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36)
을 위한 세계는 없다-136화(136/817)
〈 136화 〉 주인공을 위한 조난은 없다. (6)
* * *
***
사막 씨족들에게 망령이라 불리는 자, 다갈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수한 모래파리가 쏟아지고 있는 와중에도, 망치를 든 소녀의 표정이 너무나 담담한 까닭이었다.
겁을 먹어서 몸이 굳은 건가? 아니, 그건 아닌 듯싶었다. 그녀는 느릿하게 망치를 들어 올리고 있었으니까.
‘뭐지?’
다갈은 묘한 불길함을 느꼈다.
궁정백에게 쫓겨 도시에서 억울하게 추방됐던 바로 그날에 느꼈던 것과 비슷한…뱃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불길함.
그는 본능의 경고를 우습게 여기지 않았으나, 과대평가하지도 않았다.
마나를 다루는 기사라지만, 상대는 아직 성인도 되지 못한 소녀 아닌가.
‘마법사도 아니고, 하물며 총도, 폭탄도 없거늘…’
오랜만에 기사와 싸우게 되어서 그런 것일까?
그는 불길함을 떨쳐내기 위해 주문을 엮고, 주먹을 콱 쥐었다.
벌레 조종 마법을 발동하기 위한 수인(手?).
명령에 따라 공격을 개시한 모래파리가 소녀를 덮치는 것과 그녀가 망치를 휘두르는 건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소녀의 망치는 느릿했다. 혹은, 그렇게 보였거나.
그러나 그녀의 망치는 모래파리들보다 먼저 땅에 닿았고… 그 직후.
벼락이 터졌다.
소리보다 먼저 빛이 터져 나와 주변 일대를 가득 채웠다.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강렬한 빛. 다갈이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린 바로 다음 순간에야, 소리가 출발했다.
콰아아아앙!
흡사, 수류탄 백 개를 동시에 터트린 것 같은 굉음이 사막을 뒤흔들었다.
다갈이 간신히 눈을 떴을 땐… 이미 모든 게 끝나 있었다.
소녀의 주변에 있던 모래파리들은 흔적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나마 거리가 있던 파리들이 무사했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모두 벼락에 닿아 타버리거나, 충격파에 휘말려 찢어졌으니까.
“….”
다갈은 입을 다물고, 이 모든 일을 벌인 소녀를 바라봤다.
하아
그녀는 마치 대마법을 사용한 마법사처럼, 길게 심호흡하고 있었다. 연달아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은 아니란 뜻.
사막의 열기 때문인지, 아니면 기술의 여파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녀의 이마에선 땀 한 방울이 주륵 흘러내렸다.
계집… 넌 누구냐? 누가 보낸 거냐?
짧은 침묵 끝에, 다갈이 입을 열었다. 마법을 준비할 시간을 벌기 위한 질문이었다.
그의 주문이 차곡차곡 준비되는 걸 눈치채지 못한 건지, 소녀는 가볍게 대답했다.
“홍세티.”
그 직후, 다갈은 자신도 모르게 주문을 엮던 마나를 멈추고 미간을 구겼다. 그녀의 이름이 너무나 기가 막힌 탓이었다.
지구식 이름? 지구인이라고?
“글쎄요?”
소녀는 얄밉게 어깨를 으쓱였다. 다갈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비틀었다.
실력에 비해… 하는 짓이 좀스럽구나. 출신을 감추기 위해 지구의 이름을 대다니.
그의 혓바닥이 정곡을 찌른 걸까? 소녀의 고운 눈썹이 휘어졌다.
게다가 한국식 이름이라니, 어쭙잖게 승만 시를 들락거렸나 보지?
“….”
다른 사람들은 속일 수 있었겠지만… 나를 속이기엔 아직 이르다.
“저기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세티, 세티라고? 이 하찮은 사기꾼아, 차원 너머의 한국인들은 그런 식으로 이름 짓지 않는다!
다갈이 그렇게 일갈하자, 소녀는 할 말을 잃은 듯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 보면 황당해하는 표정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사이에 주문 준비를 끝낸 다갈은 거대의 지네의 몸에 각종 마법을 부여하며 소리쳤다.
계집아, 이제 장난은 끝이다!
마법 저항, 근력 강화, 가속, 경질화 등등 수많은 강화 마법이 지네의 몸을 감쌌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쏟아지는 마나에 뼈와 살이 분리될 만큼 막대한 마법.
그러나 오랜 시간 최적화시켜온 거대 지네는 완벽하게 강화 마법을 흡수하는 것도 모자라, 다갈의 명령에 실시간으로 반응했다.
