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19)
을 위한 세계는 없다-119화(119/817)
〈 119화 〉 1장 보스, 불청객, 그리고… (3)
* * *
***
여명과 세티는 대답 대신 마나를 끌어 올렸다.
상대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건지, 세티는 아예 가방 속에 숨겨 놨던 작은 쇠망치까지 꺼내 들었다.
당장 싸움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험악한 분위기.
에이바는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된단다.”
놀란 아이를 진정시키는 것 같은 말투. 그녀는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덧붙였다.
“호, 혹시라도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나는 정말로 대화만 할 생각으로…”
에이바의 혓바닥이 길어지려는 찰나, 여명이 말을 끊었다.
“…말장난은 거기까지 하지. 네 명 다 머리에 구멍 나기 싫으면.”
그렇게 말하는 여명의 시선은 에이바가 아닌 그녀의 뒤편으로 향했다.
그동안 투명 망토에 익숙해진 덕분일까?
그의 감각은 그 너머에서 모습을 숨긴 3명의 조직원들을 정확히 감지해냈다.
“….”
그제야, 에이바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그녀를 백업하기 위해 숨어있는 동료들이 숨을 죽이는 게 생생히 느껴진 탓이었다.
“…너무 쉽게 살인을 입에 담는구나. 다른 곳도 아니고 아카데미에서.”
“테러리스트 주제에 혓바닥이 길다.”
“….”
“아카데미를 습격한 시크릿 소사이어티의 첩자, 이 자리에서 당장 너희를 죽여도 벌은커녕 상을 받을 거 같은데. 아닌가?”
…거기까지 알고 있다고?
에이바는 자신도 모르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세티도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곤 재빨리 표정을 숨겼다.
“아주 잠깐만… 몇 분만 시간을 내주면 안 되겠니? 우리의 호의를 증명할 기회를 주면 좋겠구나.”
“…호의?”
여명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기 무섭게, 에이바가 뒤쪽을 향해 다급하게 손짓했다.
그러자 뒤편에 숨어있던 동료가 앞으로 나서더니, 웬 서류뭉치를 던졌다.
무슨 마법이라도 걸려있는 건지, 서류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둥둥 허공을 날아가 여명의 발 앞에 사뿐히 떨어졌다.
“…뭐냐.”
여명은 서류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물었다. 에이바는 변명하듯 설명했다.
“인천 살인마에 대한 자료. 인터폴에서 지난 반년간 그를 추적한 정보와 한국 경찰이 은폐한 서류까지, 전부 거기에 들어있지.”
“….”
인천 살인마… 즉, 플레이어.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여명은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내 뒤를 캤군.”
“너무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너도 알다시피, 지구상에 있는 정보상 중 네 뒤를 캐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거란다. 우린… 우리 일을 했을 뿐이야.”
“….”
“푸른 쥐. 그 여자가 너무 잘 숨긴 탓에 우리도 허탕을 칠 뻔했지만… 운이 좋았어. 인천 암시장은 우리 영역이거든.”
협박인지, 설명인지 애매한 말.
여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에이바를 노려봤다.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그 아래 숨겨진 절박함을 읽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 그래도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한단다. 진심으로, 우리는 너의 과거를 가지고 협박할 생각이 없어.”
“…그럼?”
“다시 말하지만, 호의의 증명이지. 그 서류도, 너의 정보를 팔지 않은 것도… 전부 너와 친해지고 싶은 우리 소사이어티의 호의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구나.”
말을 끝마친 에이바는 슬며시 웃음 지었다. 마치, 주도권을 쥔 것처럼.
“자, 그럼 이제… 대화할 마음이 좀 드니? 괜찮다면 자리를 옮겼으면 하는데.”
그쯤 되자, 세티도 일이 복잡하게 흘러간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바닥에 놓인 서류를 챙긴 뒤, 여명을 바라봤다.
‘어떻게 할 거예요?’ 란 뜻이 담긴 푸른 눈동자를 마주 보던 여명은 잠시 주먹을 쥐락펴락하다가, 에이바를 향해 말했다.
“에이바.”
“그래, 마음은 정했니? 정 뭐하면 여기서 대화해도….”
“조카가 시카고에서 피자집을 하지?”
“….”
에이바의 얼굴 위로 놀라움이 치솟았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초인의 눈썰미가 아니었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빠른 표정 관리.
“여태껏 시카고 피자를 먹어본 적 없는데, 혹시 장례식에서도 먹을 수 있나?”
“대체 무슨 소리를”
그녀가 무어라 되묻기도 전에, 여명이 땅을 박찼다.
아까 전부터 몸을 휘감고 있던 파양결의 마나가 그의 종아리를 타고 파도치고, 단번에 땅을 밀어냈다.
목표는 에이바가 아닌, 뒤에 숨어있는 그녀의 동료들.
녀석들은 반사적으로 무기를 들어 대응하려 했으나, 여명의 주먹이 그들이 숨어있는 곳을 후려치는 게 조금 더 빨랐다.
퍼억!
가장 맨 앞, 수풀 사이에 있던 녀석의 옆구리에 여명의 주먹이 파고들었다. 갈비뼈가 부러지는 감각이 주먹을 타고 올라왔다.
