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02)
을 위한 세계는 없다-102화(102/817)
〈 102화 〉 특별 교육 (3)
* * *
***
태양이 중천에 이르고, 학생들이 텅 빈 배를 붙잡는 시간.
식당으로 달려가는 학생들의 발소리가 창문을 두들기는 가운데, 여명은 홀로 방에 틀어박혀 책을 탐독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읽고 있는 건 책이 아니라 두 권의 노트였다. 비슷한 크기에, 똑같은 내용이 적힌 노트.
무언가를 확인하듯 두 노트를 번갈아 읽는 여명의 모습은 무척이나 진지했다.
노트에 담긴 내용이 가볍지 않은 까닭이었다.
‘1장 보스인 피혁 사제는 아직 살아있다. 2장은 이제 곧 시작하고, 보스는 엘프 사냥꾼 후안…’
자신을 이 세상의 창조주, 소위 ‘작가’라고 믿고 있는 바오닉 레락이 직접 쓴 노트.
그 속에는 현실과는 조금 다른, 여명이 없었다면 현실이 되었을 미래와 아카데미에 대한 온갖 정보들이 적혀 있었다.
미래에 벌어질 사건들과 사건을 주도하는 범인들, 특정 인물들의 개인사와 아카데미 곳곳에 숨겨진 기연들까지.
개중에는 ‘아무리 그래도 이런 일이?’ 싶은 정보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아카데미 하수구에 숨어 사는 용이나 1학년 겨울 방학에 일어나는 엘프의 아카데미 습격 사건 같은 것들이 그랬다.
하지만 여명은 그런 정보들조차 차곡차곡 머릿속에 담았다. 특히 기연에 관한 정보는 달달 외울 수 있을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기연을 독점하기 위해서? 아니, 아니다. 그에게 이 기연들은 미끼인 동시에, 단서였다.
‘…플레이어를 찾아낼 단서.’
로드 하우 아카데미 어딘가에 숨어있는 플레이어.
녀석 또한 바오닉과 마찬가지로 아카데미에 숨겨진 수많은 기연을 알고 있을 것이다.
레벨업이란 걸 위해 사람을 죽이던 녀석의 성정을 생각하면, 호시탐탐 기연을 차지할 기회를 노리고 있겠지.
‘…어쩌면, 몇몇 기연은 벌써 손에 넣었을지도.’
여명은 진심으로 바랐다.
플레이어가 기연을 손에 넣었기를, 그래서 없어진 기연 단서로 하루빨리 녀석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랐다.
여명이 그런 생각을 하며 노트를 넘기던 순간.
끼익.
닫혀있던 방문이 작은 소음과 함께 열렸다.
누군가 찾아온 건 아니었다. 문 너머에서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여명의 날카로운 감각, 정확히는 투명망토를 쓰며 익숙해진 감각이 문을 넘는 무언가를 잡아냈다.
“…사감님이 지나가신 건가?”
여명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자연스레 노트를 덮었다.
덤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품 안에 있던 투명망토를 꺼내 옆구리 사이에 끼웠다. 언제든 뒤집어쓸 수 있도록.
짧은 준비를 끝낸 그가 방문으로 향하는 동안, 보이지 않는 방문자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명이 방문을 닫자마자, 차가운 무언가가 그의 뒤통수를 지그시 눌렀다.
철컥.
익숙한 장전 소리, 익숙한 감촉.
여명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물었다.
“혹시 오해할까 봐 묻는 건데, 내가 아는 사람 맞지?”
***
성녀는 입술을 씹었다.
기습을 이용해 주도권을 가져오려던 시도가 너무 쉽게 무산된 탓이었다.
이제 이런 일에 너무 익숙해진 걸까?
뒤통수에 보이지 않는 총구가 겨눠지고 있었음에도, 여명은 침착했다.
아니, 침착을 넘어 귀찮아 보이기까지 했다.
그녀는 한 번 더 위협할 생각으로 리볼버를 쥔 손에 힘을 줬다.
