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35)
을 위한 세계는 없다-135화(135/817)
〈 135화 〉 주인공을 위한 조난은 없다. (5)
* * *
***
두 개의 달이 떠오른 마경의 밤, 발라구는 사막 위에 무릎을 꿇었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요.”
그는 수갑을 들고 오는 여명을 보며 말했다. 드디어 올 게 왔다는 말투였다.
여명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다른 천막에서 챙겨온 수갑을 발라구 앞에 던졌다.
툭 검은 금속 수갑이 사막의 모래를 파고들며 긴 흔적을 남겼다.
“살고 싶으면 스스로 묶어라.”
발라구는 정말로 살려줄 거냐고 묻지 않았다.
수갑을 찬 씨족 중 죽은 자가 하나도 없어서?
물론 그런 탓도 있었지만, 눈앞의 지구인이 원하면 언제든지 씨족을 죽일 수 있다는 걸 확신한 탓이었다.
우스운 이야기였지만, 이 수갑은 자비였다. 수갑을 차고 있는 동안 목숨은 거두지 않겠다는 자비.
발라구는 묵묵히 수갑을 양팔에 찬 뒤,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많이 불편하군요.”
“그쪽이 팔아먹었던 노예들도 그렇게 생각했을걸.”
여명이 비꼬았으나, 발라구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 아니… 분명 그랬을 겁니다.”
어딘가 회한이 느껴지는 말투. 여명은 시큰둥하게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제 와서 죄책감이라도 느끼나?”
“죄책감이라… 그런 걸 느끼던 적도 있었지요. 불과 얼마 전까지는.”
“….”
“하지만 죄책감 때문에 가족을 힘들게 하느니, 남을 노예로 파는 게 낫다고 생각했고…”
오크는 얼굴의 커다란 흉터를 만지작거리며 달을 올려다봤다. 창백하고 거무튀튀한 두 개의 달이 동시에 그의 얼굴을 비췄다.
“…이렇게 벌을 받는군요. 이제 저희 씨족을 어쩌실 겁니까?”
“글쎄, 아마 노예로 팔겠지.”
“눈에는 눈이라… 정의는 느려도 언젠가 찾아오는 법이군요.”
발라구의 표정은 어딘가 후련하기까지 했다. 여명은 그런 표정을 보며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사실, 그는 오크들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평범한 유목민이면 모를까, 인신매매범들 아닌가.
세티에게 약이 든 차를 준 그 순간, 그들의 목숨은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데… 세티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노예상은 노예로 팔아줘야 제맛이라나?
여명은 그럼 팔다리를 하나씩 자르겠다고 답했으나, 세티는 그것조차 반대했다.
그리고 그가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에, 그녀는 홀로 천막을 뛰쳐나가 유목민 야영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상품 가치(?)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그가 살인을 저지르는 걸 막고 싶어서인지 알 수 없…
“여명! 싹 쓸어왔어!”
상념이 깊어지려는 찰나, 세티의 목소리가 그를 깨웠다.
고개를 돌려보니 커다란 낙타를 탄 세티가 보였다.
그녀는 빵빵하게 부푼 가죽 자루 하나를 들고 있었는데, 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동전 짤랑 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그 사이에 족장의 낙타를 길들이다니. 당찬 아내를 두셨군요.”
발라구의 짧은 평가를 마지막으로, 세티는 낙타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꽤 무거운 자루를 들고 있음에도 그녀는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사뿐히 땅에 착지했다.
“생각보다 털어먹을 게 없더라. 족장을 끌고 다니면서 모았는데도 자루 하나밖에 못 채웠어.”
세티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자루를 열어 안에 담긴 물건들을 보여줬다.
은화도 금화도 아닌 이상한 동전들과 투박한 장식품, 돌돌 말린 양피지와 종이 등등…
동전을 제외하면, 어디 골동품점에서나 팔아먹을 수 있는 물건들이었다.
“짐수레에 실린 건 대부분 스팸이랑 식재료들이고… 그나마 낙타랑 염소는 엄청 많더라. 그것만 팔아도 경비 걱정은 없을 정도던데?”
“그럼 가축 팔만한 곳으로 가야겠네. 혹시 지도는 없었어?”
“지도? 잠깐만… 분명 여기 안에…”
그렇게 세티가 가죽 자루를 뒤지기 시작하는데, 옆에 앉아 있던 발라구가 한마디 거들었다.
“붉은색 천으로 묶어놓은 양피지. 그게 씨족의 지도요.”
갑자기? 세티는 의아한 표정으로 오크를 바라본 뒤, 붉은 천에 묶인 양피지를 꺼내 펼쳤다.
뭔가 속임수가 있나 싶었는데, 그건 정말로 마경 일대가 그려진 지도였다.
