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24)
을 위한 세계는 없다-124화(124/817)
〈 124화 〉 복수의 갈림길 (2)
* * *
***
[주인이여, 조심하라. 역겨운 냄새가 점점 더 진해지고 있다.]유니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리기 무섭게, 하수도 너머 총소리가 격해졌다.
두두두두!!
권총이 아니라 제대로 된 자동소총이 불을 뿜는 소리.
불길함을 느낀 여명은 조금 더 마나를 끌어 올렸다. 하수도의 바닥을 찰 때마다 그의 몸이 죽죽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하수구 코너를 두 개쯤 돌자, 어둠 사이에서 무언가의 등이 보였다.
‘…수인?’
여명이 고개를 젖혀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거대한 덩치에, 온몸을 뒤덮은 회색 털, 그리고 뼈가 드러날 정도로 기괴하게 빼빼 마른 몸까지.
손잡이의 빛을 본 것일까? 녀석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을 마주치고 나서야, 여명은 녀석이 단순한 수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 어떤 수인도 얼굴이 반쯤 녹아내려 뼈가 드러난 상태로 살아있을 수는 없을 테니까.
[수인 좀비라니, 이 무슨 멍청한 짓을…]유니콘이 짧은 감상을 내뱉고, 여명이 검을 휘두르는 건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산의 눈물이 하수구의 어둠을 가르고 늑대의 얼굴을 갈라버리려는 바로 그 순간.
“캬아아아악!!!!”
녀석은 비명인지 괴성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질렀다.
무슨 마법이나 저주가 담긴 것도 아닌 순수한 괴성에 불과했지만, 그 소리가 가져온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머리가 반으로 잘려 쓰러지는 수인 좀비 너머, 하수도의 어둠 속에 가려진 수십 쌍의 눈동자가 일제히 여명을 향했다.
그리고…
아 우 우 우!!
수십 마리의 좀비가 동시에 울부짖었다. 하수구를 징징 울리는 하울링.
거참, 더럽게 시끄럽네. 총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여명은 눈살을 찌푸리며 녀석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에 질세라, 좀비들도 일제히 몸을 돌려 여명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간격에 들어선 순간.
가장 앞에 있던 수인이 손톱을 휘둘렀다.웬만한 성인 여성의 키보다 긴 손이 여명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거리 차이를 이용하는,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공격.
그러나 여명에게 거리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검을 휘둘러 녀석의 팔을 통째로 베어냈다. 파도치는 마나가 담긴 검이 썩은 살을 갈라내고, 여명은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두 마리.
검이 팔은 물론이고 몸통까지 통째로 베어냄과 동시에, 또 다른 손톱, 발톱, 이빨이 그의 몸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여명은 피하지 않았다. 호흡을 짧게 들이킨 뒤, 어깨에 힘을 주고 검으로 반월을 그렸다.
우라간의 손잡이의 빛을 받은 검이 아름다운 선을 그렸다. 그 선 뒤로 피와 썩은 살점이 이어지고, 범위에 있던 좀비들이 토막 났다.
다섯 마리.
여명은 멈추지 않았고, 수인 좀비들도 마찬가지로 멈추지 않았다.
발톱과 검이 교차한다. 하수구의 썩은 물 위로 피와 살점이 튄다.
홍수 속 급류가 몰아치듯이, 해안가의 파도가 철썩이듯이.
무질서하게 몰려드는 녀석들의 시체로 하수구가 채워진다.
다섯 마리가 열 마리로, 열 마리는 서른 마리로.
여명은 도축용 기계처럼 묵묵히 좀비들을 도살했다. 인천에서 그랬고, 만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종종 녀석들의 발톱이 허벅지를 할퀴고, 이빨이 몸에 틀어박혔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살아있는 수인조차 따라오지 못한 재생력이 그를 지탱했다.
그렇게 얼마나 죽였을까? 수를 세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쯤.
여명은 문뜩 배경음처럼 들려오던 총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다는 걸 깨달았다.
하수구 코너 하나만 넘으면 총소리의 주인을 만날 수 있는 거리.
여명은 간질거리는 가슴 속 무언가를 꾹 억누른 뒤, 재차 검을 휘둘렀다.
***
어둠에 휩싸인 하수도의 깊은 곳.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돌 제단 아래, 소년의 모습을 한 도살자가 말했다.
“아니, 씨발. 왜 저렇게 약해?”
그의 시선은 돌 제단 주변에 널브러진 가죽들을 향하고 있었는데, 가죽 위에는 하수도 곳곳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흡사 CCTV를 떠올리게 하는 광경이었고, 실제 용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무튼, 도살자는 가죽을 보며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저 새끼가 너무 강한 건가?”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가죽 위로 떠 오른 화면에 집중했다.
수인 좀비를 뭉텅뭉텅 썰어 재끼며 앞으로 나아가는 소년의 모습.
무슨 싸구려 공포 영화도 아니고, 실시간으로 좀비들을 갈아버리는 소년에게선 일말의 망설임이나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왜 체력이 떨어지질 않지?’
도살자, 아니, 플레이어는 체력바를 확인해볼 심산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딱.
