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26)
을 위한 세계는 없다-126화(126/817)
〈 126화 〉 복수의 갈림길 (4)
* * *
***
공기가 변했다.
하수도에 떠도는 피 냄새나, 썩은 내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마나를 느끼는 육감이 쪼그라들 정도로 섬뜩하고 진한 살기.
성녀는 자신도 모르게 살기의 진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바로 조금 전까지 그녀와 농담을 주고받던 남자가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성녀는 그가 한없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굳어버린 그의 얼굴, 검을 꽉 쥔 손, 그리고 무언가를 억누르듯 가라앉은 황금빛 눈동자까지.
‘…쇠똥구리?’
어째서일까? 말로만 들었던 여명의 옛 이름을 떠올리자, 뭔가를 이해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성녀가 확신에 가까운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 세티의 뒤편을 바라본 순간, 주변을 채우던 살기가 거짓말처럼 싹 사라졌다.
마치, 저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살기를 숨기려는 것처럼.
백 마디 말보다 확실한 행동이었다. 성녀가 침을 삼키는 사이, 여명이 입을 열었다.
“…성녀, 내가 신호하면, 전윤성을 쏴.”
오직 성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
예전 같았다면, 성녀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그를 타박했을 것이다. 최소한 왜냐고 이유라도 물어봤겠지.
하지만 그에게 너무 많이 감화되어버린 성녀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다른 말이었다.
“…죽여?”
“아니, 그냥 무력화만 시키면 충분해. 정 방해된다면… 내가 알아서 죽일 테니.”
성녀는 대답 대신 들고 있던 총에 축복을 걸었다.
그것을 확인한 여명은 검과 샷건을 챙긴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플레이어와 어떻게, 어떤 순간에 만나게 될까.
들끓는 감정이 가슴을 불태울 때마다, 몇 번이고 떠올린 질문.
쫓고 쫓기는 치열한 추적 끝에 만나게 될까? 아니면 원수와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듯,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만나게 될까?
어쩌면, 녀석이 몰래 숨겨놓은 아지트에서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상상만큼 극적이지 않았다. 치열한 추격전도, 절체절명의 상황도 없었다.
우연과 우연, 그리고 작은 필연.
플레이어가 아카데미 2학년으로 숨어있다는 걸 몰랐다면, 녀석이 특유의 실실거리는 웃음을 짓지 않았다면, 그리고…
전윤성의 허리에 매달린 제국 기사의 검을 보지 못했다면.
녀석이 쇠똥구리를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여명 또한 그를 알아보지 못했으리라.
‘우연에 필연이 겹치면…운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쇠똥구리는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이게 정말로 운명이라면, 참으로 얄궂은 일이라고.
녀석이 청소부들을 죽인 그날처럼, 피 냄새와 오물이 가득한 공간에서 녀석과 마주하게 되다니.
한 걸음 한 걸음, 녀석에게 가까워질수록 그는 들끓는 살기를 삼켰다. 마음속 쇠똥구리가 비명을 내지르고, 검을 쥔 손에 땀이 찼다.
하지만 그럴수록, 머리를 차갑게 했다.
‘녀석의 강함은 미지수. 최대한 첫 기습으로 끝낸다….’
여명이 그런 생각을 하며 네 사람 앞에 도착한 순간, 플레이어가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나섰다.
녀석은 특유의 실실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여명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가 바로 소문의 그 편입생이지? 반갑다. 나는 2학년에 재학 중인 아서스라고 해, 1학년의 구원자를 만나게 돼 영광이야.”
여명은 녀석과 악수하는 대신, 뒤에 서 있던 세티에게 눈길을 보냈다.
대화는 필요 없었다. 그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던 세티는 단박에 그의 눈빛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으니까.
하지만 플레이어는 두 사람을 보며 뭔가를 오해한 듯,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혹시 내가 너무 눈치가 없었나? 애인끼리 먼저…”
그렇게 녀석이 손을 빼는 순간.
