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18)
을 위한 세계는 없다-118화(118/817)
〈 118화 〉 1장 보스, 불청객, 그리고… (2)
* * *
***
수평선 너머로 여명이 떠오르는 이른 아침, 김관형 장관은 창가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카데미 VIP룸에서는 바라보는 일출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벌써 며칠째 아카데미에 처박혀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그로선, 저 아름다운 풍경조차 불쾌하게만 느껴졌다.
‘….’
잠시 일출을 바라보던 장관은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담배를 입에 물었다.
후우.
국산 담배의 진한 연기로 폐를 채우고 나서야, 그는 침착하게 지난 행보를 되짚어 볼 수 있었다.
‘…뭐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군.’
최근 정부의 일 처리를 정리하자면, 실패의 연속이란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네크로맨서와의 거래가 파토난 것부터, 만주 사태, 그리고 아카데미를 정치적으로 고립시키려던 외교적 노력까지.
실패, 실패, 또 실패였다.
가장 먼저, 인천에서 네크로맨서와 한국 정부의 거래를 생각해보자.
정부는 아직까지 거래를 습격한 놈을 찾지 못했다.
개인인지, 아니면 집단인지…오리무중도 이런 오리무중이 없었다.
오죽하면 국정원조차 재수 없게 차원문 너머의 테러조직이 엮인 게 아니겠냐 는 식의 헛소리를 내뱉을 정도였다.
‘좆같은 월급 도둑놈들.’
뒤이은 만주 사태라고 다르지 않았다.
거기에 들어간 비자금이 얼마고, 인력이 몇 명인데… 필요한 ‘제물’의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
성녀라는 예상외의 변수가 있었다곤 하나, 변명의 여지가 없는 실패.
어떻게든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김관형 장관 본인이 직접 나서서 아카데미를 압박해봤지만…
며칠째 VIP룸에 처박혀있는 걸 보면 알 수 있듯, 결과는 영 시원찮았다.
모두 그놈의 ‘특별 초빙 교사’ 덕분이었다.
설마, 교장이 직접 외부 세력을 받아들일 줄이야?
한국처럼 적극적으로 아카데미를 압박하던 세력이라면 모를까, 뒷짐 지고 구경하던 녀석들은 이때다 싶어 희희낙락 교장의 선택을 지지했다.
무슨 아이돌 팔아먹듯 성녀를 팔아 재끼던 성국은 물론이고, 질투심에 눈이 먼 프랑스, 아직도 자신들이 강대국인 줄 아는 모스크바 새끼들까지도.
온갖 잡놈들의 지지와 특별 ‘교사’란 이름까지 붙여놓으니, 아카데미를 압박하던 명분이 한순간에 힘을 잃었다.
뒤늦게 양치기들을 침투시켜봤지만…
그중 두 놈은 코르부스라는 정체불명의 특별 교사에게 걸려 살해당했다.
보고를 들으면서도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재수가 없어도 정도가 있지.
하필 그 순간, 그 자리에서 특별 교사와 마주쳤다고?
‘그놈들을 침투시키기 위해 각성의 물약까지 사용했거늘… 하늘도 참 무심하시지.’
생각을 마친 김관형 장관은 담배를 단번에 빨아들였다. 혈관으로 니코틴이 돌자, 조금이나마 짜증이 가셨다.
그렇게 잠시 뜸을 들이던 장관은, 무언가를 떠올리고 스마트폰을 켜 어딘가로 영상통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통화가 연결되고, 화면 위로 익숙한 얼굴이 떠올랐다.
연락받았습니다. 장관님. 무슨 일이십니까.
딱딱하지만, 절도 있는 목소리.
화면 너머에는 군인이 생각날 정도로 절도 있는 여성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101116, 아카데미 특별 교사로 잠입시키기 위해 목장에서 차출한 양치기였다.
“오늘부터 특별 수업에 들어간다지? 확인차 연락했다.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나?
