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17)
을 위한 세계는 없다-117화(117/817)
〈 117화 〉 1장 보스, 불청객, 그리고…
* * *
차원문을 보유한 체결국은 여타 차원문이나 차원 마법, 또는 그러한 차원 고정장치의 권리를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누구에게든 양도하지 않는다.
『차원문 확산금지에 관한 조약 – 1조』
***
여명은 기숙사 침대가 불편했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노라면, 오라는 잠은 오지 않고 애꿎은 상념이 머리를 채우는 까닭이었다.
침대가 몸에 맞지 않아서? 아니, 그런 건 아니었다.
최고급 매트릭스도, 사감들이 매주 세탁해주는 침구류도 뭐 하나 부족한 점이 없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런 편안함이 여명을 불편하게 했다.
몸이 편하면 편할수록 그의 정신은 청소부 시절의 낡은 숙소를 그리워했으니까.
습기가 올라오는 바닥과 싸구려 비닐 장판, 얼룩덜룩 세월을 품은 벽지와 드문드문 곰팡이가 피어있던 천장까지.
아카데미 기숙사와 비교하면 싸구려나 다름없는 곳이었지만, 여명은… 아니, 쇠똥구리는 그곳을 추억했다.
바닥에 깔던 후줄근한 이불도.
청소부 형들의 짓궂은 장난도.
작업반장님의 방에 산처럼 쌓인 책들도.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TV 속 다큐멘터리도…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그 모든 일상들이 구슬픈 상념이 되어 아른거린다.
그렇게 침대에서 뒤적거리기를 한참.
문뜩, 작업반장님이 검은 모르닥의 신도셨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다섯 신의 신도 대부분이 그러하듯, 그분께서는 성녀를 참 좋아하셨더랬다.
정확히는 전대 성녀님이었지만, 아마 지금의 성녀도 좋아하시지 않았을까.
아니, 분명 좋아하셨을 거다.
대체 누가 그녀를 싫어하겠는가? 그 푼수 같고, 솔직하고, 선량한 성녀를.
다섯 신의 신도가 아니라도, 정상인이라면 누구나 그녀를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상인이라면.’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나간 여명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모두가 잠든 시간이라는 걸 증명하듯, 방은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귀에 들리는 거라곤 바오닉의 코 고는 소리뿐.
지금이라도 다시 잠을 청해야 할까.
여명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그대로 벽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다시 성녀에 대한 생각을 이어나갔다.
정확히는, 그녀가 보여줬던 예지를 떠올렸다.
‘…1년, 혹은 2년 뒤 미래.’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성녀가 보여준 예지는 충격적이었다.
피와 불, 시체와 잿더미.
국회의원들을 전부 살해한 것도 모자라, 여의도 전체를 불태우다니.
이 얼마나 통쾌하면서… 실망스러운 광경이란 말인가.
예지로 볼 수 있었던 건 순간에 불과했지만, 그 광경을 본 여명은 확신했다.
‘세티의 계획이 뒤틀렸다.’
만약 그녀의 계획대로 정부 주요 인사들을 쓸어버렸다면, 여의도를 불태울 이유가 전혀 없었다.
대통령이 있는 경무대나 정부 청사, 특히 청소부 길드를 몰래 운영하던 녀석들을 불태워도 모자랄 판에… 여의도라니.
대체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세티와 자신이 수많은 민간인을 죽이고 한국과 전면전을 벌이는 것일까?
그리고 무엇보다, 미래의 자신은 왜…
‘그대로인 거지.’
성녀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여명은 알 수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이었으니.
미래의 그는, 현재의 자신보다 나을 게 없었다.
기껏 해봐야 머리카락이나, 키가 좀 자랐을 뿐.
체내에 품고 있는 마나는 물론이고, 몸의 근육이나, 느껴지는 기세조차 성장하지 않았다.
특히 눈에 걸리는 건 죽은 국회의원들의 시체에 남아 있는 혜성검의 흔적이었다.
거기서 느껴지는 무술의 깊이는, 오히려 현재의 자신보다 부족했다.
마치, 퇴보한 것처럼.
‘…미래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당장이라도 성녀에게 달려가 다시 미래를 보여달라 하고 싶었지만, 예지는 만능이 아니었다.
비슷한 미래를 볼 거란 확신도 없었고, 무엇보다 성녀의 체력이 문제였다.
예지를 끝내고 휴게실을 나선 뒤, 그녀는 혼자 걷는 것조차 힘겨워했다.
그에겐 별일 아니라고 둘러댔지만, 척 보면 척이었다. 적어도 며칠은… 마나와 체력을 회복해야 하리라.
“…하아.”
그는 복잡한 머리를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답답함에 검이라도 휘두르고 싶었지만,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다.
여명은 물이라도 마실 생각으로 침대 옆 작은 탁자에 놓인 물병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가 컵에 물을 따르려던 그 순간.