팔다리는 상관없다! 몸통만 남겨라, 이름은 그 후에 듣겠다.
거대지네는 그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꿈틀거리는 몸을 쭉 펼친 뒤, 혐오스러운 입을 쫙 펼치고 세티의 몸을 덮쳤다.
콰과광!!
사막이 전율했다. 묵직한 진동을 따라 모래와 돌을 날뛰었다.
망치를 휘두를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 공격.
세티는 공격에 저항하는 대신, 까치발을 들고 땅을 튕겼다. 그리고 이어진 충격파를 지지대 삼아 거대 지네의 위로 뛰어올랐다.
비각술의 깃걸음.
그녀는 바람에 흩날리는 깃털처럼 지네의 몸통을 타고, 날카로운 발을 피하며, 흙먼지 사이를 날아다녔다.
같잖은 짓을.
다갈은 요리조리 몸을 날리는 세티를 보며 주문을 외웠다.
복잡한 주문을 준비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발만 묶으면 그만이었으니까.
단 한 번, 한 번만 말을 묶으면 저 계집의 반항도 끝을 보이리라.
다음 순간, 그는 확신을 담아 보이지 않는 힘 주문을 펼쳤다.
아니, 펼치려 했다.
하지만 그가 주문을 발사하기 직전.
섬광과 함께 떨어진 검이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
망령의 가슴을 꿰뚫은 여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검을 타고 올라오는 감각이 말해주고 있었다. 녀석은 죽지 않았다고.
판단은 빨랐고, 행동은 더 빨랐다.
여명은 망설임 없이 녀석의 가슴에서 검을 뽑은 뒤, 그대로 목을 쳤다.
주름 가득한 늙은이의 머리가 몸과 분리되며 땅으로 떨어졌으나…
‘피가 없군.’
녀석의 잘린 목에선 피 대신 톱밥 같은 가루가 흘러나왔다.
마치, 마른 장작처럼.
피가 튀지 않은 건 녀석의 머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 …? …!!!
목이 잘린 것만으론 부족했는지, 바닥으로 떨어진 녀석의 머리는 여명을 노려보며 입을 벙긋거렸다.
뭐라고 지껄이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분노로 가득 찬 눈동자를 보니 좋은 말은 아닌 듯싶었다.
잠시 녀석을 내려다보던 여명은, 그대로 발을 들어 머리를 짓밟았다.
파삭!
벌레 껍데기를 짓밟는 듯한 소리와 함께, 망령의 머리가 터져버렸다.
이번에는 끝났나 싶었는데…
다음 순간.
녀석의 머리가 터진 자리에서 마나가 일렁이더니, 그 자리에서 온갖 벌레들이 튀어나왔다.
구더기, 지렁이, 딱정벌레, 파리 등등…
혐오스럽게 꿈틀거리는 벌레들은 여명에게서 도망치려는 듯 동시에 사방팔방 흩어졌다.
‘벌레가 본체였나?’
더럽게 끈질기군. 여명이 한숨과 함께 도망치는 벌레들을 쫓으려는데, 거대 지네가 갑자기 머리를 세차게 흔들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 있는 여명을 떨어트리려는 게 분명한 행동이었다.
망령이 도주하며 최후의 명령이라도 내린 걸까? 아니면 단순히 폭주?
여명은 지네의 머리에서 뛰어내리면서, 검에 마나를 모았다.
이만한 사이즈라면 보통의 검기로는 깊은 상처를 주기 어려웠다. 처음부터 혜성검으로 일격에 목을 베야 하리라.
판단을 끝낸 그는 즉시 혜성검을 준비했다. 착지하기 전에 목을 날릴 심산이었는데…
하지만 그가 혜성검을 완성하기도 전에, 아래에서 지켜보고 있던 세티가 외쳤다.
“잠깐, 여명! 안 죽여도 돼!”
뭐? 순간적으로 공격 타이밍을 놓친 그는 혜성검을 쏘지 못하고 그대로 사막에 착지했다.
뒤이어 지네의 공격을 대비해 근육을 잔뜩 긴장시켰는데, 정작 그에게 다가온 것은 지네가 아니라 세티였다.
그녀는 쪼르르 다가와 여명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는, 거대 지네를 가리키며 말했다.
“방금 마법사를 죽였을 때, 벌레 조종 마법이 풀린 거 같아. 저거 봐, 안 덤비지?”
그녀의 말마따나, 거대 지네는 공격하긴커녕 더듬이와 앞발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누가 봐도 겁을 먹은 모습.
하지만 겁을 먹었어도 상대는 고개를 뒤로 젖혀야만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벌레였다.
