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22)
을 위한 세계는 없다-122화(122/817)
〈 122화 〉 1장 보스, 불청객, 그리고… (6)
* * *
***
[인터폴은 지난 5년간 이어진 22개의 고아원, 3개의 오크 촌락, 2개의 드워프 게토의 민간인 학살의 범인이 단 한 사람임을 확인.] [‘도살자’로 명명된 학살범의 나이는 20세 미만으로 예상. 인터폴은 제2의 별내장이 탄생할까 우려…] [개성 차원문 주변 CCTV에서 ‘도살자’ 확인. 그동안 여러 차례 지구와 차원문을 오고 간 것으로 예상…] [인터폴, 1,109 마리의 괴물과 국경 수비대 135명의 시체가 발견된 서북부 산맥 참사에서 ‘도살자’의 흔적 발견. 감식반은 ‘도살자’가 괴물을 몰고 왔다는 증거를 확보…] [깊은 탑, CCTV와 현장감식을 통해 히라리아 화재사건 용의자로 ‘도살자’ 지목.] [‘도살자’의 추적 중 용의 둥지였을 것으로 예상되는 동굴 발견. 마탑에 정식으로 도움을…] [*마탑 처형관 발막의 의견에 의하면 둥지에는 최근까지 막대한 양의 마도구와 소모품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 그 많은 물건을 어떻게 옮겼는지는 미지수…] [추적에 난항…] [수사 잠정 중단…] [한국 ‘인천 살인마’의 몽타주 분석 결과 ‘도살자’와 동일인임을 확인.] [한국 경찰이 제공한 ‘인천 살인마’의 DNA 자료에서 치명적인 오류 발견, 한국 측은 고의적인 누락인지, 실수인지에 대해 묵묵부답으로 일관. 인터폴은 정식으로 항의…] [인터폴, ‘인천 살인마’와 한국 경찰 간의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는지 의심.] [한국, ‘인천 살인마’라는 표현 부적절… 차원문 너머 출신 살인마에게 한국 지명이 들어가선 안 돼…] [드레이테리얼 밀수용 기차에서 ‘도살자’ 목격.] [드레이테리얼의 불법 성형, 인체 개조 마법사 길드 전멸. 50명 이상 사망 추정… 생존자 증언을 통해 ‘도살자’를 유력 용의자로…] [제미니 시티에서 ‘도살자’ 특유의 검술을 확인. 지구로 향하는 차원문을…]…여명은 서류를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플레이어’의 행적이 적힌 서류를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린 탓이었다.
그는 이마를 짚은 채,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에이바가 넘겨준 자료 속 ‘플레이어’가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한 건 무려 5년 전.
첫 시작은 고아원의 고아들이었다. 사회의 밑바닥, 약하고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
마치 게임 단계를 올리는 것처럼, 녀석은 천천히 상대의 질과 수를 늘려나갔다.
가축 취급을 받는 오크, 난민이나 다름없는 드워프 하층민… 그리고 뒷골목 청소부들까지.
정말로 녀석이 살인으로 강해지기에 그런 일을 저지른 건지, 아니면 단순히 미친놈에 불과한 건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녀석이 미래의 정보를 가지고 손에 넣은 기연이 적지 않다는 사실뿐.
‘…지금 녀석은 어느 정도나 강할까.’
목이 잘릴 때는 미처 몰랐지만, 10레벨이 됐다며 웃음을 터트리던 플레이어는 완숙한 경지의 초인이었다.
실제로 만주에서 만났던 초인 용병 중, 플레이어보다 확실히 ‘강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거기다 녀석이 그동안 아카데미에서 손에 넣은 몇몇 기연들과 인터폴과 마탑의 추격을 떨쳐낸 미래 지식까지 고려한다면…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나간 순간.
파스스.
여명의 어깨 옆에 기다란 얼음송곳 하나가 피어났다. 무의식적인 마법의 발현이었다.
“….”
코르부스의 그것만큼이나 완숙한 냉기를 뿜어내는 얼음송곳을 보며, 여명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고작 하루 만에 이런 얼음송곳을 만들어낸 비결이 떠오른 탓이었다.