곧이어 이 세상에서 오직 그만이 볼 수 있는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세상 모든 정보가 객관적인 수치와 숫자로 정리된 창.
창 너머로 본 소년의 체력은…
[100%/100%]역시나, 한 칸도 닳지 않았다.
종종 수인 좀비가 공격을 성공시킬 때마다 체력 수치가 미세하게 깎여 나갔지만…
눈 한번 깜빡거릴 시간이면 다시 제자리를 되찾았다.
“재생력이 뭔… 하프 수인? 아니면 용의 피라도 뒤집어쓴 건가? 만주에서 용과 싸웠다고 했으니 그랬을 가능성도 있긴 한데…”
이 세상에서 오직 그만이 알 수 있는 소리를 중얼거린 뒤, 플레이어는 고개를 돌려 제단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돌 제단 위에 놓인 커다란 살덩이를 봤다.
“야, 좀비 말고 다른 건 못 만드냐?”
그의 질문에 살덩이가 꿈틀, 반응했다. 곧이어 살덩이 사이에서 늑대의 얼굴이 스르륵 솟아났다.
두 눈동자가 검게 물든 늑대는 헐떡이듯 대답했다.
“핀드… 만들… 수… 있…”
정신 나간 사람 특유의 멍한 목소리.
쯧, 플레이어는 혀를 찼다. 보스라고 해봐야 결국 1장 보스인가. 그렇게 큰 타락석을 처먹고도 고작 이 정도라니.
“그럼 좀비가 아니라 핀드라도 만들어. 이대로라면 성녀 못 죽인다.”
“성…녀… 못… 죽인… 다?”
성녀란 단어가 나오자마자, 살덩이 전체가 부르르 떨었다. 꿈틀거리는 살덩이 너머로, 번쩍이는 타락석이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양…! 양의 피가, 필요해…!”
“검은 양?”
“피…! 제물…!”
플레이어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사제를 잠시 바라보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시발 뭔 대화가 안 되네.”
그가 그렇게 말하며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몇 번 두들기자, 푸른 물약 한 병이 그의 손 위에 나타났다.
마법도, 그렇다고 기적도 아닌 기묘한 기술.
그러나 사제는 그 광경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하, 젠장. 어쩔 수 없네.”
플레이어도 딱히 반응을 바란 건 아니었기에, 별말 없이 뚜껑을 열어 물약을 들이켰다.
하수도에 어울리지 않는 상쾌한 향기가 그의 목을 적시자마자, 그의 눈이 녹색으로 물들었다.
마치, 어둠을 꿰뚫어 보는 짐승의 그것처럼.
“…내가 직접 확인해야지.”
잠시 눈을 깜빡이며 시야를 확인한 플레이어는, 마지막으로 가죽을 확인했다.
정확히는, 가죽 위로 비치는 두 명의 소년을.
***
좁디좁은 하수도의 교차로.
터엉!
성녀의 샷건이 불을 뿜었다. 코앞까지 다가왔던 수인의 가슴에 구멍이 나며 피를 흩뿌렸다.
“컹, 컹!”
하지만 즉시 다른 수인 좀비가 그 자리를 채웠다.
재차 샷건을 당겨봤지만, 달칵 탄창이 비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었다.
“아, 진짜!”
성녀는 즉시 샷건을 집어 던지고, 바닥에서 다른 총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조금 큰 자동소총.
두두두! 두두두!
정확한 점사가 이어졌다. 달려드는 좀비들이 우수수 쓰러졌지만, 빌어먹을 탄창이 문제였다.
채 열 마리를 쓰러트리기도 전에, 탄창이 바닥을 보였다.
탕!
성녀는 품에서 권총을 뽑아 사격하면서, 소총을 가랑이 사이에 거꾸로 끼웠다.
‘한 손 장전이라니, 이런 걸 여기서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동안 연습한 성과가 있는 걸까? 성녀는 무사히 소총을 장전한 뒤, 다시 총알을 난사했다.
사격, 장전, 사격, 장전.
무수한 탄피가 하수도로 떨어지고, 그보다 많은 수인들이 쓸려나갔으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살아있는 수인처럼 재생력이 뛰어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그것도 한두 마리일 때 이야기지.
슬슬 바닥을 보이는 총알을 곁눈질하며, 성녀는 입술을 씹었다.
“제길.”
축복을 걸 시간만 있었어도 총알을 절반 이상 아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좀비들은 그녀에게 찰나의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녀만은 죽이겠다는 듯, 끝없이 몰려들었다.
그렇게 성녀의 주변에 좀비의 시체가 바리케이드처럼 가득 쌓일 때쯤.
‘이대론 못 버텨.’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어쩌지, 이대로 탄창과 무기를 버리고 도망쳐야 하나?
아니면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버텨야 하나?
고민이 길어지려는 찰나, 그녀는 쏟아지는 좀비들의 숫자가 갑자기 줄어드는 것을 감지했다.
처음 쏟아지던 좀비들이 파도라면, 지금은 잔잔한 시냇물 정도?
어? 뭐지?
의문을 떠올리면서도, 그녀는 잠깐의 여유를 놓치지 않았다.