여명은 들고 있던 샷건 방아쇠를 당겼다.
터엉!!!
완벽한 기습이었으나, 플레이어의 몸에 산탄이 박히는 일은 없었다.
녀석이 차고 있는 팔찌에서 반투명한 보호막 뿜어져 나와, 산탄을 전부 막아낸 덕분이었다.
“이런 씹…!”
뒤늦게 플레이어가 반응했지만, 여명의 검이 조금 더 빨랐다. 기다란 은빛 선이 녀석의 목을 노리고 쏘아졌다.
이번에도 보호막이 펼쳐지며 녀석의 몸을 보호했다. 하지만 파양결의 마나가 담긴 검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파스스!
박살 난 보호막에서 마나 가루가 튀고, 플레이어의 목에 붉은 선이 피어났다.
‘…얕아.’
녀석의 목을 벤 여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보호막 때문에 완전히 목을 베지 못했다. 기껏해야 목젖을 벤 게 전부.
그가 재차 검을 휘두르려는데, 옆에 서 있던 전윤성의 두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너, 이게 무스…!”
그가 반사적으로 플레이어에게 받은 제국 기사의 검을 뽑으려는 찰나, 하수도 저편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탕!
검을 잡은 손등에서 피가 튀었다. 그가 갑작스러운 저격에 반응하기도 전에, 연달아 총격이 쏟아졌다.
무릎과 발목에 한발씩.
축복이 담긴 총알은 손쉽게 초인의 육체를 관통했다. 전윤성은 그대로 균형을 잃고 뒤로 쓰러졌다.
쓰러지는 와중에도,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총알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봤다.
성녀가 대체 왜?
안타깝게도, 그의 질문은 언어가 되지 못했다.
그가 다시 입을 열기도 전에, 세티가 그의 목을 꺾어버렸으니까.
뚜둑.
목뼈가 어긋나는 소리를 끝으로, 전윤성의 몸이 축 늘어졌다.
***
세티가 기절한 전윤성의 목덜미를 붙잡을 때쯤, 여명은 쓰러진 플레이어에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연한 노란색을 머금은 칼날이 하수도와 녀석을 동시에 잘라버릴 기세로 바닥을 쓸었다.
하지만 칼날이 닿기 직전, 플레이어가 허공에서 뭔가를 ‘잡았다’.
번쩍!
빛이 터져 나오는 것과 검이 허공을 가르는 건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칼날에 감촉이 없었다. 눈살을 찌푸린 여명이 빛을 따라 시선을 돌려보니, 하수도 저편에서 플레이어가 나타났다.
녀석의 손에는 작은 보석이 하나 들려있었는데, 마법의 빛이 사라지기 무섭게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 물건의 정체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초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는 물건이었으니까.
흔히 마석이라 부르는, 소비형 마도구.
그것만으로도 모자랐는지, 플레이어는 다시 허공에서 다른 물건을 끄집어냈다. 이번에는 붉은 약병이었다.
“….”
녀석이 상처에 물약을 들이 붓는 걸 보며, 여명은 눈을 가늘게 떴다. 대체 무슨 기술이지?
마법이나 무술은 아니었다. 마나의 이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씨발 새끼가… 선배한테 무슨 짓이야?”
꽤 효과가 좋은 물약인지, 순식간에 상처를 회복한 플레이어가 지껄였다. 당황과 분노가 뒤섞인 말투였다.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검을 늘어트리고, 마나를 끌어 올리며 천천히 녀석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서로의 얼굴이 눈에 잡힐 듯 보일 거리에 이르러, 여명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다. 플레이어.”
“뭐? 씨발?”
플레이어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여명을 훑었다.
“…너 뭐야? 누군데 플레이어란 이름을 알아?”
의문 가득한 말이 흘러나오기 무섭게. 곧장 대답이 돌아왔다.
“쇠똥구리.”
“….”