고무탄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리볼버 탄환을 축복하던 성녀의 말.
정작 그녀의 축복받은 고무탄은 실탄만큼이나 아팠다. 총에 맞은 부위가 아직도 욱씬거릴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그 후에 이어진 대련도 살벌하긴 마찬가지였다. 특히 세티의 망치질에는 꽤 감정이 실려있었지.
차가운 표정으로 얼음송곳을 박살 내던 모습이 어찌나 무섭던지.
마치 실전을 방불케 하는 대련이었다. 여명은 일방적으로 도망치며 얼음송곳을 날려대는 게 전부이긴 했지만.
아무튼, 그 덕분에 얼음송곳을 이렇게나 빨리 완성할 수 있었다.
‘…두 번은 못 하겠지만.’
여명은 피식 웃으며 얼음송곳을 허공에서 빙빙 돌렸다.
성녀와 세티 두 사람을 생각하자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물론, 그런 여유는 길지 않았다. 가슴 속에 꿈틀거리는 살기는 그에게 긴 시간을 주지 않았으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여명은 다시 자료를 집어 들었다.
혹시라도 미처 확인하지 못한 ‘플레이어’의 단서가 있을지 몰랐으니까.
‘이번 달이 지나기 전에… 죽이자.’
그렇게 자료를 세 번쯤 다시 정독했을 쯤.
그는 손을 멈추고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교내 방송으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 탓이었다.
[1학년 천여명, 천여명 학생은 지금 당장 북쪽 섬의 공항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차원문을 열고, 핵미사일과 초인이 존재하는 시대가 되었음에도, 지구에는 여전히 변하지 않는 진리가 하나 있다.
돈은 언제나 옳다.
마나야말로 세상의 근원이라 주장하는 근본주의 초인들이나, 사랑으로 모든 게 가능하다고 믿는 낭만주의자들은 부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로드 하우 아카데미 공항에 들어선 거대한 비행기를 본다면… 누구라도 돈의 위대함에 넋을 놓게 되리라.
교내 방송을 듣고 공항으로 온 천여명이 그런 것처럼.
“이 정신 나간 드워프가…”
여명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제 막 활주로에 들어서는 거대한 화물용 비행기에는 ‘둔간 중공업’과 ‘천여명’이란 이름이 커다랗게 테이핑 되어 있었다.
뻔하다 못해 노골적인 광고판.
그걸 본 여명이 한참 동안 말을 잃고 있는 사이, 계단 트럭이 자리를 잡고 비행기의 문이 열렸다.
비행기에서 내린 건 익숙한, 그리고 전에 보던 것보다 훨씬 화려한 복장의 드워프였다.
고급스러운 양복에 값비싼 시계, 그리고 손가락마다 끼운 크고 굵은 반지들까지.
둔간 중공업의 드워프 재벌, 다룰마 둔.
뚜벅뚜벅 계단을 내려오던 그는 여명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천여명!”
그가 달려오는 걸 마주하고 나서야, 여명은 정신을 차렸다.
“…다룰마.”
“오랜만일세! 만주에서 헤어진 뒤 얼마나 자네를 기다렸는지 모른다네!”
다룰마가 소리치며 여명의 손을 붙잡는 것과 동시에, 공항 쪽에서 카메라 셔터음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확인해보니, 대체 언제 온 건지 알 수 없는 기자들이 두 사람의 모습을 연신 찍어대는 것 아닌가.
여명은 쓴웃음을 삼키며 물었다.
“다룰마, 대체 이게 다 뭡니까? 비행기에, 기자에…”
“오해하지 말게, 저런 것들은 다 곁다리야. 난 오늘 자네에게 선물을 주러 온 걸세.”
“…선물이요?”
다룰마는 기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면서 말했다.
“만주에서 헤어질 때 자네가 부탁했던 것들 말일세. 용의 뼈를 위한 공방 사용권과 영약 거래.”
“….”
“그런데 자네가 원체 연락을 안 해서… 그냥 우리 쪽에서 먼저 온 거라네.”