의례적인 질문이었으나, 양치기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검은 양을 제외한 양 자매 전원, 저를 교사로 신청, 제 특별 수업에 소속되었으며, 기타 한국인 학생 대부분도 모두 중요 교사 수업에 소속되었습니다.
“좋아, 좋아. 그럼 검은 양은?”
무사히 ‘씨숫말’과 같은 교사 아래 소속되었습니다.
씨숫말, 그 단어를 들은 장관은 해가 뜬 이래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미인계라니. 가끔은 단순하게 정답이라니까.
“자네가 직접 보니 어떻던가? 검은 양의 보고대로 씨숫말이 죽고 못 살 정도던가?”
그 이상입니다. 검은 양이 원한다면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분위기였습니다.
“…하!”
장관은 통쾌하게 웃었다. 이 빌어먹을 로드 하우에서 그나마 챙겨갈 게 하나 있었군.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불처럼 타오르는 사랑이란, 언제 훅 꺼질지 모르는 법이니.
“검은 양에게 몸을 아끼지 말라고 해. 혹시 필요하면 다른 양도 투입하고.”
다른 양들도 말입니까? 그 말씀은…?
“졸업 전에 씨숫말을 한국에 소속시킬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그게 힘들면 씨라도 구해와야지.”
아, 그럼…
“그래, 반쪽짜리 실패작이라도, 다리를 벌리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거 아닌가.”
가축에게나 할법한 말을 내뱉은 장관은 담배 한 개를 더 꺼내 입에 물었다.
탁, 탁.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이던 그는 문뜩 뭔가를 떠올리고 말을 덧붙였다.
“아, 그리고… 양들 주변 경계를 강화하게.”
경계를요?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테러에 실패한 쓰레기가 우리의 양을 가져가겠다더군. 대체 뭘 계획하는지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엮이지 않게 조심하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 더 명령하실 일은 없으십니까?
오늘 양치기는 유독 적극적이군. 특별 수업 탓인가?
장관은 미세한 위화감을 무시하며 대답했다.
“뭐… 종종 검은 양과 씨숫말의 사진을 찍어 놓게. 둘의 열애설이라면 다음 지방선거 때 각하께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예, 명령 받들겠습니다.
“그래, 그럼 수고하게.”
그 말을 끝으로, 장관은 휴대폰에서 시선을 돌렸다.
시야를 가리는 담배 연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침 여명 때문인지 알 수 없었으나…
장관은 끝까지 양치기의 눈동자가 검게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
시끌벅적한 등교 시간.
드디어 임시 수업이 끝나고 학교 내 봉쇄가 풀리는 날이라서 그런 건지, 오늘 등교 시간은 유독 더 활기가 넘쳤다.
아예 새 교복을 차려입고 나온 녀석도 있었고, 특별 수업 이야기로 입을 멈추지 않는 녀석도 있었다.
물론, 모든 학생들이 활기가 넘치는 건 아니었다.
특히 특별 수업 신청을 망친 녀석들은 우울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터덜터덜 본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극과 극이 갈리는 청춘의 풍경.
그 풍경을 눈에 담던 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아침부터 왜 그리 죽상이야? 어제 잠 못 잤어?”
바로 옆에서 세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명은 눈매를 좁히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래, 어제 한숨도 못 잤다. 밤에 찾아온 누구 덕분에.”
“정말? 누가 찾아왔어?”
“….”
“그 밤중에 남자 방을 찾아가다니, 대체 누굴까.”
“…그러게, 누굴까.”
노골적인 질문, 천연덕스러운 대답.
두 사람은 잡담처럼 들리는 대화를 나누며 등굣길을 걸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등교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몇몇 학생들이 묘한 눈빛을 보냈으나, 그뿐이었다.
얼레리 꼴레리 할 나이는 진작에 지난 것도 있었지만, 이미 1학년 사이에 소문이 파다한 탓이었다.
천여명과 세티는 그렇고 그런 관계다.
편입한 첫날 싸우면서 눈이 맞아서 어쩌고, 대피소에서 함께 싸우면서 저쩌고.
