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33)
을 위한 세계는 없다-133화(133/817)
〈 133화 〉 주인공을 위한 조난은 없다. (3)
* * *
***
“손님이 오신 건 오랜만이라, 족장님께서 특별히 신경 써서 식사를 준비하셨습니다.”
젊은 오크의 안내를 따라 족장에게 가는 내내 여명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천막을 살피거나, 노골적으로 마나를 펼치기도 했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옆에서 나란히 걸어가던 세티는 여명에게 뭘 찾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가 어련히 알아서 잘할 거라는 믿음 때문이기도 하고, 천막 사이사이로 보이는 어떤 물건들 때문이기도 했다.
탑처럼 쌓인 스팸 박스와 스팸 캔을 재활용해 만든 탁자와 의자.
여명의 말처럼 오크의 주식이 스팸이라는 증거들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였어?’
세티가 문화충격을 느끼는 사이, 두 사람은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족장의 천막.
오크 스무 명이 너끈히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천막은 화려한 붉은 천과 짐승 가죽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사막 유목민의 천막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모습.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여명이 잠시 천막을 감상하고 있자, 길 안내를 한 오크가 소리치며 천막의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가장 먼저 따스한 공기가 두 사람을 반겨줬다.
고급스러운 카펫을 깔아 바닥의 냉기를 막고, 투박한 금속 화로로 군불을 때고 있는 덕분이었다.
“아,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들이 오셨군.”
그다음으로 두 사람을 반겨준 건 천막에 둘러앉은 10명의 오크들이었는데, 가장 상석에 앉은 오크가 두 사람을 보며 입을 열었다.
“반갑소이다, 여행자들. 난 키란 씨족의 족장인 볼두구요.”
오크는 그렇게 자신을 소개하며 가슴을 두들겼다. 그러자 여명 또한 가슴을 두들기며 화답했다.
“…인천 천씨 씨족의 천여명입니다. 손님으로서 씨족의 주인을 뵙습니다.”
그의 인사가 인상적이었던 걸까? 천막에 모인 오크들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특히 볼두구는 흥미로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물을 가져온 것도 그렇고, 우리 문화에 대해 잘 아는 손님이로군. 헌데… 부끄럽게도 이 볼두구는 인천이란 곳을 처음 듣소만, 정확히 어디에 있는 곳이오?”
“…지구의 지명입니다.”
“허, 지구? 아주 먼 곳에서 온 손님이셨군.”
볼두구는 별것 아닌 듯 말했으나, 다른 오크들은 그렇지 못했다.
‘지구’란 단어가 나온 순간, 그들의 눈에 노골적인 감정들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의심과 의문, 그리고… 탐욕.
차원문 너머에서 지구인이 환대받지 못한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상상 이상의 반응이었다.
지구인이 마경에는 왜?
비싸겠군.
저 피부 좀 봐.
물론 그런 반응은 오래가지 않았다.
여명이 눈살을 찌푸리려는 찰나, 볼두구가 바닥을 내려치며 분위기를 바꿔버린 탓이었다.
“어디서 왔건 손님은 손님이다. 전통에 불만이 있는 놈은 당장 나가라!”
그의 말에 반박하는 오크는 아무도 없었다.
헛기침하거나 고개를 돌리는 녀석들도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그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짧은 침묵.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은 걸 확인한 볼두구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우리 씨족의 손님이 된 걸 환영하오. 지구인 천여명.”
“…씨족의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여명은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오크들이 비워둔 방석에 앉았다.
그 사이, 홀로 입구에 남은 세티는 자기소개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함흥 홍씨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인천 천씨 씨족?’
아무래도 전자보단 후자가 나을 것 같았으나… 안타깝게도, 그녀의 고민은 별 의미가 없었다.
오크들은 놀라울 정도로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으니까.
인사는커녕, 눈빛조차 주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이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뭐지?’
세티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여명이 그녀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갑자기 다들 왜 저러는 거야?”
그의 옆자리에 앉은 세티는 오크들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명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오크 유목민들은 여자랑 말 안 섞어. 특히 임자 있는 여자랑은.”
“….”
“미리 말해줬어야 하는데, 미안.”
여명의 사과에 세티는 피식 웃고 말았다.
