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25)
을 위한 세계는 없다-125화(125/817)
〈 125화 〉 복수의 갈림길 (3)
* * *
***
홍세티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하수도를 노려봤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푸른 눈동자 속에는 어떠한 당황이나, 두려움도 없었다.
그녀에게 이런 종류의 어둠은 너무나 익숙했으니까.
‘뒤틀린 마나로 만들어진 아공간…? 아니, 하수도에 결계를 뒤집어씌운 건가.’
한국 정부가 그녀의 자매들을 비롯한 가축을 키우던 ‘목장’과 별반 다르지 않은 공간.
어렵지 않게 하수도의 정체를 꿰뚫어 본 세티는 한숨을 삼켰다.
‘한국 정부… 는, 아닐 테고.’
어디 만주나 차원문 너머도 아니고, 미국과 호주가 감시하는 아카데미에서 대놓고 일을 벌인다?
정부가 그렇게 멍청하면 얼마나 좋겠느냐만, 한국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결국,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에이바가 말했던 교단의 사제였다.
어떻게 이 정도 수준의 결계를 만든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이미 한 번 테러를 저지른 녀석 아닌가, 두 번이라고 못할 건 없었다.
세티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하수도를 거닐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발을 멈췄다.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자,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두 개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마나를 끌어 올렸다. 불길한 예감이 그녀의 등줄기를 쓸고 내려갔다.
“그래서 말인데, 후배님은 그럴 때…”
잠시 후, 하수도 너머에서 두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익숙한 교복을 입은 남학생 둘. 그 중 한 명은 세티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진실을 모르는 여학생들은 왕자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선이 진한 미남.
배신자의 아들, 전윤성.
그는 어디서 구한 건지 알 수 없는 제국 기사 검을 허리에 찬 채, 누군지 모를 놈과 대화하고 있었다.
“후배님이라뇨. 선배님, 그냥 편하게 말 놓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되나? 내가 형이기는 한데, 그… 후배님은 신입생 대표잖아.”
어딘가 비굴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
교복을 보아하니 2학년인 것 같았는데… 뭔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콕 짚어 설명하긴 어렵지만, 가까이 가선 안 될 것 같은 위화감.
세티는 앞으로 나서지 않고 살며시 뒷걸음질 쳤다. 굳이 저 둘과 합류할 생각이 없는 탓이었는데…
“…누구냐?”
전윤성보다도 먼저, 2학년 선배가 먼저 세티를 발견했다.
이 거리에서? 세티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어둠을 꿰뚫어 보는 마법이라도 건 걸까? 남자의 시선은 정확히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어… 1학년 후배니?”
세티는 대답하지 않고 그를 똑바로 노려봤다. 남자는 약간 당황한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기, 하필 이런 곳에서 만나서 긴장한 건 알겠는데, 너무 그렇게 적대할 필요 없어.”
“….”
“난 2학년에 재학 중인 아서스라고 해, 이쪽은 너도 알지? 전윤성.”
자신을 아서스라고 소개한 2학년 선배는 한발 앞으로 나서며 계속 입을 나불거렸다.
“혹시 유령이나 뭐… 그런 건 아니지?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대답 좀 해줄래?”
그제야. 세티는 위화감의 정체를 느꼈다. 상대의 태도.
정체 모를 하수도에 빠졌음에도, 그에게선 여유가 넘치고 있었다.
단순히 넉살이 좋고 없고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표정, 근육, 분위기…그 어느 곳에서도 긴장은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저기…”
저벅. 녀석이 한 걸음 다가오는 순간, 세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싸우느냐, 도망치느냐?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뒤로 물러나는 걸 택했다.
싸워서 녀석의 정체를 알아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여기서 힘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망치가 있다면 모를까, 전윤성까지 끼어들면 신의 힘을 빌려도 쉽지 않은 싸움이 될 테니.
‘…여명부터 찾아야 해.’