왜? 여명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떴다가, 금세 사라졌다. 너무 뻔한 답이었으니까.
“…둔간 중공업이 제 후원자라고 동네방네 보여줄 생각이시군요. 제 이름값을 이용하려고요.”
“어허, 이용이라니. 공짜면 이용이지만, 대가를 지불하면 비즈니스라네.”
다룰마는 눈썹을 들썩거린 뒤, 여명을 비행기 쪽으로 안내했다.
여명은 거절할까 하다가, 그냥 못 이기는 척 그의 뒤를 따르며 말했다.
“제가 거절하면 어쩌시려고 이런 일을 벌이신 겁니까?”
“글쎄, 아마… 무릎이라도 꿇었겠지?”
여명이 괜히 그 모습을 상상했다가 눈살을 찌푸리는 사이, 다룰마가 그를 이끌고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비행기에는 화물용 항공기답게 좌석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화물이 있었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비행기 내부를 채우고 있는 건 쫘악 늘어선 장식장들이었다. 그것도 무기 장식장.
고급스러워 보이는 검이 세워져 있는 유리 장식장은 물론이고, 총을 가득 걸어놓은 벽면 장식장들까지.
길이, 휘어짐, 두께 등등 뭐하나 공통점이라고 없는 장식장 속 무기들은 딱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모두 미약하게 마나가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무기가 마나 메탈이 들어간 특제품이라는 뜻.
조금 더 시선을 돌려보니, 무기들 사이로 드문드문 갑옷도 보였다. 사슬갑옷이나 두꺼운 철판으로 만든 판갑, 가슴 전체를 가리는 흉갑 등등.
개중 몇 개는 상아색 뼈의 재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는데, 그 재료가 용의 뼈라는 건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무기 박물관을 그대로 옮겨도 이 정도는 아니지 않을까.
‘대단하긴 한데… 이렇게 두면 그냥 장식품 아닌가?’
진짜 강한 무기는 강자의 손에 들렸을 때 완성되는 법이다. 그 유명한 성검처럼.
짧은 감상을 끝낸 여명이 고개를 돌리자, 다룰마의 긴장된 시선이 보였다.
“어떤가? 우리 둔 가문이 자랑하는 무구들의 위용은?”
솔직한 감상을 내놓으려던 여명은, 다룰마의 기대감 어린 눈동자를 외면하지 못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군요. 역시 재벌은 재벌이구나 싶습니다.”
억지로 짜낸 칭찬이었음에도, 다룰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딘가 뿌듯함이 느껴지는 미소.
“역시 자네는 보는 눈이 있다니까. 자, 뭐하나? 어서 들어오게, 자네가 쓸 무기인데, 직접 골라야지.”
…?
골라? 뭘? 여명이 슬쩍 고개를 기울이자, 다룰마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설명이 너무 짧았군. 천여명 군? 이 무구들은 전부 자네를 위해 가지고 온 걸세.”
“….”
그렇게 말한 다룰마는 품에서 리모컨을 꺼낸 뒤,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철컥 소리와 함께 장식장 앞을 막고 있던 유리들이 일제히 아래로 내려갔다.
“자, 어서 골라보게.”
***
“이건 우리 가문 장인인 다난 둔이 3년 전에 만든 검일세. 그 뭐냐, 스텔스 전투기와 똑같은 재질로 만들었다네. 티타늄 합금에 마나메탈 코팅. 단단하면서, 가볍지.”
다룰마는 예스러운 장식이 가득 달린 검을 들어 보이며 설명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여명은 가만히 검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다룰마.”
“왜, 마음에 안 드는가? 하긴, 다난이 만드는 건 너무 기성품 느낌이 강하긴 하지.”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궁금해서 그럽니다. 제게 왜 이런 투자를 하시는 겁니까?”
만주에서 여명이 다룰마에게 요구했던 건 드워프 공방 사용권이었다.
여명 나름대로 신경 쓴 제안이었다. 용의 뼈를 제련해주고, 드워프 공방까지 사용하는 건 돈으로도 쉽게 살 수 없는 기회였으니까.
