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27)
을 위한 세계는 없다-127화(127/817)
〈 127화 〉 복수의 갈림길 (5)
* * *
***
“….”
플레이어는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얼굴을 가득 찌푸린 채, 쇠똥구리와 그의 검을 번갈아 바라봤다.
“뭔 씨발…”
검을 쥐락펴락하며 내뱉는 말. 녀석은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듯,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눈앞에서 검술을 빼앗긴 충격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쇠똥구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온몸에 마나를 돌리며 그동안 입은 상처를 재생했다.
가장 먼저 피가 멎었다. 총알이 꿰뚫은 자리가 메워지고, 칼에 베인 상처가 제자리를 찾는다.
압도적인 재생력.
그것을 본 플레이어의 표정이 더더욱 일그러지는 사이, 재생을 끝낸 쇠똥구리는 길게 심호흡했다.
후우
정상화된 육체를 따라 마나가 재 정렬되자, 우윳빛 검기가 한층 더 강해지며 하수도를 밝혔다.
누가 봐도 플레이어보다 더 높은 수준의 검기.
“이제 다시 시작해볼까. 플레이어.”
황금색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으며 녀석과의 거리를 가늠했다. 비각술 한 번이면 목에 칼을 쑤셔 넣을 수 있는 거리였다.
죽여.
슬쩍 뒷걸음질 치는 플레이어를 보며, 마음속 살기가 속삭인다.
사지를 토막 내,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고, 시체를 짓밟아.
녀석이 가족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빠르고, 잔혹하게.
쇠똥구리는 그러겠노라고 대답하면서도, 이성의 끈을 놓지 않았다. 지금은 칼끝을 차갑게 할 때였다.
이런 기회가 언제 다시 올지 몰랐다.
만약 여기서 녀석을 놓친다면, 앞으로 길고 긴 추격전을 벌여야 하리라.
그러니…
‘반드시 여기서 죽인다.’
짧은 각오를 끝으로, 쇠똥구리는 하수도 바닥을 박찼다.
타닥!
깃걸음 위로 파양결의 마나가 겹쳐 치고, 플레이어와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우윳빛 검기에 휩싸인 검이 하수도의 공기를 갈랐다.
쾅!
검과 검이 부딪히고, 같은 색의 검기가 끊어질 듯 요동쳤다. 밀리는 쪽은 플레이어였다.
단순히 힘의 문제가 아니었다. 똑같은 검초가 펼쳐질 때마다, 쇠똥구리의 검이 한발 앞서 궤적을 그렸다.
플레이어로서는 기가 차는 일이었다. 조금 전 쇠똥구리를 몰아치던 그 방식 그대로 당하게 될 줄이야.
하지만 상대를 가지고 놀 생각에 가득 차 있던 플레이어와 달리, 쇠똥구리가 가진 목적은 단 하나뿐이었다.
살인.
녀석이 빈틈을 보인 순간, 쇠똥구리의 검이 허벅지를 파고들었다.
오른 다리가 길게 베인다. 아슬아슬하게 뼈가 잘리는 건 막았지만, 균형이 무너지는 건 필연이었다.
쇠똥구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대로 검을 올려 쳤다.
플레이어는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막았으나, 오히려 그것이 패착이 되었다.
쇠똥구리의 노림수는 처음부터 그의 손이었으니까.
푸확!
검을 쥐고 있던 오른손이 잘려 나가는 동시에,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우윳빛 검기가 당황과 고통이 뒤섞인 눈동자를 비춘다.
쇠똥구리는 머뭇거리지 않고 그대로 녀석의 목을 향해 검을 내리찍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녀석의 왼손이 허공에서 마석을 꺼냈다.
번쩍!
마석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녀석의 몸을 휘감았다.
산의 눈물이 허공을 가르기 무섭게, 순간이동의 빛은 하수도 너머로 빠르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쇠똥구리는 당황하지 않고 비각술을 펼쳐 빛을 추적했다.
그의 속도로 순간이동을 앞지르는 건 무리였지만…
‘다음 수를 틀어막기엔 충분해.’
그의 예상은 정확했다. 녀석이 순간이동을 끝냈을 때, 쇠똥구리와 녀석과의 거리는 채 10m가 넘지 않았으니까.