플레이어는 그를 떠올리지 못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녀석에게 있어 쇠똥구리는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경험치 한 조각에 불과했을 테니.
여명은…아니, 쇠똥구리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떠올리지 못한다면, 떠올릴 수 있게 해주면 그만이었으니까.
쇠똥구리는 그대로 검에 마나를 모았다. 새하얀 빛이 검신을 따라 피어오르고, 그것을 본 플레이어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혜성검…”
다음 순간, 혜성의 빛이 하수도를 가득 채웠다.
***
파삭.
겨우 31개밖에 남지 않은 순간이동 마석이 부서지는 소리에 플레이어는 이를 갈았다.
“씨발.”
검기에 닿은 어깨가 찢어지게 아팠다. ‘인벤토리’에서 물약을 꺼내 즉시 상처에 부었으나, 고통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저벅.
치유가 끝나기도 전에, 녀석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거의 400m가 넘는 거리를 점프했건만, 단번에 그를 찾아냈다는 소리였다.
감지력도 최상급이라 이거지. 플레이어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진짜 주인공은 저쪽이었나 본데…”
녀석이 무슨 이유로 자신을 적대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쇠똥구리가 대체 뭔데? 무슨 암호인가?
뭔가 떠오를 듯 말듯 머리가 간지러웠지만, 역시 떠오르는 건 없었다. 그동안 쌓은 원한이 한두 개여야지.
잠시 그런 생각을 떠올리던 플레이어는, 짜증과 함께 ‘인벤토리’에서 무기를 꺼냈다.
마력탄이 장전된 기관단총과 용비늘로 코팅된 검.
무기를 꺼내고 보니,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주인공이고 자시고 간에, 적이라면 더 크기 전에 잡는 게 나았으니까.
플레이어는 쇠똥구리가 다가오는 하수도를 향해 역으로 달렸다. 그리고 하수도 코너에서 쇠똥구리와 마주친 바로 그 순간.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투투투투투투!!
코앞에서 쏟아지는 총알을 마주한 쇠똥구리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능숙하게 검을 휘두르며, 머리와 심장을 보호했다.
실전 경험, 적어도 총격전을 겪어본 녀석이 틀림없었다. 아, 만주 용병 출신이라고 했지?
‘진짜 오늘 죽여야겠어.’
살려두면 두고두고 후환이 될 놈이었다. 플레이어는 탄창을 다 비운 총을 내던진 뒤, 인벤토리에서 연발 샷건을 꺼냈다.
게임에서 증명된, 저렙 초인에게 가장 효율적인 무기.
하지만 그가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반투명한 무언가가 날아와 총구를 꿰뚫었다.
파스스!
“시발, 이중 특성?”
플레이어는 총구를 틀어막은 얼음송곳을 보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혜성검에 마법까지?
그가 연발 샷건을 집어 던지기 무섭게, 쇠똥구리가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빨랐다. 플레이어가 미처 다른 총을 꺼내지 못할 정도로.
쩌엉!
검과 검이 부딪혔다. 손잡이에서 올라오는 감촉이 짜릿했다.
하지만…
‘…검술이 생각보다 조잡하네?’
플레이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쇠똥구리와 검을 몇 번 섞은 직후에 떠올린 생각이었다.
혹시 빈틈을 유도하는 건가 의심해봤지만, 몇 번 더 검을 나눠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녀석, 제대로 검을 배운 적 없다.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검술보다는 나은 수준이었지만, 딱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기껏해야 저렙 용 엘프 검술 정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초인 교육원 출신이 아닌 용병 출신이라면 제대로 된 검술을 접할 기회 따윈 없었을 테니.
약점을 찾았으면 이용해주는 게 인지상정.
그는 쇠똥구리가 혜성검을 펼칠 수 없게 거리를 좁히면서, 머릿속으로 한가지 스킬을 발동했다.
구궁번천검(九???).
