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10)
을 위한 세계는 없다-110화(110/817)
〈 110화 〉 제자를 위한 가르침
* * *
변하는 건 쉽다.
되돌리는 게 어렵지.
『2차 서부 개척 비망록 어느 숲 주민의 유언』
***
로드 하우 아카데미의 모든 재학생들이 기다리던 아침은 봄의 끝자락과 함께 찾아왔다.
여명에 물드는 푸르스름한 하늘 아래, 어린 나뭇잎들이 묵묵히 찬 바람을 견뎌내고 아직 봄을 놓지 못한 꽃들이 이슬을 흘리는 시간.
학생들이 깨어나기엔 이른 시간이었지만, 1학년 기숙사의 학생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일어나 있었다.
그러나 아침 특유의 어수선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새벽마다 수련실로 달려가던 무술과 학생들도, 명상 준비에 바쁠 마법과 학생들도 제각기 서류 한 장과 씨름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특별 수업 신청서]오늘부터 교무실에 제출할 수 있는 종이 한 장.
그 위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졸업생들과 학계의 저명인사, 그리고 유명 초인들의 이름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떨리는 목록이었으나, 학생들은 쉽사리 신청서를 적지 못했다.
어느 교사의 수업을 들어야 하나 같은 행복한 고민 때문에? 아니, 학생들을 머리를 아프게 하는 고민은 따로 있었다.
화려한 서류의 맨 아래, 아주 작게 적혀 있는 한 줄의 문구.
특별 수업 참가 인원의 선발권은 각 교사의 재량에 맡긴다.
누가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학생들은 그게 무슨 뜻인지 단박에 이해했다.
교사가 학생을 선택한다. 즉, 선택받지 못한 학생은 그대로 탈락한다.
아카데미에서도 배려랍시고 추가 신청이 가능하게 해놨지만, 그래 봤자 다섯 번이 한계였다.
만에 하나, 5지망까지 전부 선택받지 못한다면?
말할 것도 없었다. 잘해봐야 남는 교사에게 가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특별 수업이 통째로 물 건너가겠지.
그쯤 되자, 학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눈치 싸움을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더 유명한, 더 배우고 싶은 초빙 교사에게 뽑히기 위한 치열한 눈치 싸움.
어느 교사에게 학생이 몰리고, 어느 교사에게 몰리지 않는가?
학년마다 선호하는 교사를 가늠하고, ‘성녀’나 ‘그릇’처럼 당연히 뽑힐 학생들을 피하고, 학생들이 몰릴 1지망 교사들을 선별하고…
그렇게 머리를 굴리고 굴리다 보니, 신청일 아침까지 아무 선택도 못한 학생이 즐비했다.
아 젠장, 미켈레 특강은 전 학년이 몰리겠네.
왕바오궈의 실전 수업은 확인된 건만 세자릿수야.
마법사 지망생들은 왜 호아나 툴레님 수업에 신청서 넣냐? 니들 사제할 거야?!
학생들은 기숙사 복도, 휴게실, 로비에 모여 각자 정보를 교환하거나, 걱정을 토해냈다.
그리고 그러던 중, 누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천여명은? 걔는 누구한테 신청한대?
처음 입을 연 녀석은 잠깐 분위기를 환기할 생각이었겠지만, 답 없는 고민에 빠져 있던 학생들은 순식간에 대화 주제를 갈아탔다.
넣고 싶은데 넣었겠지. 까놓고 어느 교사가 걔를 거절하겠냐?
테러 막던 거 생각하면… 야, 나라도 뽑겠다.
이러다 교사들끼리 서로 제자 삼겠다고 싸우는 거 아냐?
학생들은 저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천여명에 대해 떠들어댔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용병 시절 이야기부터, 실력과 무술, 확인되지 않은 연애담까지.
지켜보던 사감이 헛기침할 때가 돼서야, 학생들은 천여명에 대한 이야기를 멈췄다.
아니, 모든 질문의 해답을 내놨다는 편이 더 정확하리라.
그냥 직접 가서 물어보면 되는 거 아냐? 뭐 대단한 비밀을 물어보는 것도 아닌데.
누군가 그렇게 말했지만, 정작 천여명의 방을 찾아가는 녀석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천여명이랑 친한 사람?
마법과랑 신앙과는 아웃. 무술과에서 나와야지.
무술과에서도 딱히… 맨날 그 누구냐, 룸메이트랑 이름 이상한 여자애하고만 다니잖아.
짧은 고민이 이어지던 가운데, 로비에 앉아 있던 누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거 참, 존나게 씨부렁대네.”