“씨발.”
플레이어는 달려드는 쇠똥구리를 보며 또다시 마석을 꺼내 순간이동을 발동했다.
번쩍!
그 이후에도, 그 이후에도.
녀석은 수도 없이 순간이동을 반복했지만, 지혈할 시간도, 그렇다고 다음 수를 준비할 시간도 벌지 못했다.
“미친 새끼가!”
쇠똥구리의 체력이 먼저 바닥나느냐, 아니면 자신의 마석이 먼저 바닥나느냐의 싸움.
상상도 못 한 소모전에 플레이어는 이를 물었다.
순간이동 마석이 얼마나 귀한 물건인데, 이따위로 낭비하게 되다니.
‘씨발, 딱 30초만 있었어도…’
애꿎은 마석을 계속 낭비하면서, 플레이어는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수많은 공략본 중 어디에도, 상대의 기술을 실시간으로 복제하는 미친놈에 관한 정보는 들어있지 않았으니까.
‘어쩌지? 어떻게 해야…’
플레이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마석을 한 번 더 발동하려는 찰나.
파스스!
하수도 저편에서 날아온 얼음송곳이 그의 왼손을 꿰뚫었다.
“아악!”
땅으로 추락하는 마석, 코앞까지 다가온 쇠똥구리의 증오 어린 얼굴과 우윳빛 검기.
플레이어가 무의식적으로 눈을 질끈 감은 그 순간.
“캬아아악!”
하수도 옆에서 핀드가 튀어나왔다. 거대한 괴물은 그대로 쇠똥구리에게 몸을 던졌다.
스아악!
쇠똥구리는 즉시 핀드의 몸을 두 동강 내버렸지만, 그 핀드는 시작에 불과했다.
아 우 우!
뒤이어, 어둠 너머에서 달려온 좀비 떼와 핀드가 쇠똥구리를 덮쳤다.
눈에 보이는 것만 수십 마리는 될법한 숫자.
순식간에 하수도를 가득 채우는 녀석들을 보며 플레이어는 환희를 느꼈다.
살았다.
그는 즉시 왼손을 바닥에 휘둘러 얼음송곳을 깨부쉈다.
끔찍한 고통이 올라왔지만, 머리를 가득 채우는 아드레날린과 죽음의 공포는 그의 몸을 계속 움직이게 했다.
깡, 깡!
어느 정도 얼음을 깨부순 그는 간신히 손가락을 움직여 ‘인벤토리’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붉은 물약을 꺼냈다.
그리고 그가 붉은 물약을 입에 가져다 댄 바로 그 순간.
여명의 검에서 혜성의 빛이 터져 나왔다.
***
여명과 플레이어가 하수도 저 너머로 사라진 직후.
성녀는 다가오는 세티를 보며, 특히 그녀가 질질 끌고 오는 전윤성을 보며 물었다.
“주, 죽인 거야?”
목덜미를 붙잡힌 전윤성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시체가 떠오르는 모습.
성녀는 동급생이 죽었단 사실에 약간 충격을 받은 눈치였으나, 정작 세티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안 죽었어.”
“아무리 봐도 죽은 거 같은데…?”
“목뼈를 뽑아버리면 모를까, 이 정도로는 안 죽어.”
세티는 그 말을 증명하려는 것처럼 전윤성을 하수도 구석탱이에 집어던졌다.
성녀가 다가가 그의 상태를 확인해보니, 정말로 숨을 쉬고 있었다. 거기다 총상마저 서서히 재생되고 있는 게 아닌가.
“재생력이 무슨… ”
용의 공격도 버텨내던 여명과 비교하면 모자랐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수준을 아득히 벗어난 재생력이었다.
지난 초인 올림피아에서 만났을 땐 이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깨어나기 전에 한 발 더 쏴놓을까?’
성녀가 리볼버를 만지작거리며 그런 고민을 떠올리는 사이.
세티는 드워프 키만 한, 그러니까 사람의 가슴까지 올라오는 거대한 망치를 어깨에 걸치며 말했다.
“나는 이대로 여명을 도우러 갈 테니까, 주변 경계 잘하고 있어.”
“뭐? 혼자 가겠다고?”