판단을 끝낸 세티가 비각술을 펼치려는 순간.
갑작스레 그녀의 뒤쪽에서 화악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마치 햇빛과 달빛을 뒤섞은 것 같은 진한 백색의 빛.
세티는 어정쩡한 자세로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빛에 적응하기 위해 동공이 수축하기를 잠시.
커다란 빛 덩어리 두 개를 어깨 위에 띄운 금발의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쇠미리?”
“세티. 드디어 찾았네요.”
드디어?
세티의 고운 아미가 휘어지기 무섭게, 쇠미리가 덧붙였다.
“여명이 지금 애타게 찾고 있어요. 우선 여명과 합류하러 갈까요?”
“미리, 그게 무슨…”
세티가 무어라 질문하려는 순간, 전윤성이 그녀를 발견하고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쇠미리 양?!”
녀석은 훌쩍 하수도를 뛰어넘어, 세티를 지나 쇠미리에게 달려갔다.
비각술과 닮은, 아니, 비각술의 깃걸음과 거의 똑같은 발걸음으로.
“쇠미리 양이 어쩌다 여기에… 괜찮아? 다친 곳은 없고? 혹시 수인 좀비에게 물린 곳이 있으면 알려줘. 저기 2학년 선배께서 물약을…”
전윤성의 말이 길어지려는 찰나, 쇠미리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전 괜찮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아니, 그래도…”
전윤성이 무언가 더 대화를 이어나가려 했으나, 쇠미리는 그 말을 끝으로 전윤성을 지나쳐 세티에게 향했다.
세티는 전윤성과 쇠미리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예,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세티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어딘가 묘했다. 마치 다른 곳을 보는 듯한 눈동자.
“세티.”
쇠미리는 세티의 팔을 꽉 붙잡은 뒤,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명이 느껴지죠?”
“….”
“가슴속에 느껴지는 그 감각, 그 감각만 따라가면 돼요.”
***
어쩌다 보니, 네 사람은 함께 하수도를 걷게 되었다.
정확히는 쇠미리와 세티가 앞장서고, 전윤성과 2학년 선배가 따라가는 구도였다.
무어라 대화를 나눌 법도 한데, 네 사람 사이에 감도는 건 침묵뿐이었다.
전윤성이 쇠미리의 뒷모습을 보며 입을 벙긋거렸지만, 대화로 이어지진 못했다.
그렇게 발소리만이 하수도를 채우길 한참.
전윤성의 눈치를 보고 있던 2학년 선배가 대뜸 입을 열었다.
“후배님… 이 아니라, 윤성아, 아까 내가 했던 말, 기억하니?”
“아, 예, 기억합니다.”
뜬금없는 질문이었음에도, 전윤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기억 못 하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이 기괴한 하수도가 사실은 아카데미를 집어삼킬 차원문의 전조가 아니냐 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어찌 잊겠나.
“무슨 증거가 있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내가 기사단에서 배웠던 사례 중에, 이거랑 거의 똑같은 사례가 있었어. 흑마법으로 만든 차원문.”
“으음…”
“순전히 내 기우일지도 모르겠다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확실히, 그런 게 아니라면 이 상황이 설명되지 않기는 합니다.”
대답을 들은 선배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꽤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윤성아, 혹시… 나랑 차원문의 흔적이 있나 찾으러 갈 생각 있니?”
“예?”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서 그래. 나 혼자면 좀 힘들겠지만, 윤성이 니가 도와준다면…”
좀 무리한 부탁이라는 걸 아는지, 선배는 말끝을 흐렸다.
전윤성은 즉시 대답하지 않고, 앞서 나가는 세티와 쇠미리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가 그렇게 갑자기 입을 다물자 하수도에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정작 그 침묵을 마주한 선배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곁눈질했다.
잠시 후 꾹 닫혀 있던 전윤성의 입이 다시 열렸을 때, 그의 입에서 나온 건 완곡한 거절이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그건 힘들겠습니다.”