병에서 흘러내리던 물이 그대로 정지했다.
마법이나, 착각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
기이한 일이었으나, 여명은 한점의 놀람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방의 어둠 너머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온 까닭이었다.
곧이어 방을 채운 어둠 너머에서, 익숙한 무언가가 슬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드레스 자락처럼 늘어진 그림자 위로, 일렁이는 어둠.
여명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그것의 이름을 불렀다.
“…미그니움.”
***
『나의 간택자,현실에서는 처음 만나는구나. 』
미그니움의 말을 듣는 순간, 여명의 등골이 차갑게 식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익숙한 탓이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미그니움의 원래 목소리가 아니라…세티의 목소리와 똑같다는 점.
“그 목소리…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여명은 분노와 두려움이 뒤섞인 눈으로 어둠을 노려봤다.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모든 고민이 일제히 사라지고, 최악의 가정이 심장을 두들겼다.
“…대답해. 미그니움.”
미그니움은 소리 없이 웃었다.
『대답이라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 허나, 첫 번째가 그걸 원할지 모르겠구나.』
“…첫 번째라고?”
『그대에게 운명을 바친 첫 번째.』
이해할 수 없는 선문답을 끝으로, 미그니움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또각.
어둠이 꿈틀거리고, 창가를 비추던 달빛이 기겁하며 도망갔다.
그녀가 여명의 코앞까지 다가오자, 깊은 그림자 아래 감춰져 있던 얼굴 일부가 드러났다.
“….”
여명은 말을 잃었다.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떨리는 눈동자로 미그니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대의 반응이 내 상상을 뛰어넘는구나. 아주 만족스러워. 나무와 매보다 먼저, 양을 택하는 게 정답이었을 줄이야.』
미그니움은 간드러지게 웃었다. 세티의 목소리, 세티의 얼굴로.
여명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미그니움의 얼굴을 매만졌다.
부드러운 볼의 열기가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꿈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현실의 감촉.
“어떻게…?”
『그 또한 첫 번째에게 듣거라. 나는 자비로운 주인이니, 종복의 처음을 존중하노라.』
여명은 그제야, ‘첫 번째’가 세티를 뜻하는 단어라는 걸 깨달았다.
“운명을 바친 첫 번째…?”
그 단어를 되새기는 순간 불현듯, 만주에서 봤던 빛의 구슬과 최근 세티의 미래를 볼 수 있게 됐다던 성녀의 말이 연달아 떠올랐다.
모든 것들이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여명은 침을 삼켰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에 쌓이고, 목이 바짝 말랐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미그니움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눈치챘는가? 그대를 위한 첫 번째 운…』
그녀가 말을 내뱉던 찰나, 방을 채우고 있던 어둠이 살짝 흔들렸다.
『…이런, 또 얼마 없는 시간을 낭비해버렸구나. 그대와 만나면 항상 이렇다.』
“….”
미그니움은 한걸음 뒤로 물러나, 다시 어둠 속에 자신을 감췄다.
살랑거리는 그림자 드레스 자락과 세티를 닮은 외곽선만이 그녀의 존재가 꿈이 아니라는 걸 증명했다.
『내게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으니, 간택자여, 기탄없이 그대에게 조언을…』
어째서인지, 미그니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녀는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누군가의 말을 경청하는 것처럼 귀를 쫑긋거렸다.
묘한 침묵이 이어지길 잠시.
미그니움이 기쁜 목소리로 침묵을 깼다.
『…오, 갸륵하기도 하지.』
“미그니움, 아까 전부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계획 변경이란 소리다. 간택자여, 조언이 아니라 선물을 주겠노라.』
미그니움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미소를 가득 띤 채로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책상 아래 있던 여명의 개인 가방이 열리고, 가방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무언가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중, 삼중으로 자물쇠가 잠겨 있는 작은 상자.
여명이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는 사이, 상자가 열리며 안의 내용물이 바깥으로 드러났다.
영롱한 빛깔을 내뿜는 물약 한 병.
‘…각성의 물약.’
낮은 확률로 일반인을 마나 사용자로 만들어주는 비약이자, 한국 정부가 네크로맨서에게 자국민의 시체를 바친 원인.
그가 인천에서 네크로맨서와 정부 인사를 습격해 얻은 전리품이었다. 나중에 다른 영약으로 교환할 생각으로 모셔두고 있던 물건인데…
저걸 갑자기 왜?
여명의 눈매가 가늘어지는 순간, 미그니움은 물약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기며 물었다.
『간택자여, 그대는 즐거움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보이지 않는 힘이 병뚜껑을 열기 무섭게, 화악 청량한 약 냄새가 퍼졌다.