지표가 될만한 바위와 돌산들은 물론이고, 오아시스와 우물들까지 세세하게 그려진, 꽤 씨족의 비밀 지도.
“진짜네? 그… 오크 씨? 알려줘서 고마워요.”
세티가 슬쩍 웃으며 말했으나, 오크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여명을 향해 말했다.
“제 이름은 오크가 아니라 발라구입니다. 거세의 발라구.”
“…거세?”
“어릴 적 인간들에게 거세당했습니다. 오크 성기는 정력제로 비싸게 팔린다더군요.”
“….”
남자라면 누구나 질색할 이야기였다. 여명은 슬쩍 눈살을 찌푸린 뒤, 세티에게서 지도를 건네받았다.
그는 달빛을 등불 삼기 위해 지도를 넓게 펼쳤다. 그리고 하늘의 별과 지도를 번갈아 보며 가늠하기 시작했다.
“…여명, 별도 볼 줄 알아?”
“방법만 알아. 실제로 해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고.”
또 다큐멘터리에서 얻은 정보구나. 세티는 조용히 별을 보는 여명을 감상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으로 여명은 유목민 복장도 잘 어울린다던가, 처음 봤을 때보다 근육이 많이 붙었구나 같은 생각이 스칠 때쯤.
여명이 지도의 한 부분을 콕 짚었다.
남부 마경 정 중앙에서 북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
“벌써? 정말 별만 보고 우리 위치가 어딘지 찾은 거야?”
“아니, 그건 실패했어.”
“으, 응?”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세티가 고개를 들자, 여명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는 거랑 실제로 하는 건 좀 다르더라고.”
“…그럼 지도는 왜 짚었어?”
여명은 지도를 툭툭 치며 대답했다.
“여기, 아까 우리가 파냈던 우물 표시를 찾았어. 아마 이 오크들도 그 우물을 찾아가고 있었나 봐.”
세티가 지도의 우물 표시를 확인하는 사이, 여명이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 위치에서 지구로 돌아가는 가장 빠른 길은… 북쪽으로 쭉 올라가는 거야.”
여명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위로 끌어, 지도의 가장 북쪽에 그려진 커다란 도시를 가리켰다.
그 도시의 이름은…
“…드레이테리얼?”
속칭, 쓰레기들의 도시.
생소했던 자른 지명들과 달리, 세티 또한 익히 아는 곳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범죄 드라마 시리즈의 배경이 바로 이 도시였으니까.
“이곳에서 이 오크들과 가축들을 팔아 돈으로 바꾼 다음, 기차를 타고 차원문이 있는 도시로 가자.”
“아… 그럼 의외로 금방 지구로 돌아갈 수 있겠네?”
적어도 반년은 걸릴 줄 알았는데, 여명의 설명대로라면 아무리 늦어도 두 달이면 돌아갈 거리였다.
“…다행이다.”
세티가 아쉬움 반, 안도감 반으로 한숨을 내쉬던 그때.
수갑을 찬 발라구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드레이테리얼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
사람들은 종종, 이 땅이 어째서 마경(??)이라 불리는지 궁금해하곤 한다.
하필 마경처럼 재수 없고 불길한 이름을 붙인 이유가 뭐지?
남부 사막이나, 대 사막, 하다못해 더 나은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것 아닌가.
냉소적인 자들은 제국에서 정식으로 붙인 이름이 너무 길고 멍청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호사가들은 마귀나 살법한 저주받은 땅이라서 그런 게 아니겠냐고 지레짐작했으며.
현지인들은 오래전부터 그리 불렸기에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불릴 뿐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현명한, 혹은 전설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자들은 어떤 전설에 대해서 언급한다.
차원문을 열고, 이 세상을 침략한 괴물들과 맞서 싸운 용사의 전설.
그 전설 속 괴물들의 왕… 즉, 마왕이 자리 잡은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괴물들과 마왕의 땅.
그렇기에 마경이었고, 용사가 마왕을 쓰러트리고도 회복되지 않았기에 여전히 마경이었다.
과학적인 관점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였으나, 전설이란 건 으레 그런 법이다.
상상력에 시간을 더하고, 거기에 과장을 듬뿍 곁들인, 딱 그 정도의 이야기.
굳이 전설의 내부를 파헤쳐보자면, 고대인들이 사막에서 종종 자연 발생하는 마나 폭풍을 보고 마왕이란 존재를 상상…
“꽤 냉소적인 관점이군.”
쉴 새 없이 입을 놀리는 발라구를 향해, 여명이 한마디 했다.
“…이런 관점이 익숙하시지 않습니까? 지구인들은 신화와 동화를 똑같이 생각한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발라구는 낙타 세 마리가 끄는 짐수레 한쪽에 앉아 있었는데, 허리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다리를 쩍 벌린 자세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손에 찬 수갑이 아니었다면 한가하게 마실 나온 모습으로 보일 정도.