누군가 의도적으로 흘린 게 분명한 그 소문과 상관없이, 여명은 진지한 목소리로 세티를 불러세웠다.
“야, 홍세티.”
“…왜?”
“어젯밤의 일, 너 전부 기억하고 있지?”
어젯밤의 일.
갑자기 현실로 튀어나온 미그니움과 세티의 육체, 그리고 그녀가 남기고 간 각성의 물약.
차라리 꿈이라면 웃고 넘겼을 텐데, 색이 변한 각성의 물약은 그게 현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을쎄?”
세티는 오늘 아침에 만난 이후 계속 그랬던 것처럼, 모른 척 어깨를 으쓱였다.
“….”
여명은 그런 세티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시선을 느끼고 눈을 굴리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각성의 물약, 마셨어?”
미그니움과 그의 대화를 보지 못했다면 할 수 없는 말.
역시, 어제 봤던 미그니움의 육체는 진짜 세티였던 건가.
여명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주무르며 대답했다.
“당연히 안 마셨지. 그걸 어떻게 마시냐?”
“왜? 내 가슴에서 나온 거라 더러워?”
“….”
“어… 그런 표정 보는 거, 인천 이후로 처음이네.”
한 대 때려야 하나? 여명이 짧게 고민하는 사이, 세티가 덧붙였다.
“그래도 그냥 마시지 그랬어. 금제 풀어준 대가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세티는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돌렸다.
본관 건물이 아니라, 학생들이 잘 다니지 않는 오솔길 쪽으로.
여명은 그녀와 보폭을 맞추며 대답했다.
“대가를 바라고 금제를 풀어준 거 아니야.”
“아, 그러셔? 그럼 나도 보답으로 준거 아니라고 한다?”
“…나 진지한데 자꾸 말장난할래?”
여명이 한소리하고 나서야, 세티가 배시시 웃었다.
“아, 미안, 이러려는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게, 막, 아으, 주체가 안 되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세티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웃음인지 기쁨인지, 아무튼 뭔가 감정을 참으려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도, 마셔달라는 건 진심이야.”
“….”
“지금 가지고 있지? 각성의 물약.”
여명은 대답 대신 메고 있던 가방을 벌려 속을 보여줬다. 그의 가방 속에는 소주병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물약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어. 다시 나한테 먹일 생각으로 가지고 온 거지?”
“…그래, 다시 먹일 생각이야.”
“내가 안 먹겠다면?”
“억지로 먹여주지.”
“어… 그거는 좀…”
세티는 잠시 볼을 긁적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그래도 역시, 여명이 먹는 게 낫겠어. 내가 다시 먹어 봤자 낭비니까.”
한층 진지해진 목소리였으나, 오솔길로 향하는 그녀의 걸음은 어딘가 가벼워 보였다.
“…낭비라고?”
“응, 낭비야. 혹시 기억하고 있어? 우리 자매들이 어떤 가능성을 타고 태어났는지.”
올마스터.
인간에게 허락된 세 가지 마나의 길을 동시에 걸을 수 있는 존재.
세티와 그녀의 자매들은 전원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올마스터였다.
하지만…
“우리 자매 모두 결함품이라. 두 가지 길밖에 걷지 못했어. 그것도 반반은 불가능해서 주력과 보조를 하나씩 정해서 익혔고.”
머릿속 금제를 풀어서일까?
결함품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는 세티의 표정에선 한 점의 후회나 실망도 담겨있지 않았다.
“나 같은 경우에는… 무술이 주력이고, 신성이 보조야.”
“그럼…”
“응, 각성의 물약에 넣은 건 내 마법사로서의 가능성.”
“….”
“근데 말이 가능성이지, 난 가장 기초적인 마법도 못써.”
세티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마치, 가장 나쁜 걸 줘서 미안하다는 듯이.
“그렇다고 해서 막무가내로 주는 건 아니야. 여명이 마법을 쓸 수 있게 되면, 우리 계획도 더 잘 풀릴 테니까… 효율과 집중. 그래서 주는 거야.”