“뭐 미안할 거까지야. 내가 임자 있는 여자인 건 사실이잖아?”
세티가 그렇게 속삭이며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찌를 때쯤.
볼두구가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손님맞이를 시작하겠다! 식사를 대령해라!”
그 말을 신호로, 천막 바깥에 있던 오크들이 음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우르르 천막으로 들어왔다.
족장이 특별히 신경 썼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쟁반에 담긴 음식은 한둘이 아니었다.
발효한 밀가루를 넓게 펼쳐 구운 납작한 빵과 구운 스팸.
삶아 으깬 콩을 스팸에 입혀 튀겨낸 스팸 튀김.
스팸 기름을 듬뿍 발라 구운 염소 고기.
으깬 스팸이 들어간 피순대와 곡물가루를 저민 스팸에 묻혀 튀기듯 팬에 구운 스팸 전.
그나마 맨 마지막에 들어온 요구르트에는 스팸이 없…… 지 않았다.
여명이 슬쩍 확인해보니, 요구르트 속에도 잘게 썬 스팸 조각들이 들어있었다.
‘…이 정도면 주식이 아니라 괴식의 영역 아닌가?’
세티는 목 끝까지 올라오는 말을 삼켰다.
식문화는 상대적인 법이다. 왜, 한국인들도 김치볶음밥에 김치 반찬을 곁들여 먹지 않던가.
무슨 꿀꿀이 죽이나 독이 들어간 것도 아니고, 쟁반에 담긴 건 모두 요리라고 부를만한 음식이었다.
그저, 스팸을 너무 많이 썼을 뿐.
그녀가 눈 딱 감고 음식을 집어 먹어보니, 생각보다 맛있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사막에서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요리 솜씨가 뛰어난 사람이 만든 듯했다.
‘…정말 오크가 만든 건가? 사람이 만든 거 아니야?’
세티가 놀람 반, 감탄 반 식사에 열중하는 사이.
볼두구와 여명은 자잘한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어허, 차원문 사고로 마경 한가운데에 떨어졌단 말이오?”
“…불행한 사고였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족장님을 만난 걸 보면, 모르닥께서 저희를 지켜주신 모양입니다.”
“검은 신께선 냉정하시면서도, 한편으론 자비로우시지. 그럼 당장 연락할 친구나 동료들도 없겠군?”
“예, 모두 저희가 죽은 줄 알 겁니다. 하루빨리 연락해야 하는데…”
미묘한 대화와 스팸 기름 냄새가 가득한 식사가 이어지길 한참.
쟁반에 담긴 음식들이 거의 다 바닥을 보일 때쯤, 오크들이 커다란 냄비를 들고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혹시, 부대찌개?
세티는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냄비를 확인해봤으나, 그 안에 담긴 요리는 부대찌개와 거리가 멀었다.
척 보기에도 입맛이 싹 사라지는, 걸쭉한 녹색 국물 요리.
국물 속에는 덩어리 스팸과 염소 머리,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녹색 고기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비주얼도 비주얼이지만, 냄새가 아주 지독했다.
3년쯤 묵힌 시체 냄새라고 해야 할까,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역겨운 냄새.
냄비를 살피던 세티가 반사적으로 우웩 헛구역질을 할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이런.’
짧게 헛구역질을 반복하던 세티는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느끼곤 입을 다물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볼두구를 비롯한 오크들의 표정에 불편함이 가득한 탓이었다.
냄새와 맛이 어떻건 간에, 음식을 앞에 두고 헛구역질을 하는 건 무례라고 여기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세티는 씨족의 손님 아닌가. 주인으로서 얼굴에 먹칠을 당했다고 생각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음… 이거 참…”
예상치 못한 무례에 볼두구가 눈살을 찌푸리고, 오크들이 엄니를 만지작거리던 그때.
여명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희 아내가 임신 중이라서…”
뭐? 임신? 갑작스러운 핑계에 세티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겉으로는 부끄러운 척, 시선을 돌리며 즉석 연기를 펼쳤다.
지금 이 순간, 여명이 내뱉은 말보다 더 적절한 핑계는 없었으니까.