물론 이번에도 별 소용 없었다. 여명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고개를 돌렸으니까.
“남자 기숙사에는 무슨 생각으로 온 거냐.”
“….”
그제야, 성녀는 아무 생각도 없이 여명을 찾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생각은 있었다.
세티랑 무슨 짓을 한 거냐, 세티랑 정확히 어떤 관계냐. 신전에서 떠들던 계집애들의 소문이 진짜냐, 그리고…
너는 날 어떻게 생각해?
하지만 그 생각 중 입 밖으로 나온 건 아무것도 없었고, 여명의 목소리만이 방을 울렸다.
“이러고 있는 거 교직원한테 걸리면 벌점이나 퇴학으로 안 끝난다. 스캔들이 될 수도 있어.”
“…스캔들? 무슨 스캔들?”
성녀가 되물었으나, 여명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의 뚱한 표정을 마주하고 나서야, 성녀는 멍청한 질문을 했다는 걸 자각했다.
성녀가 남자 기숙사에 숨어들다니. 이게 스캔들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그것도 온 세상 찌라시들이 눈을 켜고 달려들 스캔들이었다.
“긴말 안 할 테니까, 왔던 길 그대로 돌아가.”
여명은 그렇게 말하곤 성녀를 지나쳤다.
성녀는 책상으로 돌아가는 여명의 뒤통수를 잠시 바라보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여명의 충고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요 며칠간 세티에게 외면당하고, 철야 기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던 성녀는 다른 선택을 내렸다.
“…멈춰. 내 말 안 끝났어.”
“….”
“진짜로 쏠 거야. 총 맞기 싫으면 당장 앞으로 돌아와.”
어울리지 않는 협박을 끝으로, 성녀의 백옥 같은 손이 투명망토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손에 들린 리볼버는 정확히 여명의 머리를 조준하고 있었는데, 정작 총을 확인한 여명은 길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리볼버의 탄창은 텅 비어있었으니까.
아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카데미 교칙 상 학생은 날이 선 진검도 소지할 수 없었다. 성녀가 무슨 수로 실탄을 장전한 리볼버를 들고 다닐 수 있겠나.
하지만 그것도 모르고 그에게 총을 겨눈다는 건…
‘…완전히 정신줄을 놨군.’
여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투명망토를 펼쳤다. 성녀의 어머니가 준 바로 그 망토였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는 사이, 성녀는 다시 한번 총구를 들이밀며 말했다.
“내, 내가 장난하는 것처럼 보여? 응? 못 쏠 거 같냐고!”
“….”
“앞으로 와! 당장! 내 질문에 순순히… 어?”
다음 순간, 성녀의 시야에서 여명이 사라졌다.
성녀는 무슨 일인지 깨닫지 못하고 어, 어? 같은 소리를 내뱉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가 뒤늦게 투명망토를 떠올린 순간.
여명이 그녀의 뒤편에서 허리를 붙잡고, 옆구리에 끼웠다.
“자, 잠까…!”
기습당한 성녀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여명은 그대로 성녀를 들어 올렸다.
“이, 이거 놔! 놓으라고!”
허리를 붙잡힌 채 허공에 가로로 붕 떠오른 성녀는 바둥거리며 여명의 몸을 두들겼다.
이 와중에도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 걸 보니,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도 여명을 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뭐, 이제 와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지만.
여명은 그녀를 옆구리에 끼운 자세 그대로, 다른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짜악!
손바닥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강타했다.
투명망토와 교복 아래 가려진 복숭아가 빨갛게 물들고, 성녀의 입에서 짧은 비명을 튀어 나왔다.
“너, 너…! 이게 지금 무슨… 꺄악!”
성녀가 뭐라고 떠들건, 여명은 또다시 손바닥을 휘둘렀다.
어릴 적, 작업반장님이 쇠똥구리를 혼내던 방식 그대로.
짝!
“이, 이거 신성모독이야! 신성모독이라고!”
짝!
“잠깐, 잠깐만…! 내가 잘못 했… 흐악!”
