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34)
을 위한 세계는 없다-134화(134/817)
〈 134화 〉 주인공을 위한 조난은 없다. (4)
* * *
***
족장의 천막에는 적막이 가득했다.
조금 전 식사의 즐거움은 어디로 간 건지, 둘러앉은 오크들 모두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지 않았다.
공기 중에 남아 있던 달콤한 스팸 향기가 전부 사라질 때쯤, 엄니를 만지작거리던 볼두구가 입을 열었다.
“…손님들은?”
“천막에 모셔다드렸습니다.”
“임산부라고 하니 특별히 신경 써라, 땔감도 충분히 넣어드리고.”
여기서 말하는 땔감이란 말린 가축의 똥을 말했다. 장작을 구할 수 없는 사막에서 매우 중요한 연료였으나, 현재 씨족에게 남은 양이 많지 않았다.
부족원들이 쓰기에도 아슬아슬한 양.
그래서였을까? 앉아 있던 오크 중 하나가 불쑥 고개를 들어 볼두구에게 말했다.
“저… 족장님, 굳이 땔감까지 줄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희가 쓸 것도 부족한데… 그냥 바로 감옥에 넣는 게…”
그는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볼두구가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본 탓이었다.
“언제부터 손님을 감옥에 넣는 게 우리 씨족의 전통이 되었나.”
“….”
“잊지 마라. 전통을 잃으면 우리도 정글의 짐승들과 다를 게 없다는 걸.”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족장의 명령을 전하기 위해 오크 한 명이 천막 바깥으로 나갔다.
또다시 적막이 찾아오려는 찰나, 오른 엄니가 부러진 오크가 휙 고개를 들었다.
“다들 뭘 이리 고민하는 겁니까! 그냥 빨리 잡아다 팔아버립시다!”
“…가두두, 그 입 다물어라.”
“족장님,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이건 하늘이 내려주신 기회입니다!”
“기회?”
족장이 눈을 찌푸리건 말건, 가두두는 젊음의 혈기를 감추지 않았다.
“저 지구인들, 도시에 내다 팔면 분명 어마어마한 값을 받을 겁니다! 망령들이 요구한 할당량은 물론이고, 이번 여름 내내 먹을 스팸을 사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단 말입니다!”
“….”
“솔직히 말해, 이런 고민 자체가 시간 낭비아닙니까? 그놈의 전통이 뭐라고? 씨족이 있어야 전통도 있을 수 있는…!”
“그만!”
볼두구가 바닥을 내려치며 소리쳤다. 하지만 가두두는 주눅 들긴커녕 보란 듯 턱을 치켜들었다.
이 자리에 있는 오크 중 누구도 그의 무례를 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몇몇은 가두두의 말에 동조하듯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그 꼴을 지켜보던 볼두구는 이마를 찌푸리며 물었다.
“모두 가두두와 같은 생각이냐? 야만인처럼 전통을 무시하고 손님을 팔아먹는 게 정말로 우리 씨족을 위한 선택이라고 믿는 거냔 말이다!”
이때다 싶었는지, 입을 다물고 있던 오크들이 의견을 내놨다.
“족장님, 현실적으로 생각하십시오. 원래 계획대로 수인들을 잡아 오려면 한 달은 족히 걸릴 겁니다. 씨족들도 많이 죽을 테고요.”
“따지고 보면 노예사냥도 우리 전통이 아니지 않습니까. 망령들이 물러갈 때까진 전통보단 목숨을 챙기는 것이…”
“게다가 상대는 악독한 지구인 아닙니까? 신들께서도 우리를 탓하지 않으실 겁니다.”
의견을 내놓는 건 모두 비교적 젊은 오크들이었는데, 그들의 말과 눈빛에는 하루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만 가득했다.
볼두구는 한숨을 삼키며 천막을 훑었다.
“…다른 의견은? 정말로 한 명도 다른 의견이 없어?”
그나마 연배가 있는 오크들이 거북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그들조차 대놓고 반대 의사를 꺼내진 않았다.
족장도 처음부터 대답을 기대한 질문은 아니었다. 본인조차 마음이 흔들리는 중이었으니까.
혹시나 해서 해본 말에 불과했는데…
뜻밖에도 손을 드는 오크가 있었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흉터가 인상적인 오크.
“발라구? 할 말이 있나?”
발라구라고 불린 오크는 천막의 오크들을 둘러보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족장님, 그리고 존경하는 형제들이여. 제가 사소한 문제 하나를 지적해도 되겠습니까?”
“사소한 문제?”
“모두 손님들을 이미 다 잡은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정말로 그렇습니까?”
“…무슨 소리냐?”
“이미 보신 분들도 있겠지만, 손님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총이 아니라, 검과 망치를.”
“…검과 망치? 지구인이?”
“예, 제가 짧은 식견으로도 어마어마한 고급품으로 보이더군요.”
그의 말을 들은 몇몇 오크들의 눈빛이 묘해졌다.
여태껏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참으로 공교롭지 않은가.
하필 이런 순간, 이런 상황에, 그런 지구인이 씨족의 손님으로…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모두의 생각이 깊어지던 그때, 가두두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고작 임신부 하나와 코딱지만 한 지구인에게 굽실거리기라도 하라는 거냐?”
“그저, 조심하자는 겁니다. 두 손님께서 초인일지도 모르잖습니까.”
“조심? 발라구, 아가리 조심해라. 거기서 한마디라도 더하면 씨족 전사들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하겠다!”
“….”
억지나 다름없는 말에 발라구가 침묵하고, 볼두구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건 말건, 가두두는 오크들을 둘러보며 당당히 말했다.