“…허어, 입덧이라니. 미리 말해주지 그랬소. 그럼 향이 강한 요리는 자제했을 터인데.”
“죄송합니다. 아직 초기라… 이 정도는 괜찮을 줄 알았습니다.”
“아, 그 마음 이해하지. 이 볼두구도 아내가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비슷한 실수를 했으니 말이오.”
볼두구와 오크들은 둘의 연기에 넘어간 건지, 세티의 헛구역질 대해선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야기만 꺼내지 않았을 뿐, 세티를 향한 그들의 눈빛은 심상치 않았다.
식사 전, 지구인이란 사실을 밝혔을 때와는 또 다른 눈빛이었다.
마치 금화를 보는 것 같은 탐욕스러운 눈동자.
제 딴에는 숨긴다고 곁눈질을 하는 것 같은데… 초인의 감각으로는 손에 잡힐 듯 느낄 수 있었다.
저런 눈빛을 느끼는 건 여명도 매한가지일 텐데. 대체 왜 그냥 내버려 두는 걸까?
세티의 의문이 깊어지는 가운데, 오크들은 역겨운 녹색 요리를 떠먹기 시작했다.
***
“미안, 내가 헛구역질을 해서…”
볼두구에게 양해를 구하고 족장의 천막을 떠난 후, 세티가 내뱉은 첫마디는 그것이었다.
괜히 자신 때문에 여명이 거짓말을 하게 된 거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정작 여명은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아냐, 잘했어. 덕분에 그 역겨운 요리도 안 먹고, 별문제 없이 천막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잖아?”
세티는 입술을 비쭉거렸다.
“…빈말은.”
“빈말 아냐. 정말 어떻게 빠져나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으니까.”
농담인가 싶어 여명의 얼굴을 확인해봤으나, 그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세티, 너도 뭔가 이상하다는 거 느끼고 있지?”
“…대충은.”
여명은 뒤따라오는 유목민 오크를 슬쩍 바라본 뒤, 녀석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부터 마나로 주변을 훑어봐.”
세티는 그렇게 했다. 즉시 몸속 마나를 퍼트려 유목민 야영지 곳곳을 탐지했다.
무수한 천막과 오크 유목민 그리고 스팸 박스까지.
탐지하면 할수록, 뭔가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위화감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 콕 짚어 설명할 수 없었다.
…뭐지?
세티가 의아한 표정으로 여명을 바라보자, 그가 힌트를 덧붙였다.
“아이와 여성.”
“….”
아이와 여성? 그제야 묘한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은 세티의 고운 아미가 휘어졌다.
그녀는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한 번 더 마나를 펼쳐 천막들을 훑었다.
그러나 아무리 감각을 확장해봐도, 유목민 야영지에서 아이와 여성은 찾을 수 없었다. 단 한 명도.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세티는 황당한 얼굴로 여명과 천막촌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무슨 군대나 도적 떼도 아니고, 멀쩡한 천막촌에 건장한 남자뿐이라니.
그녀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는 사이, 여명은 가라앉은 눈으로 천막촌을 바라보며 말했다
“세티, 내가 출발하기 직전에 했던 말. 기억해? ”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경에서 운이 좋으면 유목민이나 노예상을 만날 수 있다… 맞지?”
“그래, 맞아. 나는 둘 중 하나만 만날 줄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둘 다 만나게 됐네. 유목민 겸 노예상.”
“….”
유목민 겸 노예상. 진짜 도적 떼였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천막에서 보여줬던 오크들의 태도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이놈들, 우리가 초인인 줄도 모르고 노예로 잡을 생각부터 했구나.
어쩐지, 지구인이나 임산부란 이야기에 눈을 빛내더라니.
“…여명, 어떻게 할 거야?”
세티는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물었다.
숙소에 있는 망치와 검만 되찾으면… 아니, 당장 맨손으로도 이런 촌락을 쓸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으니까.
“내가 아니라, 세티, 네가 정해”
“…내가?”
“여기서 적당히 쓸어버리고 탈것만 챙겨서 마경을 벗어날 것이냐. 아니면 본거지를 찾아내서 싹 쓸어버리고… 여행 경비까지 챙길 것이냐.”
“….”
“난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고민할 것도 없었다. 세티는 사납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후자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