짝!
“그, 그만… 흐읏!”
그렇게 성녀의 볼기짝을 때리기를 한참.
여명은 그녀가 말없이 코를 훌쩍일 때가 돼서야, 손을 멈췄다.
그는 성녀를 이대로 창밖에 집어 던질까 고민하다가, 침대 위에 그녀를 내려놨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일을 벌인 이유는 알고 쫓아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여명은 투명망토를 벗은 뒤, 아직도 훌쩍거리는 성녀를 향해 말했다.
“…정신 차렸으면 이제 똑바로 말해봐. 왜 갑자기 날 찾아온 건지.”
“….”
“요 며칠 수업에도 안 나오더니, 술이라도 빤 거야?”
성녀는 대답 대신 무언가를 고민하듯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조심스레 투명망토를 벗었다.
망토 아래에서 드러난 그녀의 얼굴에는 오래된 눈물 자국과 방금 생긴 콧물 자국이 가득했다.
…너무 쎄게 때렸나? 여명이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해 고개를 돌리는 사이, 성녀가 입을 열었다.
“…여명.”
“왜.”
“최근에… 통금 어긴 적 있어?”
통금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여명은 성녀의 질문이 세티와 관련된 질문이라는 걸 눈치챘다.
동시에 의문도 함께 따라왔다.
성녀에게 세티가 대체 어떤 존재이길래, 대뜸 총부터 들고 온단 말인가.
생각해보면, 성녀의 어머니인 모리네와 첫 만남도 이것과 비슷했다. 이걸 모전여전이라고 해야 하나?
여명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성녀가 손을 뻗어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어, 어긴 적 없지? 그지?”
“….”
여명은 거짓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진실을 말하기로 했다.
상대는 투명 망토를 가진 성녀였다. 기숙사 출석부를 뒤져서라도 진실을 찾아낼 사람이니, 어쭙잖은 거짓말은 오히려 독이 되리라.
“…어긴 적 있다.”
여명의 고백이 어지간히도 충격이었는지, 성녀는 마치 망치에 머리를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렇게 30초쯤 정신줄을 놓고 있던 성녀는, 떠듬떠듬 입을 움직였다.
“여, 여명… 그, 너랑… 세티랑… 그,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거야?”
“…그렇고 그런 사이?”
“눈밭에 발자국 남긴 사이… 아니지?”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질문. 여명은 쓴웃음을 삼켰다.
성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질문을 하기 위해, 그녀는 얼마나 많은 부끄러움을 참았을까.
여명은 안쓰러운 감정을 억누르며 품속에서 우라간의 손잡이를 꺼냈다.
유니콘의 뿔로 만들어진 막대기는 여명의 손에 들리자마자, 영롱한 빛을 내뿜었다.
동정이여 같은 소리는 지껄이지 않았지만, 유니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성녀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
“…됐냐?”
성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그레해진 뺨을 보자 죄책감이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신에게 변명했다.
성녀를 복수에 휘말리게 하느니, 이편이 백배는 낫다… 적어도 여명이 생각하기엔 그랬다.
“질문은 끝났지? 자, 이제 점심시간 끝나기 전에 돌아가.”
정작, 성녀의 생각은 다른 듯했지만.
“여명.”
“…또 뭐?”
“그, 엉덩이 때린 거 말인데… 내가 다시 바보처럼 굴면… 또 때려줄래?”
갑작스러운 고백. 예상하지 못한 말에 찔린 여명의 몸이 움찔, 굳었다.
여명의 반응을 본 성녀는 배시시 웃었다. 승자의 미소였다.
“…농담인데, 음흉하기는.”
그녀 그대로 투명망토를 뒤집어쓰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방문이 열리고 그녀가 떠날 때까지, 여명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움직일 수 있게 된 건, 웬 까마귀가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를 들은 뒤였다.
딱! 딱! 딱!
창문을 다 가릴 정도로 거대한 까마귀.
여명은 녀석의 성난 표정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