“….”
“만에 하나 선배님 말이 맞다고 해도… 어른들이 해결하실 겁니다. 아카데미 항구에 미군도 있으니, 저희가 나설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의 설명을 납득한 걸까, 선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그 직후, 그는 전윤성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이놈은 아니군.
***
아 우 우 !
귀를 찢어버릴 것 같은 늑대 울음소리가 하수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좀비의 썩은 성대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하울링.
“아, 진짜… 좀비가 끝이 아니야?”
성녀는 그렇게 한탄하며 자동소총을 장전했고, 앞서나가던 여명은 담담하게 워해머와 보자기를 내려놓고 검과 샷건을 들었다.
“어째 계속 너만 쫓아오는 거 같은데…”
“…인기인은 고달픈 법이야. 몰랐어?”
실없는 농담이 신호라도 된 건지, 하수도 너머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점차 커지는 소음을 듣기만 해도 짐작할 수 있다.
‘수인 좀비보다 더 큰 놈이 온다.’
성녀도 비슷한 판단을 내리고 즉시 축복을 빌었다.
“백색의 울쓰바티시여, 저희에게 악을 무찌를 힘을 주소서.”
평소의 방정맞은 목소리는 어디로 간 건지, 기도를 올리는 성녀의 목소리는 경건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런 목소리에 호응하듯, 새하얀 빛이 허공에서 피어나 그녀의 자동소총과 여명의 검에 깃들었다.
“10분은 갈 거야. 여명이 불신자가 아니었다면 30분은 갔을 테지만.”
성녀는 그렇게 말하며 하수도 너머로 총을 겨눴다.
“어때, 지금이라도 개종할래? 원한다면 성녀 직속 성기사도 시켜줄 수 있는데.”
“…10분 내로 끝내자.”
여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녀가 방아쇠를 당겼다.
탕!
새하얀 빛을 내뿜는 총알이 하수도를 밝히고, 어둠 너머의 무언가를 꿰뚫었다.
번쩍!
다음 순간, 총알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일순간 하수도를 뒤덮은 빛 아래, 여명과 성녀를 향해 달려드는 녀석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조금 전에 봤던 늑대 수인 좀비들과 그 사이사이에 있는…
“…핀드?”
고릴라의 몸에 팔을 두어 개쯤 더 붙이고, 거기에 늑대 머리를 뒤섞어놓은 것 같은 거대한 덩치의 괴물.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드는 녀석들을 보며 성녀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좀비 다음에는 괴물이라니…”
“정석적인 조합이네.”
“정석? 대체 어디서 그런 정석을 쓰는데?”
성녀가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묻건 말건, 여명은 좀비와 핀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새하얗게 물든 검신 위로 파양결의 마나가 추가되는 것과 동시에, 맨 앞에 나선 핀드에게 검을 찔러넣었다.
“주, 죽 어!!”
만주에서 마주쳤던 괴물들보다 훨씬 똑똑한 건지, 핀드는 주둥이를 벌려 말까지 내뱉었다.
물론, 여명은 대답 대신 녀석의 주둥이에 검을 처박아줬다.
푸확!
녀석의 피는 좀비들의 그것과 달리 뜨거웠다. 여명은 개의치 않고 재차 검을 휘둘렀다.
핀드는 좀비와 달리 쉽사리 죽어주지 않았다. 머리를 반으로 쪼개도, 바로 죽지 않고 손을 뻗었다.
생각 없이, 본능에 따라 휘두르는 게 아니었다. 그의 발목이나 무릎을 노리는 영악한 공격.
한 번만 넘어트릴 수 있다면, 질량으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심신이겠지.
‘…누군가 조종하는 놈이 있나?’
좀비와 달라진 방식에 여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발악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으나, 검술의 맥이 끊기는 게 문제였다.
그가 핀드의 발악을 피해 거리를 벌릴 때마다, 더 많은 좀비와 핀드가 그를 둘러쌌다.