웨슬리. 여명과 방 쟁탈전을 벌였던 그 까까머리의 남학생은 탁자를 쾅 내려치며 말했다.
“야! 내가 물어보고 올 테니까, 뒷담은 여기까지 해라. 고추 새끼들이 쪼잔하게.”
그의 말을 들은 학생 몇몇이 뒷담 한 적 없다느니, 또 저런다느니 같은 소리를 지껄였지만, 굳이 웨슬리의 앞을 막지 않았다.
모두가 궁금해하는 걸 나서서 물어보겠다는데, 막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사감과 학생 모두가 그의 등을 바라보는 가운데, 웨슬리는 천여명의 방으로 향했다.
***
기숙사 분위기와 달리, 천여명의 방은 조용했다.
아침 햇볕이 조심스레 창가 너머를 훔쳐봤지만, 의자에 앉아 서로를 마주 보는 두 소년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햇볕 아래 침묵이 길어지던 어느 순간, 여명이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실망이군. 바오닉.”
이름이 불린 소년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는 여명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항변했다.
“나, 나도 나름 노력한 거야! 이 넓은 아카데미에서 제국 기사 검을 가진 녀석을 찾아내라니.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여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그시 바오닉을 노려봤다.
햇살 아래 드러난 금빛 눈동자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살기를 느낀 바오닉은 침을 삼키며 말했다.
“…쉬운 일이 아니지만, 반드시 찾을 게. 그, 그래도 조금만 더 힌트를 주면…”
힌트라, 여명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으며 플레이어에 대해 떠올렸다.
녀석의 조롱, 휘두른 검, 그리고 게임 속이라고 지껄이던 말까지.
“녀석은 기연을 노릴 거다.”
“…기연?”
“그래, 아카데미에 있는 기연이라면 뭐든지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아. 특히… 게임 속에서 나왔던 기연은.”
여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오닉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 떠올린 표정이었다.
“뭔가 알고 있는 거냐?”
“저… 그게… 저번 테러 이후, 2학년 본관에 있는 기연들이 몇 개 사라졌어.”
“…그렇게 중요한 사실을 왜 여태 말하지 않았지?”
“그, 그야 난 당연히 네가 먹은 건 줄 알았지.”
말을 마친 바오닉은 살며시 여명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여명의 시선은 그를 향하지 않았다.
그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창문 너머, 2학년 본관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2학년… 역시 1학년에는 없었나.’
추적망이 한 번 더 좁혀졌다. 여명은 가슴속에 꿈틀거리는 살기를 억누른 뒤, 책상으로 손을 뻗었다.
“2학년이 가장 많이 참가하는 특별 수업이 뭘까. 예상해 봐.”
그는 책상 위에 놓인 특별 수업 신청서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어… 아마 전 제국 기사 달루안 경의 수업이겠지? 2학년에는 제국 황자가 있으…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여명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신청해라. 달루안 경의 수업.”
“…내가?”
“그래, 네가.”
바오닉은 무어라 말하려다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반박하고 싶은데, 반박할 거리가 떠오르질 않은 탓이었다. 특별 수업부터가 그가 알던 기존 스토리에 없는 내용이었으니까.
그가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있자, 여명이 특별 수업 신청서를 들이밀며 말했다.
“그 대신, 아카데미에 있는 기연 하나를 네게 주마.”
“어… 정말?”
“정말로.”
그 순간, 바오닉의 머릿속에 있던 고민이 싹 날아갔다. 그는 여명에 손에 들린 특별 수업 신청서를 냉큼 낚아챘다.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다?”
“제국 기사 검을 가진 놈을 찾으면 더 한 것도 주마. 잔말 말고 신청이나 해.”
확답을 받은 바오닉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뭘 달라고 하지? 무술?
아니, 아직 어느 쪽에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잖아. 이럴 때는… 그래, 영약을 달라고 하자.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바오닉은 달루안 경을 비롯해 제국 황자와 관련된 교사들에게 추가 지원을 넣었다.
여명이 시킨 일은 아니었지만, 혹시라도 달루안 경의 수업에서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자, 다 끝났어.”
어느새 신청서 작성을 끝낸 그는 보란 듯 신청서를 흔들었다.
마치 개가 목줄을 자랑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는 부끄럽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 수 있다면 꼬리를 흔드는 것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으므로.
“…좋아. 혹시 원하는 기연이 있나? 특별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구해주지.”
다행히, 여명은 좋은 주인이었다. 아직 까지는.
“그, 그럼 영약 하나만 구해주면 안 될까? 내가 아직 완벽한 초인이 아니라서…”
“영약?”