하지만 이건… 그런 제안을 뛰어넘는 선물 아닌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돈에 미친 기업가가 이런 호의를 베푸는 꿍꿍이가 궁금했다.
“아까 말한 대로일세. 비즈니스지.”
다룰마는 검을 장식장에 다시 넣어두고, 옆 장식장에서 다른 검을 꺼내며 말을 이었다.
“드워프 기업이 인간을 후원하는 건 기업 이미지에 좋지. 게다가 그게 실력이 증명된 초인이라면야, 이만한 투자가 또 어디 있겠나?”
“…빈말은 됐습니다.”
“빈말이라니, 나는 진심으로…”
다룰마는 뭐라 더 많은 설명을 하려다가, 여명의 눈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무시무시한 황금빛 눈동자.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사실, 황금 옥새 때문일세.”
“….”
“나중에, 어쩌면 몇 년 내로 옥새가 필요한 일이 좀 있다네. 그때 자네가 옥새를 빌려주지 않으면… 우리 혈족이 좀 난감해져서 말일세. 미리미리 호의를 좀 쌓는 거지.”
솔직한 대답일까? 다룰마의 심장 소리는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여명은 검과 다룰마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본 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믿겠습니다.”
“믿음이라. 신용은 상인에게 금과 같지. 자, 그럼 이제 계속 무기를 보겠나?”
다룰마는 그렇게 말하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드워프 장인이 만든 무기, 차원문 너머 제국이 남긴 유물, 미국이 만든 프로토타입 무기 등등…
하나 같이 보물이라고 할만한 것들이었다. 개중에는 여명의 마음에 든 것들도 있었지만, 다룰마는 그때마다 조금 더 보라며 그를 만류했다.
마치, 진짜로 주고 싶은 무기는 따로 있다는 듯이.
그렇게 설명이 이어지길 한참.
다룰마는 비행기 정중앙에 있는 장식장 앞에서 발을 멈췄다.
그 속에 있는 검은 검신이 연한 노란색인 걸 제외하면, 특별할 게 없어 보였다.
길이는 짧지도, 길지도 않았다. 손잡이는 투박하다 못해 단순했고, 장식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곳에 있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은 철검으로 오해해도 이상할 게 없는…
‘…아무것도 안 느껴진다?’
여명이 이상을 느끼고 눈살을 찌푸리는 사이, 다룰마가 천천히 검을 장식장 밖으로 꺼냈다.
“이 검의 이름은 산의 눈물이라네. 꽤 거창한 이름이지?”
딱 봐도 사연 있는 검이었다. 다룰마는 여명에게 검을 내밀며 덧붙였다.
“…겨자 가스에 파묻혔던 드워프 산맥의 가장 깊은 곳에서 캐낸 마나 메탈을, 우라간 가문의 마지막 장인께서 통째로 두들겨 만든 검일세.”
검을 쥐자 손잡이를 타고 익숙한 감각이 올라왔다.
“마나를 불어 넣어보게.”
여명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노란 검신을 따라 숨겨져 있던 마법이 움직였다.
그러나 마나의 움직임도,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음, 무흔, 무취, 그리고… 무색.
“…투명 마법?”
여명은 텅 빈 손을 살짝 휘둘러봤다. 날카로운 검이 허공을 갈랐지만,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투명 망토에 걸린 것과 동급, 혹은 그 이상의 투명 마법.
잠시 검을 만지작거리던 여명은, 불현듯 무언가를 떠올렸다.
“다룰마, 이 검 설마… 암살용입니까?”
“음? 어떻게 알았나?”
“그냥,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다룰마는 검을 늘어트리는 여명을 보며 수염을 쓸었다. 투명 마법을 해제한 검의 모습은 여명과 묘하게 어울렸다.
“어떤가, 그 검을 택하겠나?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 검을 추천하고 싶네만.”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조용히 검신에 자신을 얼굴을 비춰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검으로 하겠습니다.”
스탈린을 암살하기 위해 만든 검이 그를 주인으로 고른 건 우연일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어쩌면 운명이란 게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다룰마는 손뼉을 쳤다.
“좋아, 이제 그럼 검집을 보도록 하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