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38)
을 위한 세계는 없다-138화(138/817)
〈 138화 〉 몰락한 자들의 도시 (2)
* * *
***
다갈과 ‘대화’를 마무리 지은 뒤, 여명과 세티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감옥의 쇠창살을 부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감옥 안의 노예들, 아니… 지네 밥들은 갑작스러운 자유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나마 여력이 있는 자들은 두 사람을 피해 감옥 속으로 뒷걸음질 쳤고, 걸을 힘조차 없는 자들은 벌벌 떨기만 했다.
아마 세티가 보여준 ‘대화’를 보고 겁을 먹은 거겠지.
여명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노예들을 감옥 바깥으로 끌어냈다. 스스로 걸어서 감옥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하려는 심산이었으나…
사, 살려주세요…
엄마, 엄마…
으아아! 죽고 싶지 않아!!
지네 밥들 중 제대로 걸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여명과 세티는 어쩔 수 없이 직접 그들을 업거나 안은 채 감옥 바깥, 던전 입구까지 옮겼다.
그들 대부분은 극도로 몸이 약해진 탓에 한 번에 여러 명을 옮기거나, 비각술을 펼쳐 빠르게 옮기는 건 무리였다.
결국, 한 명 한 명 시간을 들여 바깥으로 옮기길 한참.
수십 명의 지네 밥들을 던전 입구, 정확히는 거대 지네가 뚫어놓은 커다란 구멍 아래로 옮겼을 땐, 하늘에는 이미 달이 떠 있었다.
“모두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고 계세요.”
여명은 노예들에게 짧게 한마디 한 뒤, 훌쩍 뛰어올랐다. 이어서 가볍게 구멍의 벽면을 밟으며 올라간 여명은 그대로 사막에 착지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오크 씨족들부터 찾았는데… 그들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혹시라도 이미 도망갔으면 어쩌나 하는 여명의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오크들은 천막을 치고 야영지를 꾸리고 있었으니까.
그가 야영지로 다가가자, 짐수레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발라구가 여명을 발견하고 수갑을 찬 손을 흔들었다.
“오래 걸리셨군요. 망령… 그 개자식은 어떻게 됐습니까?”
“…키우던 벌레들과 같은 곳으로 보내줬다.”
“하! 해내실 줄 알았습니다!”
여명은 활짝 웃는 발라구를 보며 왜 도망가지 않았는지, 수갑을 찬 채로 어떻게 천막을 칠 수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 대신, 주머니에서 수갑 열쇠를 꺼내며 말했다.
“씨족들 전부 풀어주고, 가죽끈과 밧줄, 그리고 여물통을 있는 대로 챙겨와.”
발라구는 여명이 건네는 열쇠를 받아들고는, 자신의 수갑을 풀며 물었다.
“일손이 많이 필요한 일입니까?”
“…아마도.”
“그럼 씨족들도 전부 불러오죠.”
발라구가 그렇게 말하며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야영지의 오크들이 우르르 여명 앞으로 모였다.
대부분은 두려운 시선으로 여명을 바라보았으나, 그가 망령을 죽였다는 사실을 눈치챈 오크들은 뭔가 기대하는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눈빛만.
모두가 입을 다문 가운데, 여명은 오크들을 이끌고 구멍으로 돌아갔다.
그는 구멍으로 가는 동안 여물통에 밧줄을 묶어 임시 구조용 바구니를 만든 뒤, 구멍에 도착하자마자 바구니를 아래로 집어 던졌다.
휘리릭, 턱!
구멍 아래에서 올라오는 소리를 들어보니, 다행히 밧줄 길이가 부족하진 않았다.
그렇게 길이를 확인한 여명은 이게 뭔 일인가 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오크들을 향해 말했다.
“아래에 망령이 잡아놨던 노예들이 있어. 내가 내려가서 신호하면, 끌어 올려.”
“노예… 말입니까?”
노예란 단어를 듣자, 발라구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씰룩였다.
“왜? 뭐 문제라도 있어?”
“아니, 문제는 없습니다만, 전 당연히 망령의 보물을 챙기시려는 건 줄 알고…”
“그건 나중에 챙겨올 거고. 우선 사람부터 챙겨.”
여명은 그렇게 말하며 밧줄을 발라구에게 건네 뒤, 구멍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아래에는 세티가 노예들을 줄 세워 놓고 있었는데, 가장 상태가 심각한 노예들, 특히 아이들부터 여물통에 태울 수 있도록 준비해놓은 듯싶었다.
나 잘했지? 라는 뜻을 담은 윙크 한 번, 잘했네, 잘했어. 라는 뜻으로 웃음 한 번.
그 이후 말은 필요 없었다. 여명과 세티가 노예들을 여물통에 태우고, 오크들이 끌어 올리고.
오크들이 힘을 아끼지 않은 덕분인지, 구출은 금세 끝났다.
그렇게 마지막 노예마저 위로 올라갈 때쯤, 발라구와 족장을 비롯한 몇몇 오크들이 밧줄을 타고 던전 아래로 내려왔다.
“뭐야? 왜 내려와?”
여명이 의아한 듯 묻자, 발라구가 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제 보물을 챙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둘이서 망령의 보물을 옮기시려면 한참 걸릴 텐데요?”
세티가 참 성실한 노예들이네 라고 칭찬 아닌 칭찬을 하긴 했지만, 두 사람은 굳이 도와주겠다는 오크들을 거절하지 않았다.