여명은 낙타의 고삐를 쥐며 대답했다.
“지구인이야 그렇지만… 사막의 오크들은 용사의 후손이라고 자부하지 않나?”
자기 정체성을 그렇게 쉽게 부정해도 되는 거냐?
여명의 말에는 그런 뜻이 담겨있었다. 발라구는 코웃음을 쳤다.
“제국이나 드워프들도 그렇게 주장하지요. 전설의 용사가 종족을 가리지 않고 박아댄 호색한이 아니고서야…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
한국인으로 치면 단군을 욕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기에, 여명은 다른 오크들을 확인했다.
하지만 짐수레 안쪽에 앉아 있는 오크들은 딱히 발라구의 의견을 부정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모두 비슷한 의견이라서? 아니면…
‘…노예의 무기력증 때문인가.’
세티가 오크들을 뒤집어 놓고, 그들에게 수갑을 채운 지 벌써 5일째였다.
노예로 팔겠다는 말에 반항하거나 도망치는 놈들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세티가 적당히 두들겨주자 오크들은 감히 대항하지 못했다.
도주도, 저항도 불가능해진 오크들은 단체로 무기력증에 빠졌다.
먹고, 싸고, 시키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전형적인 노예의 모습.
가두두인가 뭔가 하는 오크가 특히 심했는데, 녀석은 아예 세티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짐수레에 처박혀있었다.
그나마 오크들 중 무기력증에 빠지지 않고 버텨낸 건 족장과 발라구뿐.
그중 족장은 어떻게 무기력증을 버티는 건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의무감. 족장은 요 며칠간 계속 씨족들을 추스르고, 어떻게든 여명과 세티에게 거래나 흥정을 걸어왔다.
그에 비해 발라구의 여유는… 이해할 수 없었다.
녀석은 세상 태평하게 입만 나불댔다. 마치, 일이 어떻게든 해결될 거라고 믿는 것처럼.
“마경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할까요? 아니면 다른 이야기를 원하십니까?”
“….”
“머나먼 화이트파이어 왕국의 이야기나, 제국의 건국 신화는 어떠십니까?”
가만히 발라구를 바라보던 여명은 문뜩, 그가 무기력증에 빠지지 않은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오크 특유의 뭉툭한 눈동자의 깊은 곳에서, 반짝이는 감정.
그건 노예로 팔려 가는 사람의 눈에선 절대로 볼 수 없는 감정이었다.
희망.
“…발라구.”
“예, 말씀하시죠. 임시 주인님.”
“뭘 노리고… 아니, 뭘 기대하고 있는 거냐?”
갑작스럽고, 노골적인 질문이었다.
발라구는 무어라 핑계를 대려다가, 여명이 그의 마음을 꿰뚫어 봤다는 걸 느끼고 말을 삼켰다.
짧은 침묵.
발라구는 느슨하게 풀어놓고 있던 허리를 바짝 편 뒤,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저는 드레이테리얼 출신입니다.”
“그래서?”
“노예 농장 출신인데, 거세당한 뒤 저명한 마법사에게 팔려 몸종으로 살았지요. 덕분에 비교적 아는 게 많습니다.”
“…네 과거 따위는 관심 없으니까, 요점만 말해.”
“남는게 시간인데, 그러지 마시고 잠깐…”
발라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반투명한 얼음이 그의 미간 바로 앞에 떠올랐다.
“어, 얼음송곳…?”
여명이 반사적으로 만들어낸 얼음송곳.
사막의 열기 탓에 송곳보다는 바늘에 가까운 크기였으나, 그것조차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는 발라구는 눈을 크게 떴다.
“…기사가 아니라 마법사셨습니까?”
여명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얼음송곳을 하나 더 만들어 그의 뒤통수에 겨눴다.
공기가 얼어붙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수레를 울리고, 여명이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요점만, 짧게.”
발라구는 기꺼이 그 경고를 따랐다.
“그… 지금 이대로 드레이테리얼로 향하시면, 망령이라고 불리는 흑마법사의 영역으로 들어가시게 될 겁니다.”
“….”
“어쩌면 이미 그의 영역에 들어왔을지도 모르지요.”
여명은 어떻게 그런 걸 아느냐고 묻지 않았다.
지도를 펼치고 방향을 정한 바로 그날, 발라구도 옆에서 듣고 있었으니까.
“…처음부터 우리가 망령인지 뭔지 하는 놈의 영역을 가로지를 줄 알았군.”
“예, 그 자리에서 드레이테리얼까지 가는 가장 빠른 길은 망령의 영역을 넘는 것뿐이니 말입니다.”
여명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겨우 그게 네가 가진 희망이었어? 우리랑 망령이랑 싸우게 내버려 두는 것?”
발라구도 그를 따라 빙그레 웃었다. 두꺼운 흉터가 휘어지며 묘한 표정을 만들었다.