“커헉!”
녀석이 옆구리를 부여잡고 쓰러지는 순간, 여명은 이미 뒤에 있는 놈을 향해 발을 뻗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얼이 빠져있던 녀석의 반응은 한 발짝 늦었다.
뒤늦게 단검을 들어 올렸지만, 이미 여명의 비각술이 그의 턱 바로 앞에 도달한 뒤였다.
빠악! 두 번째 녀석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고, 눈이 탁 풀렸다.
세 번째 녀석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녀석은 세티가 집어던진 망치에 머리를 맞아 그대로 기절해 버렸으니까.
“이, 이게 대체 무슨…”
에이바는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입을 떨었다.
그럴 만도 했다. 초인이 아닌 그녀가 보기엔 눈 몇 번 깜빡할 사이에 숨어있던 동료들이 우르르 쓰러지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
아무튼, 여명은 쓰러진 녀석의 손아귀에서 단검을 빼앗아 들며 고개를 돌렸다.
“에이바.”
“….”
“난 이제 좀 대화할 마음이 생겼는데… 그쪽은 어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답할 수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세티가 그녀의 모가지를 콱 붙잡았으니까.
“끄, 끄윽….”
경동맥에 어마어마한 압박이 가해지고, 정신이 흐릿해졌다.
기절하기 직전, 그녀의 눈에 마지막으로 비친 건 단검을 들고 다가오는 여명의 황금색 눈동자뿐이었다.
***
시크릿 소사이어티.
푸른 쥐와 함께 뒷세계의 정보사업을 양분하고 있는 거대 정보 조직.
합법적인 영역에 한발 걸치고 있는 푸른 쥐와 달리, 그들은 오직 음지에서만 활동한다… 라는 게 뒷세계의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하지만 ‘작가의 노트’를 통해 알게 된 그들의 진실은 조금 더 복잡했다.
시크릿 소사이어티는 하나의 조직이 아니다.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인 온갖 개인, 집단, 사상의 느슨한 집합체.
종말 교단이라 불리는 사이비들부터, 제국독립을 외치는 분리주의자, 뒷골목의 범죄자들과 수인 인권운동가 같은 떨거지들까지.
공통점이라곤 하나 없는 이들을 묶어놓는 명분은 단 하나였다.
반(反)지구.
지난 수십 년간 지구가 쌓아온 증오, 질투, 선망이야말로, 시크릿 소사이어티를 하나로 묶는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들의 결속력은 눈에 띄게 약해지고 있었다.
이유를 따져보면 수도 없이 많겠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였다.
조직원들 간의 괴리감.
수은을 이용한 금광 채굴로 고향이 오염된 노인의 증오와 기사단이 해제되어 백수가 된 종자의 증오가 같을 수 없고.
혈통보다 달러가 중요하기에 지구로 온 귀족의 각오와 미군에게 아버지를 잃는 청년의 각오가 같을 수 없으며.
마법이 TV쇼에 나오는 걸 막기 위해 조직에 뛰어든 노마법사의 분노와 여동생을 잃고 첩자가 된 여인의 분노가 같을 수 없다.
한국인 입장에서 보자면, 그들의 상황은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들의 내부 대립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자는 무장투쟁파와 국민 수준을 끌어올려 독립하자는 자강론자의 대립.
그 와중에 지구 문명 맛을 보고 아예 지구를 따라 차원문 너머에 민주주의 현대 문명을 이룩해야 한다는 친(?)지구파들까지 나오는 판이니, 여러모로 상황이…
“…그럼 아카데미 테러는 왜 저지른 거야?”
한참 설명을 이어나가던 여명을 향해, 세티가 물었다.
나무에 기대어 있던 여명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세티는 잘린 나무 밑동에 다리를 꼬고 앉아 흥미진진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는데, 그녀의 옆에는에이바를 비롯한 시크릿 소사이어티 조직원 네 명이 포박된 채 짐짝처럼 쌓여있었다.
“보통 이런 정보를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부터 묻는 게 순서 아냐?”
바오닉의 노트에 대해서 어떻게 둘러대야 할지 고민하던 여명이 그렇게 말하자, 세티가 고운 아미를 씰룩였다.
“물론 그렇긴 한데, 솔직히 여명이 이런 걸로 날 속일 것 같지도 않고… 또, 중요한 거면 미리 말해줬겠지. 안 그래?”
세티는 자신의 무릎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우아하게 턱을 괴며 덧붙였다.
“정보 출처를 말해주기 어려우면 말 안 해줘도 돼. 서로 비밀 하나쯤 있으면 좋지.”
“….”
“아, 맞다. 난 여명에게 숨기는 게 하나도 없네? 지금이라도 하나 만들까?”
은근한 압박이 담긴 눈빛. 여명은 크흠, 헛기침한 뒤 원래 하던 이야기로 주제를 돌렸다.
“…최근 아카데미에 일어난 테러 사건은 소사이어티 내부 투쟁파가 독단으로 진행한 일이야.”
“아카데미에 폭탄 테러를 하고 무장한 병사를 보낸 게 일부 독단이라… 소사이어티도 어지간히 개판이네.”
