외부 초빙 교사’의 목록이 드러난 순간, 학생들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세바 레르몬토프? 무한류가 교사로 온다고?
호아나 툴레?! 이 사람, 오래전에 성기사 은퇴하지 않았어?
미켈레다! 미켈레 계산식의 그 미켈레야!
졸업생 중 이름을 날리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이미 은퇴한 전대 유명인들, 아카데미의 이름값에 몰린 학계의 유명인들까지.
초빙 교사의 목록을 본 학생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특별 수업을 손꼽아 기다리기 시작했다.
임시 수업 시간에 노골적으로 누구의 수업을 들을지 떠들며 시간을 때울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그러나 그런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카데미에서 특별 수업 신청서가 배포된 날, 학생들은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특별 수업은 학생이 교사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교사가 학생을 선택한다는 사실을.
아카데미를 둘러싼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극소수의 학생들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깨달았다.
교장이 전력을 모으고 있으며, 특별 수업은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
하지만 그런 정치적 상황을 모르는, 그러니까 대부분의 학생들은 상황을 다르게 이해했다.
더 뛰어난 학생이 뛰어난 교사에게 선택받는 무한 경쟁.
뽑힐 가치가 있는 학생만 뽑는다는 건가?
교장이 칼을 갈았구나!
젠장, 입시 끝난 거 아니었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운 좋은 소수를 제외하면, 학생 대부분은 평생 초인이 되기 위해 경쟁하던 아이들이었으니까.
그들은 자연스럽게 수련과 공부라는 경쟁에 뛰어들었다.
수련실 새치기 좀 하지 마, 이 등신들아!
영약 공동 구매 참가할 사람?
‘그릇’께서 직접 마법 스터디를 모집합니다! 참가하세요!
물론, 그런 경쟁에서 한걸음 떨어진 학생들도 있었다.
굳이 가르침이 필요 없는 성녀, 미국에서 직접 교사를 파견한 전윤성, 그리고…
천여명.
그는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특별 교육 경쟁에 끼어들지 않았다.
수련실 순서가 오면 기꺼이 양보했고, 스터디 권유는 칼같이 거절했다.
그렇다고 따로 초빙 교사 목록을 따로 찾아보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그저 묵묵히, 임시 수업에 얼굴을 내비칠 뿐.
대다수의 학생들은 그런 여명의 태도를 언제든 원하는 교사에게 선택받을 수 있는 자신감으로 해석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테러 사건에서 가장 크게 활약한 장본인이었다. 이미 보여주고 증명한 실력이 얼만데, 특별 교사쯤이야.
초빙 교사 중 몇몇은 노골적으로 여명을 보러온다는 풍문이 있을 정도였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아주 극소수의 학생들은, 그러니까 아직 세상을 핑크빛으로 볼 수 있는 학생들은 다른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세티랑 같은 교사한테 신청하려는 거 아닐까?
홍세티랑? 둘이 무슨 사이인데?
척 보면 모르냐? 요즘 둘이 맨날 붙어 다니잖아.
이런 시시콜콜한 연애 이야기가 언제나 그렇듯,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둘이 공개 연애를 하건 말건, 거의 모든 학생들이 당장 제 앞가림하기도 바쁜 까닭이었다.
하지만 딱 한 사람… 여자 기숙사 내부 신전에서 며칠째 참회 기도를 드리고 있던 성녀는 달랐다.
며칠 전에, 세티가 통금 어겼다더라.
북쪽 섬은 복구 중이라 놀러 간 것도 아닐 텐데…혹시?
신전에 모인 여학생들의 입에서 세티와 여명에 대한 소문을 엿들은 순간.
그녀는 기도를 멈추고 방에서 투명망토와 리볼버를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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