“망령은 쓰레기 같은 놈입니다. 주변 오크 씨족들의 가족을 인질로 붙잡고 할당량이라며 상납금을 강요하는… 개자식 중의 개자식이죠.”
오크 유목민이 왜 노예상 짓을 하고 있나 싶었는데,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여명은 어디 계속 지껄여보라는 듯 팔짱을 꼈다.
“당신께서 망령에게 패배한다면, 저희는 다시 망령의 개가 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 당신께서 망령을 죽인다면…”
“너희는 노예 시장에 팔려나가겠지.”
“그래도 인질로 잡혀있던 씨족들은 자유를 되찾겠지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계획도, 음모도 아닌 단순한 희망.
여명은 아무런 평가도 내리지 않고 얼음송곳을 움직였다.
날카로운 얼음송곳이 녹색 피부를 뚫고, 발라구의 두개골을 파고들었다.
정확히는, 파고들려고 했다.
하지만 발라구가 눈을 질끈 감고, 그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린 그 순간.
여명이 짧게 혀를 차며 얼음송곳 주문을 없애버렸다.
“쯧, 저쪽도 양반은 못 되는군.”
“예? 그게 무슨…”
발라구가 무어라 되물으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사막의 하늘이 새까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왜애애애앵!!
하늘을 가득 채운 그것의 정체는 어마어마한 양의 파리 떼였다.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작은 벌레들의 날갯소리만으로 사방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마, 망령!”
“망령이 왔다!”
겁먹은 오크들이 귀를 막고, 발라구 또한 놀라서 수레 바깥을 고개를 들이밀던 그때.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
여명은 검을 뽑아 들고 낙타에서 뛰어내렸다.
***
세티는 낙타와 함께 허공에 떠오르며 생각했다.
‘기습당했네.’
상대가 노련했다기보단, 그녀의 방심이 문제였다.
고개만 돌려도 지평선 저 너머가 보이는데, 설마 누가 다가오는 것도 못 느끼겠느냐는 방심.
하지만 적은 그런 방심을 비웃듯, 지평선이나 하늘이 아닌 다른 곳에서 공격했다.
깊고 깊은 땅 아래, 지하.
지뢰가 터지듯 낙타의 발아래에서 어마어마한 무언가가 치솟았고, 그녀와 낙타는 그대로 하늘을 날았다.
마법? 폭탄?
허공에서 자세를 잡으며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의 상상을 한참이나 벗어난 존재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네?’
단순히 큰 정도가 아니었다. 땅 밖으로 드러난 길이만 해도 해를 가릴 정도로 거대한 지네.
세티는 지네가 움직이기 전에 땅에 착지한 뒤, 무기부터 확인했다.
요 며칠간 애지중지 타고 다니던 낙타의 안장에 걸어놓은 망치.
망치는 멀쩡했지만, 안타깝게도 낙타는 곤죽이 되어있었다.
그녀는 즉시 비각술을 펼쳐 망치를 집어 든 뒤, 지네를 올려다봤다.
기사였느냐? 계집이 어찌?
지네의 머리 위에는 빼빼 마른, 거의 가죽만 남은 노인이 서 있었다.
낡고 헤진 로브 복장을 보아하니 마법사인 듯싶었는데, 어째서인지 지팡이가 보이지 않았다.
“당신 뭐야? 도적? 강도? 대체 누군데 기습 질이야?”
세티는 마나를 끌어 올리며 물었다.
너야말로 대체 누구냐? 누구기에 나의 부하를 강탈하고, 나의 땅을 멋대로 침범했느냐?
메마르다 못해 쩍쩍 갈라진 목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부하?”
시치미 떼지 마라! 너희가 끌고 가는 수레는 전부 키란 씨족의 것이잖느냐! 그들은 나의 것이다!
노인이 발작적으로 소리치자마자, 세티의 눈이 가늘어졌다.
“당신이 노예상 오크들의 주인이라 이거지?”
그렇다, 이 계집아! 무슨 알량한 용기로 마경에 발을 디뎠는지 모르겠으나, 감히 나의 물건을 탐한 죄를 묻겠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네가 튀어나온 구멍에서 파리 떼가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왜애애앵!!
하늘로 솟구치는 어마어마한 수의 파리 떼는 마치 소용돌이가 생각날 정도로 위압적이었으나, 세티는 별다른 감흥을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무술은 이런 상황에 특화되어 있었으니까.
나의 아이들아, 잡아라!
정작 그런 사실을 모르는 노인은 파리 떼를 움직였다.
무수한 파리 떼가 검은 파도처럼 출렁거리고, 세티의 머리 위로 기다란 그늘이 만들어진 바로 그 순간.
“…여명이 오기 전에 정리나 해둘까.”
세티가 망치를 내려찍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