세티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주제를 돌리는 걸 허락해주겠다는 듯, 자비로운 미소.
“…뭐, 과격파 입장에선 해볼 만한 도박이었던 거지. 아카데미를 불태워 기존 체제를 뒤흔들고, 내부 실권도 쥐고, 겸사겸사 성녀도 죽이고.”
“성녀? 걔는 왜? 지구와 혼혈이라서?”
“낸들 알겠어? 단순히 사이비 녀석들이 미쳐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
“흐음…”
“하지만 성녀를 죽일 뻔한 게 문제가 돼서… 지금 소사이어티 내부는 한바탕 홍역을 앓고 있는 중이야.”
어디까지나, 작가의 노트 속 이야기대로 흘러가고 있다면 말이지만…
이미 그가 미래를 바꾼 이상, 소사이어티 내부 사정도 다르게 흘러가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당장 과격파인 에이바가 그에게 접근한 게 그 증거 아닌가.
‘우리와 아무 상관 없이 지나가면 좋겠지만… 이미 늦었나.’
여명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기절해 있던 조직원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우리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군.”
초인의 공격에 직접 처맞은 다른 조직원들과 달리, 평범하게 목이 졸린 덕분일까? 의외로 가장 먼저 눈을 뜬 건 에이바였다.
“내부 사정에 우리 조카까지… 소사이어티 간부라고 해도 믿겠어… 푸른 쥐가 알려주던가?”
그녀는 여명의 설명을 엿들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은 채 물었다. 여명은 의도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말해주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아니, 차라리 다행인가? 이야기가 짧아질 테니.”
세티와 여명의 시선이 모이는 가운데, 에이바는 헐떡이듯 말했다.
“천여명, 니가 설명한 우리 조직 내부 사정 중 하나를 정정하마. 조직의 내분은 이미 끝났다.”
“…끝났다고?”
“그래, 과격파들이 독립해버렸으니까.”
과격파들의 독립이라고? 이번에도 바오닉의 노트의 스토리를 한참이나 벗어난 이야기였다.
원래 스토리대로라면, 과격파가 승리해서 시크릿 소사이어티가 통째로 테러 조직이 되고, 살아남은 온건파 중 일부만이 ‘주인공’과 협력하는 스토리일 텐데…
여명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래서, 과격파가 날 찾아온 이유는?”
“오해를 하나 더 정정하자면…난 과격파가 아니야. 물론 테러에 협력하긴 했지만… 이제 그만뒀어.”
에이바의 주름진 눈가가 여명과 세티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한숨 쉬듯 말했다.
“…조카가 지구인과 결혼했어.”
“….”
“피자 가게에 자주 오던 놈팡이랑 눈이 맞았다더군. 하, 지 애미가 어떻게 죽었는데… 지구인하고…”
한탄 섞인 말을 내뱉던 에이바의 말은 여명에게 묘한 상념을 느끼게 했다.
가족을 위해 복수를 그만두는 모습이라니.
겨우 그런 각오로 어린 학생들을 노린 건가? 아니면 그런 각오조차 흔들리게 할…
생각이 길어지려는 찰나, 그는 고개를 저어 상념을 떨쳐냈다.
“…됐고, 그 대화라는 것부터 해보시지.”
“그래, 대화, 대화해야지… 이런 꼴로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에이바는 끈으로 묶인 몸을 억지로 일으켜, 반쯤 앉은 자세로 여명과 얼굴을 마주 봤다.
그녀의 밤색 눈동자 위로, 여명의 황금빛 눈동자가 비쳤다.
“알고 있어? 저번 테러의 주모자는 교단에서 온 사제야.”
“…피혁 사제.”
여명이 대답하자, 에이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을 알고 있다면, 능력도 알겠군. 녀석은 지난 테러 중에 갑자기 몸을 빼더니… 우리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숨어버렸어.”
“…그래서?”
“독립한 과격파들이 녀석에게 어떤… 추가 명령을 내렸어.”
“추가 명령? 특별 교수들까지 온 판에 녀석 혼자서 뭘 할 수 있다고?”
세티도 궁금하다는 듯 에이바를 바라보았다. 에이바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한층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녀석은, 차원문을 열거야.”
“뭐?”
“정확한 방법은 우리도 몰라, 그냥 명령문을 가로챈 게 전부니까.”
여명과 세티는 서로를 바라봤다. 차원문이라고? 아카데미에?
차원문을 열어서 뭘 어쩌겠다고? 이미 고학년을 위한 작은 훈련용 차원문도 있는 판에.
아니, 그런 문제 이전에…
“그런 게 가능하긴 해요? 뭐, 녀석이 혼자 차원문을 열 수 있는 전설 속 대마법사라도 되나?”
“…희생양.”
“희생양?”
“무슨 은어 같은데… 아직 알아낸 게 없어, 검은 양의 피를 바치면 차원문을 열 수 있다…명령서에는 그렇게만 적혀 있었어.”
에이바는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너희에게 거래를 요청하러 왔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입을 열지 못했다. 갑작스레 분위기가 얼어붙은 탓이었다.
검은 양.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여명과 세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