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04)
을 위한 세계는 없다-104화(104/817)
〈 104화 〉 특별 교육 (5)
* * *
***
아도길로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마탑의 마법사들이 그의 성실성을 높게 사 ‘비밀 호위’란 업무를 내릴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하지만 그의 동기들, 특히 지구행 티켓을 두고 경쟁하던 동기들은 다른 말을 하곤 했다.
성실함? 웃기고 있네. 늙은이들이 마법사도 아닌 널 호위로 뽑은 건, 네가 순종적인 개새끼라서야.
아카데미 졸업 후 미국이나 프랑스로 귀화해버린 선배들과 달리, 고향으로 돌아올 만큼 순종적인 개새끼.
아도는 반박하지 않았다. 동기들의 말이 옳기 때문에? 아니, 그에게 이유 따윈 상관없었으니까.
고향을 위해서라면야, 그깟 개새끼쯤 백번이고 천 번이고 될 수 있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상원의원의 딸과 연애 하는 것도, 아카데미 장학금과 지구인들이 은근한 눈으로 건네는 영약을 고향에 보내는 것도…
모두 참을 수 있었다. 고향을 위해서.
하지만 그런 아도조차, 이번에 내려온 명령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천여명과 전투 후, 전투 기록과 사용 무술에 대한 자세한 설명 요망.] [*주 친선 대련이 아닌 실전에 가까운 전투 기록을 가져올 것.]천여명? 테러 당시 누구 보다 앞장서서 동급생을 구한 1학년 아닌가.
그가 아니었다면 고향의 보물인 ‘그릇’과 ‘성녀’ 모두 무사하지 못했을 터였다.
감사 인사를 해도 모자랄 판에, 전투 기록을 뽑아내라니. 대체 왜?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아도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착실하게 임무를 준비했다. 천여명의 소문을 모으고, 개인적인 인적 사항을 참조해 넘어올 수밖에 없는 도발을 준비했다.
전투 상황을 녹화하기 위해 작은 특수 카메라를 구매하고, 혹시 몰라 녹화 마법이 걸린 목걸이형 마도구까지 구비했다.
문제는 1학년인 천여명과 어떻게 만나느냐는 것이었는데…
때마침, 교장님께서 천여명과 만날 자리를 주선했다. 마치 하늘이 기회를 내려주는 것 같았다.
고향에 많은 도움을 주는 교장님께 민폐가 될지도 몰랐지만, 아도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렇게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천여명을 마주한 순간.
아도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눈앞에서 본 천여명은 그가 상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으니까.
만주를 구하기 위해 용과 싸운 영웅의 풍모나, 동급생을 위해 목숨을 건 정의로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착실한 학생이라는 선생들의 평가도, 연애질에 바쁘다는 학생들의 소문도 모두 틀렸다.
아도의 눈에 보이는 그는…
‘…변경백?’
지구인을 보고 고향의 영웅을 떠올리다니. 히틀러를 보고 유태인 영웅을 떠올리는 것만큼이나 죄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었으나…어쩔 수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여명의 모습은, 그가 어릴 적에 만났던 변경백의 모습 그 자체였으니까.
겉으로는 여유와 예의를 가장하고, 속에는 날카로운 검 같은 기세를 숨긴 청년.
누군가 그를 변경백의 핏줄이라고 소개한다면,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설마? 아니, 그럴 리 없지.’
꼼꼼히 여명의 얼굴을 살피던 아도는 의심을 삼켰다.
분위기만 닮았을 뿐, 세세한 부분에서 변경백과 달랐다.
눈동자 색도 변경백보다 진했고, 머리카락은 아예 다른 색이었다.
무엇보다, 변경백께서는 핵무기의 후유증으로 더 이상 대를 이을 수 없는 몸이셨다.
자식이, 그것도 사생아가 지구에 있을 리가 있나.
더 하실 말씀이 없다면 이대로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아도가 그런 생각을 하던 사이, 천여명과 교장의 협상이 결렬됐다.
‘…지금이다.’
그는 모든 고민을 정리하고 계획대로 움직였다.
그러니까, 천여명에게 준비한 모욕을 내뱉으며 싸움을 걸었다.
아도의 계획대로 천여명은 그의 도발에 걸려들었다. 준비한 도발을 반도 쓰지 않은 시점이었다.
‘좋아… 녹화 시작.’
***
녹화용 특수 카메라가 처음으로 담은 건, 하늘로 솟구치는 아도의 왼팔이었다.
…?
그의 머리로 물음표가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잘린 부위에서 피가 쏟아졌다.
가장 늦게 찾아온 건 고통이었다. 어깨 아래 뼈와 살이 동시에 잘려 나간 고통은 아도에게 현실을 일깨워줬다.
‘죽는다.’
오랜 기간 수련해온 초인의 직감이었다.
천여명이 검을 빼앗아 휘두를 때까지,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압도적인 실력 차였다. 다음 공격 또한 반응하지 못하리라.
“살ㄹ…”
살려달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천여명의 손이 다시 한번 번쩍였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검. 그것이 향하는 짐작한 아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에겐 죽음을 마주 볼 용기가 없었으므로.
‘누이, 미안.’
아도가 마지막으로 호위 대상의 얼굴을 떠올린. 그 순간.
누군가 그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
여명이 아도의 허리에서 검을 빼앗은 바로 그 순간.
코르부스와 리메는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리메는 휴게실 바깥으로 몸을 날려 아도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정확한 판단이었다. 팔을 자르고 솟구친 검은 그대로 아도의 얼굴을 향해 떨어졌으니까.