“형제들, 그리고 족장님! 이런 회의는 때려 치고, 저 지구인들을 팔아 뭘 살지나 논의합시다!”
“무슨…”
“사실, 제가 이미 조금 전에 나간 녀석에게 손님, 아니, 상품을 잡아두라고 명령했습니다.”
가두두의 말이 끝나자마자, 볼두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함을 내질렀다.
“가두두! 네가 드디어 미친 게냐?”
족장의 권한을 침범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다른 오크들도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족장님, 제발 정신 좀 차리십시오! 제가 오죽하면 이랬겠습니까?”
“이 어리석은 것, 찾아온 손님인지 귀인인지 역귀일지 어찌 알고 일부터 벌인단 말이냐!”
“귀인이라면 노예로 팔면 그만이고! 역귀라면 때려잡으면 그만 아닙…!”
그 순간.
쿵!
알 수 없는 충격음이 땅을 울렸다.
***
오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천막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리지?”
볼두구의 의문에 대답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또다시 충격음이 들려왔다, 쿵!
신화 속 거인의 발소리가 이럴까?
이번에는 아예 천막 바닥에 갈린 카페트가 출렁거리고, 오크들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대, 대체 무슨 일이지? 지진인가?”
“마경에서 무슨 지진이 일어난단 말이냐! 헛소리 말고 당장 나가서…”
볼두구가 소리치려는 바로 그때. 천막 바깥에서 들려온 비명이 그의 말을 끊었다.
으아악!!
…님을 불러… 커억!
맞서 싸…!
그건 모두 오크의 비명이었다.
그 비명들은 땅을 울릴 때마다 점점 더 늘어나다가, 천막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뚝 끊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모두 당장 나가라!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확인해!”
뒤늦게 정신을 차린 오크들이 바깥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우르르 일어서는데, 그보다 먼저 누군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정확히는, 오크를 집어던져 문을 박살냈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문이 부서지고, 날아온 오크가 천막 바닥을 굴렀다.
볼두구가 다가가 얼굴을 확인해보니, 조금 전에 손님에게 보냈던 바로 그 녀석이었다.
“설마…?”
오크들이 모두 당황스러운 얼굴로 문밖을 바라본 다음 순간, 사막의 흙먼지 사이에서 검은 머리의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식사는 나쁘지 않았는데, 손님 응대는 영 시원찮네요.”
드워프 키만 한 큼직한 망치를 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푸른 눈으로 오크들을 훑었다.
“…노예상들이라 그런가?”
이 자리에 마나를 느낄 수 있는 오크는 단 한 명뿐이었지만, 오크들은 반사적으로 무기에 손을 올렸다.
그들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눈앞의 저 소녀가 초인이라는 것을.
살벌한 눈빛이 자신에게 쏠렸음에도, 소녀는 피식 미소지었다.
“아, 맞다. 외간 여자랑은 말 안 한다고 했지.”
“….”
“그래도 내가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 여명… 이 아니라, 우리 남편이 나서면 다 죽일 거 같아서 내가 나선 거니까요.”
조롱기 하나 없는 담백한 말투. 그러나 가두두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이 은혜도 모르는 지구인이!!!”
그는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으며 소녀에게 달려들었다.
뭔가 대단한 기술이나 기교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고함을 내지르며 몸 그 자체를 내던지는 단순한 공격.
상대가 평범한 소녀였다면 그의 막무가내 돌진은 나름 치명적인 공격이었을 것이다.
오크의 튼튼한 육체는 그 자체만으로도 무기였으니까.
하지만 소녀는 마나를 다루는 초인이었고, 그의 단검보다도 더 빨리 발을 휘둘렀다.
빠각!
깔끔한 돌려차기가 가두두의 턱에 꽂혔다.
완벽에 가까운 비각술. 가두두의 몸이 붕 떠오르고, 허공을 날아가 우지끈 소리와 함께 천막 기둥에 처박혔다.
가두두는 일어나지 못했다. 몸이 작게 경련하는 걸 보면 죽은 건 아닌 듯싶었지만, 누가 봐도 한동안 깨어나지 못할 모습이었다.
“자, 또 덤비실 분?”
천막 전체에 다시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씨족에서 손꼽히는 전사가 무기도 아닌 발차기 한 방에 나가떨어지다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풍경이었다. 어디 제국 기사나 쓰레기 도시의 궁정백도 아니고, 저 어린 소녀가 어찌…
그러나 아무리 믿기지 않아도 현실은 현실.
씨족의 오크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볼두구를 둘러쌌다.
소녀 또한 망치를 들어 올리고, 당장이라도 칼부림이 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순간.
여태껏 입을 다물고 있던 발라구가 앞으로 나섰다.
“손님, 제가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깊게 허리를 숙이는 그를 보면서도, 소녀는 망치를 내려놓지 않았다.
“뭘 사과할 건데요? 저와 제 남편에게 수면제가 든 술을 준 거? 아니면 손발에 족쇄를 걸어서 노예로 만들려고 한 거? 그것도 아니면 이동식 감옥에 처넣으려고 한 거? 어느 걸 사과할 생각인가요?”
“….”
“뭐… 그래도, 원하는 걸 주시면 못 들어드릴 것도 없죠.”
발라구는 볼두구와 동료들을 슬쩍 바라봤자.
족장은 아무거나 좋으니 이 상황을 끝내 달라는 눈짓을 보냈고, 그것을 본 발라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시는 걸 말씀해 주십시오. 저희의 무례를 용서받을 수 있다면 드릴 수 있는 건 뭐든 드리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진심이 담긴 말이 통한 것일까, 소녀의 표정에도 변화가 생겼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망치 손잡이를 꽉 쥐며 원하는 것을 입에 담았다.
“가진 거 다 내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