하지만 녀석들의 공격이 유효타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탕!
여명의 검이 주춤할 때마다, 성녀의 총알이 그 틈을 메꿔줬으니까.
후방지원이 한 명 추가됐을 뿐인데, 혼자서 좀비들과 싸울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여유롭게 검을 휘두를 수 있었다.
얼마나 여유가 있었으면, 성녀가 농담을 던질 정도였다.
“여명! 총알 아끼게 검기 좀 쏴!”
여명은 그렇게 했다. 그동안 참았던 울분을 토해내려는 것처럼, 검 가득 마나를 모아 가로로 길게 허공을 베었다.
화아악!
오랜만에 펼쳐진 검기가 바람을 일으키며 하수도를 양단했다. 진짜 하수도였다면 벽까지 갈라버렸을, 강맹한 일격.
그렇게 검기가 지나간 자리로, 핀드와 좀비들이 반으로갈라지며 후두둑, 내장을 쏟아냈다.
“…와, 저건 볼 때마다 강해지네.”
피바다가 된 하수도를 본 성녀의 감상을 뒤로한 채, 여명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혹시나 마음속 살기가 움직이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이었으나, 다행히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성녀, 긴장 풀지 마. 아직 많이 남았어.”
여명의 말마따나, 하수도 너머에서는 좀비와 핀드가 계속 몰려오고 있었다. 성녀는 탄창을 갈아 끼우며 대답했다.
“흐, 이러고 있으니까 만주 생각난다.”
“…그런가? 난 딱히?”
“…눈치 없기는, 이럴 땐 아니라도 맞장구쳐주는 거야. ”
“거짓말하지 말라. 내가 아는 다섯 신의 교리가 틀린 건가?”
“여인의 몸을 함부로 만지지 말란 교리는? 여명은 엉덩이 앞에서만 불신자가 되나 봐?”
“….”
…쟤는 어째 총만 들면 성격이 달라진단 말이지. 여명은 실없는 생각을 하며 다시 마나를 끌어 올렸다.
아직 죽여야 할 핀드와 좀비가 많이 남아있었다.
***
마음속 감각을 따라가라.
세티는 쇠미리의 말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정말로 하수도 저편에서 무언가가 느껴진 까닭이었다.
여명도 이 하수도에 왔을까? 아니, 분명 왔을 것이다.
딱히 증거는 없었지만, 그녀는 확신에 가까운 믿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금세 증거가 나타났다.
어느 순간 하수도를 가득 채운 좀비의 시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세티는 알 수 있었다. 이 좀비들을 토막 낸 장본인이 여명이라는 것을.
‘…찾았다.’
세티는 조금 더 속력을 높였다. 뒤를 따라오는 꺼림칙한 2학년 선배와 전윤성이 뭐라고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 전윤성은 혐오의 대상이었으니까.
한때는, 그를 미래의 동료로 생각한 적도 있었다.
질투와 경외를 뛰어넘어, 언니를 구원해줄 영웅으로 생각한 적도 있었고.
하지만 녀석의 진실을 알게 된 그 날 이후, 세티는 단 한 번도 전윤성을 동등한 인간으로 생각해본 적 없었다.
언젠가…전 씨 부자(?子)는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세티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하수도 코너를 돈 순간.
그녀의 가슴속에서 느껴지던 간질거림이 사라졌다.
“…성녀? 여명?”
하수도 저편, 성녀와 여명이 피 웅덩이 위에 앉아 있었다.
“어? 세티? 세티다!”
그녀를 발견한 성녀가 활짝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고, 여명도 검을 닦던 손을 멈추고 세티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찾았어. 세티는 기쁜 마음으로 여명에게 달려갔다.
아니,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녀를… 정확히는 그녀의 뒤편을 바라보는 여명의 눈동자가 딱딱하게 굳었으니까.
그건 세티가 여태껏 본 적 없는, 증오로 가득 찬 눈동자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