『정답은…힘이다. 그것도 압도적인 힘.』
그녀는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고, 여명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가 여태껏 운명을 바꿀 수 있었던 이유는 미그니움이 준 재능과 그 재능에서 비롯된 힘이었으므로.
『그러니 이 순간, 그대와 나의 즐거움을 방해하는 모든 고민과 방해물들을 치워버리기 위해, 더 많은 힘을 하사하겠노라.』
여명이 거절의 의사를 밝히기도 전에, 미그니움이 대뜸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푹 찔렀다.
말릴 틈도 없는 기습적인 행동.
다행인지 불행인지, 세티의 봉긋한 가슴 사이에선 피 대신 어둠이 흘러내렸다.
잠시 후, 미그니움이 갈라진 가슴 사이에서 세 개의 보석을 꺼냈다.
여명은 각성의 물약만큼이나 영롱하게 빛을 내뿜는 보석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세 개 모두 크기는 제각각이었지만, 똑같은 마나를 품고 있었으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세티의 마나.
“그거 설마…”
『그 설마가 맞노라. 이것들은 모두 첫 번째의 가능성이다. 지구인들은 각각 무술, 신성, 마법이라 부르는 가능성.』
“….”
뚜껑이 열린 각성의 물약과 세티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보석.
여명은 다음에 벌어질 일을 예상하고 즉시 몸을 움직였다.
역시나, 미그니움은 물약 안에 가능성을 집어넣으려 했다.
하지만 보석이 물약 안에 들어가기 직전, 여명은 아슬아슬하게 미그니움의 손을 붙잡을 수 있었다.
“…이게 뭐 하는 짓거리야?”
『보면 모르겠는가? 그대에게 가능성을 하사하는 중이다.』
“세티의 가능성을 빼앗아서? 지랄하지 마.”
여명이 으르렁거리듯 말했으나, 그녀의 입가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정말로 필요 없는가? 예지로 본 미래를 바꿀 가장 쉬운 방법인데도?』
미그니움은 유혹하듯 속삭였다.
바로 조금 전까지 그의 머리를 꽉 채우고 있던 고민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듯이.
『고민하지 말고 전부 손에 넣거라. 첫 번째의 모든 것은 그대의 것이다.』
“….”
『타고난 가능성도, 가슴에 들끓는 감정도, 매 순간 내뱉는 숨결과 머리카락 한 올까지… 전부.』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같잖은 유혹에 넘어가기엔, 그에게 세티란 존재가 너무 소중했으니까.
그는 그대로 미그니움의 손에서 세 개의 보석을 빼앗아, 세티의 가슴에 되돌렸다.
가장 먼저 폭풍처럼 난폭한 마나를 품은 가장 큰 보석을, 그다음으로 미그니움과 닮은 어둠에 휩싸인 중간 크기의 보석을 차례대로 가슴 속 구멍에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작은 보석을 되돌리려는 순간…
미그니움의 발이 그의 다리를 걷어찼다.
퍽!
여명의 두 다리가 허공에 떠오를 정도로 강렬한 발차기.
설명이 필요 없는, 완벽한 비각술이었다.
“…!?”
여명이 엉덩방아를 찧기 직전, 미그니움…아니, 세티가 그의 손에서 보석을 가로챘다.
그녀는 그대로 각성의 물약 속에 보석을 넣어버렸다. 퐁당, 보석이 물약 속에 빠지는 소리가 여명의 귓가에 생생히 울렸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여명이 그녀를 노려봤지만, 미그니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물약을 흔들었다.
보석이 물약 속에 녹아 사라질 때까지, 계속.
“야! 홍세티!”
여명이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을 땐, 보석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너 진짜…”
그가 무어라 더 말하려 했으나, 미그니움은 그 이상의 말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짓 한 번에 주변 일대의 어둠이 짙어지며 여명의 몸을 붙잡고, 입을 막아버렸다.
『이 즐거운 광경을 조금 더 보고 싶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다 됐구나.』
짙은 아쉬움이 느껴지는 목소리를 끝으로, 미그니움은 여명에게 물약을 넘겼다.
『힘은 즐거움이니, 앞으로도 계속, 더 강한 힘을 추구하거라.』
『 나의 간택자.』
***
쨍그랑!
허공에서 추락한 물병이 깨지며 단말마를 내질렀다.
“뭐, 뭐야?”
갑작스러운 소리에 조금 전까지 코를 골고 있던 바오닉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반쯤 감긴 눈으로 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어둠 속에 서 있는 여명을 확인하곤 눈을 깜빡였다.
기묘한 빛을 내뿜는 물약과 그것을 내려다보는 여명의 진지한 얼굴.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바오닉은 다시 침대에 고개를 처박았다.
뭔지 모르겠지만… 끼어들지 않는 게 좋아 보였으니까.
그는 여명과 물약, 그리고 창문 너머에서 일렁거리는 어둠을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