첫 확장팩이 열리기 전까진, 아카데미 학생은 구경도 하지 못할 진짜배기 검술.
이것을 얻기 위해 귀찮은 NPC들을 한가득 죽여야 했지만,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스킬이었다.
고오오 !
마나를 불어넣음과 동시에, 플레이어의 검에 우윳빛 검기가 깃들었다.
쇠똥구리도 검기를 둘러 반항했지만, 그뿐이었다. 일검에 담긴 위력이, 검초에 실린 정교함이 달랐다.
쩌엉!
검기가 부딪치자마자, 수준 차이가 명확히 드러났다.
플레이어는 그저 머리카락이나 흔들린 데 반해, 쇠똥구리는 교복이 찢어지며 맨살을 드러냈다.
격의 차이를 확인한 플레이어는 계속 검격을 쏟아냈다. 내려찍고, 베고, 찌르며 쇠똥구리를 몰아쳤다.
“혜성검이나 쏘지, 괜히 근접전 걸었다가 큰코다쳤네?”
검을 맞대면서, 플레이어가 비웃음을 내뱉었다. 용비늘로 코팅된 검에서 끼긱, 불씨가 튀었다.
쇠똥구리는 묵묵히 그를 떨쳐내고, 계속검을 휘둘렀다.
‘끝났군.’
플레이어는 칼끝에서 올라오는 감촉을 느끼며 확신했다.
게임 지식을 쓸 것도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결과는 뻔했다.
실시간으로 쇠똥구리의 몸에 쌓이는 상처, 흘러내리는 피, 그리고 격해진 호흡까지.
“야, 뭐 더 없냐?”
승리를 확신한 그는 여유를 부렸다. 일부러 검초를 보여주면서, 놀리듯 툭툭 쇠똥구리의 몸에 상처를 늘려나갔다.
‘주인공이라고 해봤자, NPC는 NPC지. 어딜 주인한테…’
플레이어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검을 휘두른 어느 그때.
쩌엉!
쇠똥구리가 그의 검을 쳐냈다. 여태껏 계속 유효타를 냈던 천충섬전(????) 초식이 막히며 검으로 마나가 역류했다.
뭐지?
플레이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뒤로 물러났다.
혹시 혜성검이 쏟아질지 몰라 순간이동 마석을 꺼냈지만, 쇠똥구리는 혜성검은커녕 다시 몸을 날리며 계속 검술 싸움을 걸었다.
그제야, 플레이어는 위화감을 느꼈다.
‘이 새끼, 아까 전부터 노골적으로 검술만 쓰고 있지 않나?’
혜성검이야 코앞에서 쓸 수 없는 기술이라서 그렇다지만, 아까 보여줬던 얼음송곳도 안 썼다는 건…
쩌엉!!
다음 순간, 쇠똥구리의 검을 막아낸 플레이어는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검술의 차이가 좁혀졌다.
실시간으로 아주 미세하게 좁혀지고 있었기에, 미처 눈치채지 못했을 뿐.
‘설마…’
플레이어는 떠오르는 의심을 떨쳐내기 위해 더욱 강하게 스킬을 발동했다. 아예 죽여버릴 각오로 휘두르는 검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두 사람의 차이는 점점 더 좁혀지기만 했다
쫓고 쫓기는 검술 싸움이 계속되고, 이윽고 두 사람의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을 쯤.
쇠똥구리가 훌쩍 뒤로 몸을 날려 거리를 벌렸다. 플레이어는 쫓아가지 않고 숨을 골랐다.
거친 숨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쇠똥구리가 검을 늘어트리며 물었다.
“그 검술, 이름이 뭐냐.”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플레이어는 중지를 들어 화답했다.
쇠똥구리도 딱히 대답을 바란 건 아닌 듯, 담담한 얼굴로 검을 들었다.
동시에.
고오오 !
그의 검에 검기가 고였다. 플레이어의 구궁번천검과 똑같은, 우윳빛 검기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