여명은 긴장의 끈을 풀지 않았고, 지네도 여명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렇게 짧은 대치가 이어지고, 지네가 뒤로 슬쩍 몸을 뺀 순간.
쿵!
세티가 망치로 바닥을 찍었다. 그러자 지네는 화들짝 놀라 뒤로 몸을 돌리더니, 꽁지가 빠지도록 모래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도망가는 모습이었기에,세티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네?”
그러나 여명은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이야.”
“…아직이라고?”
“아까 그 마법사, 놓쳤거든. 벌레로 변해서 도망치더라고.”
어디로 도망쳤는진 물어볼 것도 없었다. 녀석이 지네와 함께 처음 튀어나왔던 땅굴.
주변에서 벌레가 도망칠 곳이라곤 그곳뿐이었으니까.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여명은 그렇게 말한 뒤 구멍으로 향했고, 세티는 별말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
땅굴 아래, 지하로 내려가자 사막의 뜨거운 공기 대신 비교적 서늘한 공기가 몸을 쓸었다.
보기보다 꽤 깊은 곳이라는 뜻.
주변을 살펴보니, 지네가 뚫은 땅굴은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다 더 인위적인, 마치 기계를 사용한 것 같은 깔끔한 곳이었다.
“…혹시, 지하 던전인가?”
잠시 땅굴 내부를 살펴본 세티의 감상이었다.
여명은 마나의 흔적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며 짧게 대답했다.
“아마도?”
“…진짜로 이런 곳에서 사는 마법사가 있구나.”
세티는 흥미로운 듯 주변을 둘러봤지만, 뭐 대단한 장식이나 흔적은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따로 마감되지 않은 통로는 근본적으로 토굴과 다를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토굴이라서 다행인 점도 있었다.
돌이나 철로 만든 통로와 달리 흙으로 된 복도 곳곳에는 벌레 변신(?)이 해제된 마법사의 흔적이 가득 남아있었다.
흙바닥에 깊게 찍힌 발자국과 벽을 짚은 손자국, 그리고 드문드문 느껴지는 희미한 마나까지.
여명과 세티가 그 흔적을 따라 걷기를 한참.
이윽고 두 사람은 탁 트인 공간과 마주할 수 있었다.
누가 인위적으로 만든 게 분명한, 동그란 천장을 가진 공동.
넓이는 또 얼마나 넓은지, 거대 지네가 탭 댄스를 춰도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 넓은 공간에 있는 거라곤 망령이 사용한 게 분명한 낡은 탁자와 침대, 거대 지네의 먹이로 보이는 오크의 시체, 그리고…
벽 한구석에 가득 쌓인 유리관과 철제 상자들.
마법사의 던전에서 유리관과 철제 상자를 찾은 게 뭐가 신기하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그 위에 한글이 적혀있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취급 주의? 기밀?”
유리관 앞까지 다가간 세티는 먼지를 아래에 파묻힌 한글을 읽고 눈살을 찌푸렸다.
“한국어가 왜 이런 곳에…?”
“…글쎄, 마법사가 한국에 관심이 많거나, 한국군이 빼돌린 군납품이 여기까지 흘러들었거나.”
“그런 거치곤 안에 있는 물건이 너무 낡지 않았어? 적어도 수십 년 전 물건 같은데…”
두 사람은 그런 대화를 나누며 유리관을 뜯어 내부를 살펴보거나, 철제 상자 속 내용물을 확인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한글이 여기에 적혀있는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그 대신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원래 목적이었던 마법사는 찾아냈다.
정확히는, 마법사가 변신한 벌레들이 모인 장소를.
여명은 잠시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철제 상자를 바라보다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그대로 죽기 싫으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상자들 사이에서 벌레가 우르르 튀어나왔다.
혐오스러운 광경에 세티가 놀라 망치를 들어 올리는 가운데, 벌레들은 마치 꿀에 꼬이는 개미들처럼 한데 뭉쳐 마법사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지렁이는 얼굴이, 딱정벌레는 다리가, 구더기는 팔과 몸통이 되고…
그렇게 인간의 모습을 되찾은 망령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지독한 것들! 나의 지네를 풀어준 것도 모자라, 기어코 나까지 죽이러 왔느냐?
“….”
대체 누구의 사주를 받고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이냐? 드레이테리얼의 궁정백? 아니면 역겨운 귀쟁이 새끼들?
“아니, 그쪽이 먼저 선빵쳤잖…”
세티가 반박하려는데, 여명이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그는 그녀를 향해 슬쩍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뭔가 오해하는 거 같은데, 한 번 떠보자.’
즉흥적인 제안이었지만, 세티는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대로 하라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여명이 뭘 떠보려는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따로 고문하면 그만이었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