여명은 무언가를 숨기듯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는 세티를 바라보다가, 걸음을 멈췄다.
“세티,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널 만난 뒤로,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는데?”
낯뜨거운 소리를 잘도… 여명은 고개를 저으며 가방에서 물약을 꺼냈다.
물약에서 흘러나오는 영롱한 빛을 보며, 여명은 잠시 고민했다.
정말로 이걸 마셔도 될까? 미그니움에 대해선 아직 아무것도 묻지 못했는데.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미그니움은 몰라도, 세티는 믿을 수 있었으니까.
판단을 내렸으니,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퐁.
여명은 그대로 병뚜껑을 연 뒤, 물약을 들이켰다. 생긴 것과 달리 물약에선 달달한 우유 맛이 났다.
“어때? 뭔가 달라진 게 느껴져?”
그가 병을 전부 비울 때쯤, 세티가 물었다. 그녀의 눈에는 묘한 기대감이 반짝였다.
하지만 여명은 아무런 변화도 느끼지 못했다. 물약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싹 비웠지만, 감각도, 몸도 그대로였다.
“응? 어때? 파양결을 익힐 때처럼 한 번에 팍, 뭔가 느껴져?”
“…딱히?”
여명은 빈 병을 다시 가방에 담은 뒤, 내면을 관조해봤다. 하지만 여전히 변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어… 효과가 좀 늦게 오는 건가?”
“아마 그런 거겠지.”
“아니면 혹시… 각성의 물약 복불복에서 실패했다던가?”
“…뭐?”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세티의 농담 반, 진담 반이 담긴 말을 듣기 무섭게, 여명이 정색했다.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왜,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실패했으면 또 어때? 어차피 날린 건 내 가능성인데.”
“…각성의 물약이 얼마짜린지 알고 하는 말이지?”
“…아. 맞다. 물약값도 있었네.”
깜빡했네. 세티는 한마디 덧붙인 뒤 입을 다물었다.
짧은 침묵, 오가는 눈빛.
잠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피식 웃어버렸다.
분위기가 한층 가벼워진 가운데, 여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물약은 됐으니, 대체 어떻게 미그니움하고 엮인 건지 말해봐.”
앞뒤 재는 것 하나 없는 직구.
설마 바로 미그니움 대해 물을지 몰랐던 건지, 세티는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그게, 그분에 대한 건…”
“…그분?”
“그분을 이름으로 막 부르는 건 여명이나 가능한 일이야. 나는… 그렇게 못해.”
미그니움을 언급하는 세티의 태도는 조심스러웠다. 마치, 다섯 신을 입에 올리는 성녀처럼.
“세티, 너 설마…”
여명이 무어라 말하려 하자, 세티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니. 여명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내가 원해서 그분을 택한 거야.”
“….”
“정말이야. 어떻게 만났는지 알면 너도 이해할 거야. 금제를 풀던 그 날……”
세티가 설명을 시작하려던 그 순간.
오솔길 너머 수풀에서 무언가가 여명의 감각에 들어왔다.
학생은 아니지만, 익숙한 누군가.
여명은 즉시 그곳을 노려봤다. 그리고 그의 무의식을 따라서, 허공의 마나가 번쩍였다.
팅!
손톱만 한 크기의 얼음 조각이 수풀을 뚫고, 그 너머에 숨어있던 누군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악!”
갑작스러운 비명이 튀어나오기 무섭게, 세티 또한 비명이 들려온 방향을 바라봤다.
“자, 잠깐! 항복, 항복!”
수풀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양팔을 머리 위로 든 청소부 아줌마였다.
에이바 아줌마.
테러를 일으킨 시크릿 소사이어티의 첩자이자… 세티에게 파양결을 넘겨준 여자.
그녀는 얼음 조각에 맞아 찢어진 이마에서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떠듬떠듬 말했다.
“호, 홍세티, 그리고 파양결을 익힌 지구인… 우리 잠깐, 대화 좀 할 수 있을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