“…이 좁은 하수도에서 여러 명이 가봤자 낭비야.”
그렇게 세티가 여명이 사라진 방향으로 뛰쳐나가려는 순간, 성녀가 그녀의 치맛단을 붙잡았다.
“…나도 갈래.”
“안 돼.”
칼 같은 거절이었다. 성녀는 조금 머뭇거리며 세티와 쇠미리, 그리고 전윤성을 차례대로 바라봤다.
세티는 재촉하듯 말했다.
“감정적으로 판단하지 마, 여명의 속도를 쫓을 수 있는 게 나뿐이라서 내가 가겠다는 거니까. 너는 여기서 두 사람을 지키는 편이 효율적……”
“…전윤성은 쟤 혼자서도 충분히 지킬 수 있잖아.”
성녀는 쇠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태껏 아무 말 없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던 쇠미리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그건 저도 싫은데요.”
“…뭐?”
“여기서 이분과 단둘이 있기 싫다고요.”
성녀는 ‘오, 다섯 신이시여’라고 중얼거리더니 새하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싫긴 왜 싫어? 쟤가 너 좋아하는 거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데.”
그러니 여명한테 꼬리 치지 말고 꺼져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지만, 그런 말이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쇠미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미국인은 좀…”
“…미국이 어때서? 너 반미주의자야?”
“예, 당연하죠.”
“…?”
“전 엘프인걸요?”
뜬금없는 고백에 성녀의 안대가 들썩거렸다. 아마 눈살을 찡그리는 것이리라.
“엘… 뭐? 엘프?”
쇠미리는 대답 대신 슬쩍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러자 귀를 가리고 있던 환영 마법이 풀리며 그녀의 진짜 귀가 드러났다.
인간의 그것과 확연히 다른, 기다란 귀.
“너… 너, 진짜?”
성녀가 뭐라 말을 잇지 못하는 가운데, 쇠미리는 품에서 작은 완드를 꺼내며 덧붙였다.
“그리고, 성녀님과 세티, 두 분 다 쇠똥구리씨에게 갈 필요 없어요.”
“…”
“더 중요한 일도 있고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지금 여명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다고?
“저쪽.”
“저쪽?”
“마나를 감지해보세요.”
쇠미리는 그렇게 말하며 여명이 떠난 방향의 반대편을 가리켰다.
좀비와 핀드의 시체가 가득 쌓인 하수도 너머.
어딘가 불길한 어둠과 마주한 성녀는 자기도 모르게 마나를 펼쳐 감각을 확장했다.
잠시 눈을 감고 감각에 집중했더니, 정말로 아주 묘한 마나를 잡아낼 수 있었다.
하수도를 가득 채우고 있는 뒤틀린 마나와 전혀 다른, 정순한 마나.
어디선가 느껴본 적 있는 마나였다. 이걸 어디서 느껴봤더라?
성녀가 잠시 기억을 뒤적이는 사이, 세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차원문?”
그제야, 성녀는 저 마나가 지구로 넘어올 때 봤던 개성 차원문의 마나와 닮았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왜 여기서 차원문의 마나가…?’
의문을 떠올리던 성녀는 불현듯, 저번에 봤던 예지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정체 모를 차원문에 빨려드는 여명과 세티.
이미 바뀐 미래라고 생각했는데… 만에 하나, 그 예지가 이 순간을 뜻했던 거라면?
성녀는 지독한 불안감을 느끼며 세티를 바라보았다.
세티는 여명에게 가려던 걸음을 멈춘 채, 마나가 느껴지는 어둠 저편을 노려보고 있었다.
뭔가를 고민하는 건지, 그녀는 아주 잠시 뜸을 들였다가, 쇠미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 지금 여명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지?”
쇠미리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티 나요?”
“….”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성녀가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눈을 껌뻑이건 말건, 세티는 계속 말을 이었다.
“지금… 그 사람 어때? 내가…아니, 우리가 도와주지 않아도 돼?”
“네. 우리가 도와줄 건 없어요.”
확신에 찬 대답. 세티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널브러진 전윤성의 목덜미를 다시 붙잡았다.
“그럼… 할 일은 정해졌네, 가자.차원문으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