리메는 지체하지 않고 아도의 목덜미를 끌어당겼고, 그는 아슬아슬하게 검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정신 나간 놈! 학교에서 사람을 죽일 생각이냐!”
가까스로 아도를 끌어당긴 리메가 소리쳤으나, 돌아온 대답은 말이 아니었다.
터엉!
금속판이 찌그러지는 것 같은 묵직한 타격음.
타격음의 주인은 코르부스였다. 어느새 커다란 수인으로 변신한 그녀는, 여명의 옆구리를 차버렸다.
여명은 그대로 붕 떠올랐다가, 공중에서 자세를 잡아 착지했다.
탁.
어마어마한 공격을 받아낸 것치고는 가벼운 발소리.
여명은 담담한 표정으로 옷을 털고, 코르부스를 향해 물었다.
“코르부스. 뭐 하는 짓입니까?”
코르부스는 부리를 탁! 부딪치며 말했다.
“그대야말로 뭐 하는 짓이오? 사람을 죽일 뻔했소.”
“….”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주먹으로 입술을 꾹 누른 채 뭔가를 고민하다가, 눈살을 팍 찌푸렸다.
“…죽이면 안 됩니까?”
검은 진주처럼 번뜩이던 코르부스의 눈이 가라앉았다.
“당연히 안 되오.”
“먼저 도발한 건 저쪽입니다.”
“…이 세상천지 누구도 함부로 입을 놀렸다는 이유로 죽어선 안 되오. 그러면 일주일 내로 지구 인구가 절반도 남지 않을 테니 말이오.”
“….”
“천여명. 내 눈을 보시오.”
두 사람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얽히고, 코르부스는 여명의 금빛 눈동자 아래 숨겨진 무언가를 찾아냈다.
그녀는 한숨 쉬며 말했다.
“내가 저번에 그대의 유파를 물었지. 기억하시오?”
“…예, 주가시빌리냐고 물으셨죠. 다시 말하지만, 전 그런 유파와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아니, 상관있소.”
코르부스는 뚜둑, 어깨를 풀며 말을 이었다.
“과거, 스탈린과 공산주의자들은 효율적인 무술에 아주 관심이 많았소. 더 강하고, 더 빠르게 사람을 죽이는 무술.”
“…”
“사람 죽이는 법만 연구하다 보니, 철학이나 사상과 상관없는, 살기 덩어리 무술이 튀어나왔소. 차원문 너머의 기사들조차 겁에 질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무술이었지. 그 무술은…”
“…역사 수업은 관심 없습니다.”
여명이 그의 말을 끊었지만, 코르부스는 손사래를 치며 계속 부리를 움직였다.
“거참, 좀 들어보시오. 무술이란 게 어디 찍어낸다고 만들 수 있는 물건이오? 공산주의자들의 무술은 자연히 부작용이 따라왔소.”
부작용? 여명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코르부스의 부리를 바라봤다.
“살기를 키우기만 할 뿐, 살기를 조절할 줄 모르니 그 무술을 익힌 자들은 쉽게 사람을 죽이게 되었소. 처음에는 적에게만, 다음에는 거슬리는 자들을, 마지막에는 눈에 보이는 누구에게나.”
그 순간, 여명은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무언가를 이해한 것처럼.
“주가시빌리는 그 살기를 억누르기 위해 만들어진 무술 유파요. 지금은 거의 사장됐지만…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뭔지 아시오?”
“…예상은 갑니다.”
“여명, 지금 그대의 상태는 주가시빌리를 익히기 전 공산주의자와 같소. 살기를 억누르지 못해 터지기 직전이란 말이오.”
여명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검을 쥔 손을 쥐락펴락하며, 조용히 코르부스의 말을 경청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내 예상은 이러하오. 그대가 배운 무술 중, 오직 상대를 죽이기 위한 무술이 몇 가지 있을 것이오.”
여명은 누가 말해주지 않았음에도, 파순의 무술을 떠올렸다. 아지랑이 같은 마나를 뿜어내 몸을 강화하는 무술과 장풍을 응용한 약식 검기.
“그것들을 효율적이란 이유로 그것을 마구잡이로 사용했을 것이고… 아마 그 무술들의 진의를 모르거나,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오. 그러다 감정이 격해지면, 풀 생각은 안 하고 꾹꾹 참았겠지.”
“…”
“내 예상에 틀린 점이 있소?”
여명은 대답할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전부 맞는 소리였으니까.
그가 입을 다문 사이, 코르부스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마무리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그대는 살기에 잡아먹힐 것이오. 옛 공산주의자 초인들이 그러했듯이.”
여명은 땅에 떨어진 아도의 팔과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을 번갈아 본 뒤, 입술을 씹었다.
“…제가 어쩌면 되겠습니까?”
“의외로, 간단한 해결법이 있소. 내가 그대의 스승이 되어주기로 했으니, 이참에 알려드리리다.”
코르부스는 주먹과 목을 꺾어 몸을 풀었다.그리고 두 다리로 땅을 통통 튀다가, 대뜸 여명을 향해 부리를 열었다.
“우선, 살기를 좀 빼야 하오.”
어떻게 말입니까? 여명이 질문하려는 순간, 코르부스가 땅에서 뛰어올랐다.
하늘 위로 날아오른 거대한 까마귀 수인은…
그대로 여명을 향해 낙하했다.
“처맞으면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