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31)
을 위한 세계는 없다-131화(131/817)
〈 131화 〉 막간 파순
* * *
***
시베리아, 베르호얀스크라 불리던 도시의 깊은 곳.
피처럼 붉은 약물이 가득 찬 수조에서, 파순은 눈을 떴다.
“웁, 우욱”
그가 깨어나자마자 처음으로 한 일은, 폐와 위장에 가득 찬 역겨운 약물을 토해내는 일이었다.
“우웨에엑!”
정신없이 토하고, 숨을 들이쉬고, 다시 토하기를 한참.
오랜만에 산소를 빨아들인 뇌가 기능을 되찾고,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용의 동굴이 떠오를 정도로 거대한, 콘크리트 공동.
공동의 한쪽 벽면에는 살아있는 동물과 괴물들이 갇힌 우리가 쌓여 있었고, 반대편 벽면에는 녹색 액체가 가득 담긴 유리관이 쫙 가득했다.
파순이 잠들어 있던 수조는 공동 한가운데에 있었는데, 그 외에도 건장한 인간의 시체가 여럿 잠겨 있었다.
‘언데드 실험실… 젠장.’
파순은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이끌고 수조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가 수조 바깥의 바닥을 밟는 순간.
꺄아아아아!!!
바닥에 널브러진 해골 하나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아마 마법적인 경보기인 듯싶었는데, 소리가 지랄 맞기 그지없었다.
“…좀 닥쳐.”
파순은 인상을 콱 찌푸리고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작은 지풍이 총알처럼 날아가 해골을 박살 내버렸다.
“어떤 새끼 실험실인지… 영 개판이네.”
파순은 그렇게 투덜거리곤, 입을 옷을 찾아 공동의 이곳저곳을 들쑤셨다.
이 몸뚱이는 아랫도리가 허전해서 알몸으로 돌아다니기가 영 불편했다. 뭐라도 하나 걸치지 않으면 단전이 차가워진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는 굴러다니는 거적때기를 대충 걸쳐 입은 뒤 실험실의 주인을 기다렸다.
감히 어떤 놈이 자신을 실험체 취급한 건지 확인하려는 심산이었다.
짚이는 녀석은 많았다. 구더기, 별내장, 독화, 그리고…
쿠구구궁!
파순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공동의 벽이 갈라지며 실험실의 주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누가 감히 나의 공방을 침범하느냐…!
거대한 해골 드래곤, 카할 마그두.
용의 둥지만큼이나 크다 싶었는데, 진짜 용이 쓰던 곳이었어?
파순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안으로 들어선 녀석에게 손을 흔들었다.
파순?
그를 발견한 용의 눈, 정확히는 두개골 눈구멍 속 푸른 불꽃이 가늘어졌다.
어떻게 부활한…?
해골바가지가 질문을 내뱉는 것보다, 파순이 손에서 장풍을 쏘아내는 게 조금 더 빨랐다.
대기를 찢어발기며 날아오는 장풍을 본 해골용은 즉시 마나를 배열해 보호막을 펼쳤다.
까가강!
무공과 반투명한 보호막이 부딪치며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리고, 뒤이어 마나 가루가 흩날렸다.
카할 마그두는 즉시 반격 마법을 준비하려다가, 이곳이 자신의 공방이라는 걸 떠올리고 황급히 입을 열었다.
파순, 잠깐! 그새 조직의 룰을 잊었나? 우리끼리는 공격하면 안 된다.
용이 주둥이를 나불거리자마자, 파순이 이를 갈았다.
“룰? 시발, 룰을 어긴 건 네놈이 먼저지! 감히 날 강시로 만들려고 해?”
파순이 자신이 잠겨 있던 수조를 가리키며 소리치자, 해골용은 슬쩍 날개를 펄럭였다.
사람으로 치면 어깨를 으쓱이는 행동이었다.
강시라니? 데스나이트로 만들고 있었다만.
“그게 그거지 애미 없는 용 새끼야!”
파순은 당장이라도 용의 해골을 날려버릴 것처럼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러나… 그게 공격으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파순이 그대로 무공을 펼치려는 찰나.
카할 마그두의 뒤편에서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쓴 괴인이 공방으로 들어왔으니까.
“둘, 다… 그만…”
시체처럼 낮게 깔린 목소리에는 나름의 카리스마가 담겨 있었다. 그 목소리를 마주한 파순은 무공을 거두고 언성을 높였다.
“별내장! 시발, 어디 변명이라도 해봐라! 하라는 부활은 안 하고 감히 용 뼈가리 새끼한테 나를 넘겨?!”
별내장이라 불린 괴인의 탁한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그는 노발대발하는 파순의 위아래를 훑으며 대답했다.
“파순… 그건, 오해다…”
“오해는 시발, 내 발로 저 약통에서 걸어 나온 게 10분도 안 지났는데 뭔 놈의 오해야? 너도 오해로 뒤져볼래?”
“오히려… 내가, 묻고 싶다… 네, 영혼은… 소멸, 했었다…어떻게… 되살아난, 건가…?”
“소멸? 무슨 개소리냐?”
정말로 모르는 듯한 말투에 별내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교단의… 오물, 신들조차…너의, 영혼을… 찾지… 못했다….”
“….”
“난… 당연히, 영혼 채로… 소멸했으리라… 생각, 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할 마그두가 흥미롭다는 듯 콧김을 내뿜었다.