“…그 뭐시냐, 북쪽 섬으로 가는 다리 밑에 있는 대왕 조개 내단이면 충분할 거 같은데.”
“그 정도라면야, 오늘 당장이라도 구해주마.”
여명은 긍정의 의미로 바오닉의 어깨를 두들겨 준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바오닉이 묘한 눈으로 그의 등을 바라보고, 그가 특별 수업 신청서를 작성하려는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야, 여명! 나 웨슬리인데, 잠깐 들어가도 되냐?
***
로드 하우 아카데미 1학년 여자 기숙사 내부, 학생들을 위한 간이 신전.
학생들에게 모르닥의 교리를 가르치는 사제, 나츠카와는 황당함과 당황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서, 성녀님. 제발요!”
“싫어! 싫다고!”
그녀를 당황하게 한 건 존경해 마지않는 성녀님이었다. 정확히는, 성녀님의 태도가 문제였다.
“성녀님 제발, 특별 수업은 호아나 경의 수업을 신청하셔야 해요. 성국에서 직접 내려온 방침이라고요!”
“꼰대들은 여기 없잖아! 그딴 방침은 무시해도 돼!”
“꼬, 꼰대라니. 추기경님을 그렇게 부르시면…”
“꼰대를 꼰대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불러? 위에서 뭐라고 말했건 간에, 호아나 할머니 수업은 안 들을 거야. 절대, 절대로!!”
성녀는 그렇게 말하며 신전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새하얀 사제복이 출렁거리고, 새하얀 어깨 망토와 머리카락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침착을 미덕으로 삼는 흑색의 모르닥을 섬기는 사제가 아니었다면, 기절해 버렸을지도 모를 만큼 충격적인 광경.
나츠카와는 눈을 질끈 감으며 설득을 이어 나갔다.
“…테러 이후, 성녀님을 성국으로 불러들이자는 여론이 얼마나 많았는지 아세요?”
“….”
“호아나 경을 보낸 건 꼰… 아니, 추기경님들의 배려라구요. 성기사라도 옆에 있어야, 신도님들이 안심하실 거 아니에요?”
아카데미에 다닐 수 있도록 꼰대들이 베푼 배려.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기에, 성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츠카와의 부탁을 들었느냐면, 그것도 아니었지만.
“…하지만 꼭 호아나의 수업을 들을 필요는 없잖아.”
“성녀님….”
여기서 타협점을 찾는다고? 나츠카와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성녀님을 걱정하는 신도님들을 생각해서라도…”
그녀가 간절한 목소리로 설득했으나, 성녀는 들은 척도 안 했다.
오히려 가슴팍에 특별 수업 신청서를 쏙 집어넣은 뒤, 어디 가져가 보라는 듯 입을 다물어 버렸다.
“…성녀님. 꼭 이러셔야겠어요?”
성녀는 묵묵부답이었다. 안대에 가려진 눈동자에 무슨 감정이 담겨 있는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대화로 풀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나츠카와는 한숨을 내쉰 뒤, 휴대폰을 들어 어딘가로 연락했다.
네… 성녀님께서… 예, 지금 당장 와주셔야… 네, 빨리… 부탁드려요…
통화를 훔쳐들은 성녀가 뭔가 불길함을 느끼고 신전을 벗어나려고 했으나, 나츠카와는 그보다 한발 앞서 문을 닫아버렸다.
“어딜 도망가시려구요.”
“아, 진짜! 그냥 좀 보내줘!”
“어허, 기다리세요.”
유일한 출구가 막힌 이상 투명망토도 소용없었기에, 성녀는 신전 의자에 앉아 입술을 삐쭉거렸다.
그렇게 성녀를 신전에 가둬두길 한참.
똑똑.
누군가 신전의 문을 두들겼다.
아직 계십니까?
걸걸한 여장부의 목소리였다.
나츠카와는 반색하며 문을 열었고, 성녀는 기겁하며 의자 뒤에 숨었다.
“호아나 경. 와주셨군요.”
신전으로 들어선 건 백발이 성성한,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였다.
하지만 그녀를 보고 ‘늙었다’는 감상은 느낄 수 없었다.
몸에서 뿜어내는 기세는 물론이고, 오른 눈에서 입술까지 이어지는 커다란 흉터와 보디빌더를 연상시키는 탄탄한 몸매 앞에서, 나이는 그저 숫자에 불과했으니까.
“성녀님! 오랜만입니다!”
호아나 툴레. 은퇴한 전 성기사단 부단장은 성녀를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성녀는 기겁하며 도망가려 했지만, 완성된 성기사의 속도를 앞지르지는 못했다. 성녀는 근육질 몸에 붙잡혀 그대로 포옹당했다.