즉시 탄창에 축복을 걸고, 얼마 남지 않은 좀비들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그리고 재장전.
짧은 정적이 하수도를 채우려는 순간, 어둠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좀비와는 전혀 다른, 사람의 발소리. 성녀는 재장전한 탄창에 축복을 걸고, 하수도를 정조준했다.
잠시 후, 하수도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여명?”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에 절어 있었지만,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런 눈동자를 가진 건 세상에서 단 한 사람 뿐이었으니까.
성녀는 즉시 총을 내려놓고 시체를 넘어 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재회의 포옹을 할 생각으로 두 팔을 벌렸으나…
“멈춰.”
여명이 정색하고 그녀를 막아 세웠다. 성녀는 두 팔을 벌린 자세 그대로 고개를 갸웃했다.
“왜?”
“…진짜 이 상태에서 스킨쉽하고 싶냐?”
여명이 피에 젖은 옷과 그녀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성녀는 대답 대신 웃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뭘 그런 거 가지고.
피 냄새가 풍겼지만, 개의치 않았다.
좀비의 체액이야 자신도 듬뿍 뒤집어썼고, 무엇보다 여명의 몸이 상상 이상으로 따뜻한 까닭이었다.
안도감이 가득한 포옹이 이어지길 잠시. 성녀는 여명의 등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저, 여명, 여기 어딘지 알아?”
“낸들 알겠냐. 오히려 내가 묻고 싶다.”
여명은 그렇게 말하며 하수도 저편에 가득 쌓인 무기를 곁눈질했다.
“다룰마의 비행기에 있던 무기 맞지?저것들은 어떻게 챙겨 온 거야?”
“아, 저거? 네가 비행기를 떠나고 얼마 뒤에, 갑자기 이상한 걸 느껴서…”
“…무기부터 챙겼다?”
“레이디의 소양이지.”
여명이 헛웃음을 터트리고 나서야, 성녀는 포옹을 풀고 무기 더미 앞으로 그를 끌고 갔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총과 총알을 하나하나 분류하며 대화를 시작했다.
“아무튼, 갑자기 여기로 소환된 이유가 있을 텐데… 여명은 뭔가 짚이는 거 없어?”
“짚이는 거라면 하나 있긴 한데…”
“뭔데?”
여명은 성녀가 집어 던졌던 샷건을 확인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코르부스와 함께 테러리스트를 추적하고, 궁지에 몰린 녀석이 알 수 없는 검은 보석을 부쉈다는 이야기.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녀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두들겼다.
“…타락석이구나.”
“타락석? 뭔지 아는 거야?”
음, 성녀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잠시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
“음, 여명, 종말 교단이라고 알아?”
“…남들이 아는 정도는.”
“그러면 잘 모른다는 소리네.”
철컥, 성녀는 소총을 장전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 종말 교단은, 이 세상은 거짓된 세상이니, 모든 걸 파괴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뭐 그런 소리를 하는 미친놈들이야.”
“…거짓된 세상?”
바오닉의 노트에는 없던 정보였다. 여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녀석들은 이 세상 모든 신들이 거짓 세계의 가짜라고 주장해. 그러면서 정작 녀석들이 섬기는 건 악마인지, 괴물인지 정체가 불분명한 오물 덩어리들이지.”
“….”
“타락석은… 그 오물덩어리들에게 인신공양을 하면 얻을 수 있는 물건이야. 흑마법을 위한 최고의 촉매라나? 그러니 아마… 이곳은 타락석으로 만든 결계나 뭐 그런 거 아닐까?”
성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겉옷을 벗었다.
반쯤 젖은 교복 블라우스를 본 여명이 헛기침했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고 겉옷을 보자기 삼아 총알과 무기를 싸맸다.
“크흠, 엄청 자세히 알고 있네.”
“차원문 열리기 전까진, 녀석들이 우리 다섯 신 교단의 주적이었으니까. 신전에 비치된 역사서 중 3할은 녀석들 죽이는 내용일걸?”
거기까지 말한 성녀는 여명의 겉옷마저도 빼앗아 보자기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허리춤에 총기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철컥.
마지막으로 권총까지 장전한 뒤, 그녀는 무기 더미 맨 아래 있는 무기를 빤히 바라봤다.
공사용 망치를 떠올리게 하는, 거대한 워해머.
“이건 왜 챙겨 온 거야? 망치는 쓸 줄도 모르잖…”
여명이 의아한 얼굴로 질문하는데, 성녀가 그의 말을 끊었다.
“세티.”
아, 여명은 그제야 검은 양을 떠올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세티도 여기로 끌려온 거야? 확실해?예지라도 쓴 거야?”
“아니, 예지는 이렇게 뒤틀린 마나가 많은 곳에선 못 써. 하지만… 사랑의 감이야. 세티도 이곳에 있어, 분명해.”
“사랑… 뭐?”
“여명도 느껴지지 않아?”
여명은 무슨 개소리냐고 말하려다가, 가슴 속에서 간질거리는 감각을 느끼곤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아무 말 하지 않는 그를 보며, 성녀는 다 안다는 듯 씨익 미소 지었다.
“…자, 세티 찾으러 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