소멸한 영혼이 돌아오다니? 네크로맨서라면 누구나 귀가 솔깃해질 이야기 아닌가.
하지만 정작 파순 본인의 반응은 시원찮았다. 그는 이죽거리듯 말했다.
“…소멸은 무슨, 난 여태껏 갇혀있었다고.”
“갇혀, 있었다…? 어디에…?”
파순은 대답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그의 입에선 아무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벙긋거리는 입, 기묘한 침묵.
뒤늦게 이상을 느낀 파순이 입을 다문 순간.
그의 눈코입에서 피가 푸확, 터져 나왔다.
“…이런, 쿨럭, 젠장.”
파순은 당황한 듯 자신의 눈코입에 마나를 집중했다.
하지만 아무리 혈관을 차단하고 재생력을 모아봐도, 출혈은 멈출 생각을 하질 않았다.
단순히 물리적인 출혈이 아니라, 저주에 가까운 출혈.
그것을 깨달은 별내장은 즉시 파순에게 달려가 그의 입을 꾹 눌렀다.
“신비(??)를… 함부로… 입에, 담아… 저주… 받았다… 어서, 침묵을… 맹세, 하라…”
입이 막힌 파순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출혈이 멈추고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으니까.
“무시, 무시한… 곳에… 갇혀,있었군…”
“….”
“다시는… 입에… 담지, 마라… 맹세를… 어기면… 이번엔, 출혈로… 끝나지… 않을, 테니…”
별내장의 경고에 파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이 갇혀있던 ‘그 녀석’의 심상을 떠올리다가, 퉤 피를 뱉었다.
“…인생 참, 꼬이려니 별 지랄을 다 당하네.”
“이해, 한다… 신비란… 그런, 것… 이지…”
***
영혼에 관한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지켜보던 카할 마그두는 이런 재미없는 결말이 같은 소리를 지껄였고, 파순은 중지를 들어 화답했다.
“뭐…살아났으니 됐어. 일 이야기나 해봐. 내가 없는 동안 계획은 어디까지 진행됐냐?”
별내장은 주제를 돌리는 파순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 시카고에서… 눈물,을… 찾을, 차례다…”
시카고? 파순은 그게 어디였나 고민하다가, 문뜩 시카고의 드워프들을 떠올렸다.
둔간 중공업의 난쟁이들. 그 녀석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녀석’과 관련되어 있었으니까.
“…시카고는 안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어째, 서…?”
파순은 대답 대신 입에 지퍼를 잠그는 시늉을 했다.
침묵.
너무나 노골적인 제스처에 별내장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흐, 음… 방향을, 바꿔야… 하는가?”
“뭐, 내 생각은 그래.”
“크흠, 크흠…”
별내장은 한숨인지 헛기침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낸 뒤, 벽면에 쌓인 우리로 걸음을 돌렸다.
“방향을, 바꾸겠다… 신비… 엮이지, 않는… 것이… 상책…”
그는 그렇게 말하며 우리 속에서 어린양 한 마리를 꺼냈다.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걸까, 양은 가냘픈 목소리로 울며 별내장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듯 발버둥 쳤다.
그러나 그 발버둥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양이 별내장의 손을 물려는 순간, 그가 품에서 단검을 꺼내 양의 배를 갈랐으니까.
메에어린 양의 단말마와 함께 피와 내장이 바닥을 가득 적셨다. 그 꼴을 보고 있던 카할 마그두와 파순이 동시에 눈을 찌푸렸다.
하필 공방에서…
“점을 볼 거면 내장 말고 그냥 별 보고 하면 안 되냐?”
“별이, 뜨려면… 앞으로… 여섯, 시간은… 걸린다…”
둘이 뭐라고 지껄이건, 별내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내장을 살폈다.
고대의 샤먼들이 썼다던 동물 내장점.
마나만 있으면 미래를 볼 수 있는 성녀의 예지와 비교하면 한없이 수준 떨어지는 방법이었으나…
때론 휘발유보다 잘 마른 장작이 더 잘 먹히는 상황도 있는 법.
한참 내장을 뒤적이던 별내장은 무언가를 확인한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곧이어, 그는 고개를 들어 카할 마그두와 파순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차원문… 너머… 남부, 마경… 드레이테리얼… 네크로맨서… 요정… 우리는, 결정을…챙겨야… 한다…”
“마경은 무슨, 그냥 황무지면서.”
파순이 한마디 거드는 사이, 카할 마그두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마경에 가야 한다면 내가 가겠다. 오랜만에 고향을 보고 싶군.
“그 덩치로 차원문은 어떻게 넘게? 또 조각조각 뼈를 나눠서 박물관 화물인 척 하려고? 차라리 내가…”
그때, 별내장이 끼어들었다.
“파순… 너는, 안된다… 요양… 해야, 한다…”
요양이나 하라고? 파순의 인상이 팍 찌그러졌다. 그가 한마디 덧붙이려는데, 별내장이 먼저 고개를 저었다.
“예카테리나… 카할 마그두… 둘이, 간다… 넌… 쉬어야, 한다…”
파순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 대신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그는 발을 들어 공방 바닥을 쾅, 내려찍었다.
저, 저 미친년.
쩌적 갈라진 공방 바닥을 보며 카할 마그두가 욕을 내뱉었으나, 파순은 이미 등을 돌린 후였다.
“…니들 맘대로 해라. 난 수련이나 할 테니.”
별내장은 바깥으로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짧게 혀를 찼다.
“운명이… 참, 많이도… 비틀렸도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