“성녀님께선 만날 때마다 몰라보게 자라시는군요!”
성녀는 포옹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악하다가, 힘으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닫곤 몸에서 힘을 쭉 빼고 순순히 포옹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그녀와 감동의 포옹을 이어나간 호아나는, 껄껄 웃으며 그녀를 다시 자리에 내려놨다.
“성녀님, 나츠카와에게 다 들었습니다. 제 호위가 싫다고 떼를 쓰셨다면서요?”
“…떼쓰진 않았는데.”
뒤에서 지켜보던 나츠카와가 기가 찬 표정을 지었지만, 성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호위를 받기 싫다는 건 아냐… 그냥, 특별 수업을 호아나에게 쓰고 싶지 않을 뿐이예요.”
“어째서요?”
“그건…”
성녀는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오물거렸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은 수업을 듣고 싶어서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성녀였고, 상대는 성기사였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조금 다른 식으로 대답했다.
“친구… 랑 같은 수업 듣고 싶어서요.”
“아하, 친구 때문이었군요. 하지만 성녀님, 동급생 친구라면 특별 수업이 아니어도 충분히 같이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다른 과라서 함께 듣는 수업이 많지 않아요. 특별 수업은 그런 게 없으니까, 그래서…”
“흐음…”
호아나는 눈썹을 들어 올리며 나츠카와를 바라봤다.
‘그 친구가 누구요?’ 라는 뜻이 담긴 표정이었으나, 나츠카와는 ‘저도 모릅니다’ 라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짧은 정적이 오가고, 호아나는 금세 다른 해답을 내놨다.
“그럼 친구분들에게 제 수업을 들으라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
“아니, 그건…”
“왜요, 친구분들께선 제 수업이 싫답니까?”
호아나는 껄껄 웃으며 물었다. 성녀는 잠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그건 아니지만… 내 멋대로 호아나 수업을 들으라고 하면 민폐잖아요.”
발그레해진 볼, 조심스러운 말투,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그것을 본 호아나의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냉철한 성기사의 얼굴로 되물었다.
“…대단한 친구분이신가 보군요.”
성기사의 말에는 의심이 가득했으나, 눈치 없는 성녀는 그 말을 단어 그대로 받아들였다.
“응, 대단한 사람이야.”
“….”
연애 경험이 없는 나츠카와는 성녀님의 대답을 들으며 한숨을 쉬었지만, 호아나는 달랐다.
그녀는 어떤 성기사가 사랑에 눈이 멀어 성검과 미래를 포기하는 모습을 본 적 있었으므로.
지금 성녀의 표정이 그 성기사의 그것과 닮아 보이는 건… 그녀의 착각일까, 아니면 단순히 핏줄의 우연일까.
어느 쪽이건, 호아나에게는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성녀님.”
그녀는 무릎 꿇어 성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성녀님께서 싫다고 하신다면, 저도 특별 수업을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건 성녀님의 의지니까요.”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나츠카와가 화들짝 놀랐지만, 호아나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성녀님의 안전 또한 중요합니다. 성녀님의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 채 물러날 수는 없습니다.”
“어… 그런 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 사람, 다른 건 몰라도 날 위한 마음은 진심이니까.”
“…성녀님을 위하는 마음이요?”
“응.”
다음 순간, 호아나의 머릿속으로 한 청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작 성녀의 머리에 떠오른 건 세티의 얼굴이었지만… 곧이어 여명을 떠올린 성녀는 안대에 가려진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성녀의 마음의 알 리 없는 호아나는, 딱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아나?”
“성녀님, 강철은 뜨거워졌을 때 두들겨야 하는 법입니다.”
“…뭐?”
“지금 당장 그 친구에게 가시지요. 제 눈으로 직접 봐야겠습니다.”
“아니, 호아나, 잠깐…!”
그제야 호아나의 목적을 깨달은 성녀가 도망치려 했지만, 호아나가 그녀의 손을 붙잡는 게 조금 더 빨랐다.
“자, 어서 가시지요.”
“어, 어디로요?”
“당연히 남자 기숙사 아니겠습니까?”
“아니, 아니, 지금 뭔가 오해를…! 호아나! 잠깐만…!”
성녀가 무어라 반항했지만, 호아나는 즉시 그녀를 끌고 신전 바깥으로 나섰다.
맥없이 끌려가는 성녀의 등을 보며, 신전에 남은 나츠카와는 한숨과 함께 기도했다.
“다섯 신이시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