둘이서 다갈이 쌓은 보물을 옮기는 게 쉽지 않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아무튼, 여명은 오크들을 이끌고 다시 감옥으로 내려가 보물들을 옮기기 시작했다.
금괴가 가득 담긴 궤짝과 금화로 가득 채운 가죽 자루 두 개, 그리고 아직 제련되지 않은 금덩어리들까지.
노예들을 옮길 때와 달리 적극적으로 비각술을 사용한 덕분에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지만…
금이란 게 원체 무거운 물건이다 보니, 보물을 전부 옮긴 일행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땀에 흠뻑 젖어버렸다.
“…이거 완전, 금에 미친 놈이었군요.”
발라구는 가득 쌓인 금을 보며 질색했다. 아마, 노예 거래로 모은 돈이 얼마나 더러운지 알기 때문이겠지.
여명이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보물을 바라보는데, 발라구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서, 이제 뭘 하실 겁니까? 이만한 양의 금과 우리 씨족, 그리고 이번에 얻은 노예들까지 싹 내다 파시면, 어마어마한 돈을 버시는 걸 텐데요.”
“….”
그제야, 오크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되새긴 듯 입을 다물었다. 여명은 잠시 그들의 반응을 살피다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떠보지 마. 애써 구출한 노예들도, 너희 오크들도 팔 생각 없으니까.”
“….”
팔 생각이 없다고?
발라구의 얼굴에 새겨진 커다란 흉터가 꿈틀거리는 사이, 세티는 그게 무슨 뜻인지 깨닫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여명은 그런 세티를 힐끗 바라본 뒤 계속 말을 이었다.
“…너희 씨족이 원해서 노예상이 된 건 아니라고 했었지?”
발라구가 그렇다고 대답하려는데, 그 옆에 있던 늙은 오크가 선수를 쳤다.
“당연하오. 망령이 아니었다면… 무역을 하며 먹고 살았겠지. 조상들께서 그러하셨듯이.”
볼두구, 키란 씨족의 족장은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쓸었다.
땀에 젖은 오크의 얼굴에는 지울 수 없는 피로감과 죄책감이 깃들어있었다.
“뭐, 이제 와서 무슨 핑계를 대건… 노예상 짓거리를 한 과거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그렇지 않나?”
족장이 오크들을 둘러보며 말하자, 오크들은 거의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이제 망령이 사라졌으니, 그에게 붙잡혀 있던 우리 씨족의 아이들과 아내들은 모두 전통을 지키며 살 거요. 그런 면에서 당신들에게는 고마운 마음뿐이오.”
“….”
족장이 꾸벅 고개를 숙이기 무섭게, 단번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여명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는데, 세티가 그의 옆에 딱 붙어 앉으며 말했다.
“속죄의 기회를 드릴게요.”
“…속죄?”
족장은 여명과 세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세티는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방금 구출한 노예들, 전부 안전하게 고향으로 돌려 보내주세요. 경비는 여기 있는 금 절반이면 충분하겠죠?”
“….”
“저희는… 금 절반에, 낙타 두 마리만 챙겨서 갈게요. 어차피 그 이상은 들고 갈 수도 없을 테니까.”
세티는 이거 맞지? 라는 표정으로 여명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고, 여명은 그녀의 볼을 꼬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정작 오크들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마치 사막에서 꽃을 본 것 같은 표정.
“…왜? 왜 우리에게 그런 기회를 준단 말이오? 우리의 뭘 믿고?”
“당신들을 믿는 게 아니라, 우리 실력을 믿는 거죠. 나중에 와서 확인했을 때, 우리가 시킨 일을 어겼으면… 그때 싹 죽여버리면 그만이니까.”
세티는 협박하듯 위협적으로 말했지만, 족장은 그녀의 말속에서 협박이 아닌 자비를 느꼈다. 여태껏 만난 마나 사용자들에게는 느껴본 적 없는, 그런 자비.
그는 울컥한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획 돌렸다.
“…두 분의 자비에 감사드리오.”
늙은 오크의 목소리는 어딘가 축축했으나,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
떠나기로 마음먹은 여명과 세티의 준비는 금세 끝났다.
챙길 물건이 적은 탓도 있고, 작별 인사를 나눌 필요가 없는 탓도 있었다.
두 사람이 각자 낙타의 등에 식재료와 금괴가 든 궤짝, 그리고 금화 주머니를 싣고 있는 사이, 두 마리의 오크가 뭔가를 한 아름 들고 다가왔다.
“발라구? 그리고 그쪽은… 가두두였나? 뭘 그렇게 가지고 왔어요?”
“생각해보니, 미처 음식은 챙기지 않으셨더군요.”
두 명의 오크가 내민 건 스팸 캔과 염소젖으로 만든 요구르트였다.
여명과 세티는 둘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음식이야 이미 챙겨놨지만, 애써 준비해준 선물을 거절하는 것도 뭣했으니까.
그렇게 세티가 낙타에 음식을 싣자 가두두, 두 명을 노예로 팔기 위해 가장 먼저 움직였던 오크가 고개를 푹 숙였다.
“씨족에게 속죄의 기회를 주어, 정말로 고맙소.”
“속죄가 될지, 또 다른 사고가 될지, 당신들 하기에 달린 거죠. 열심히 해봐요.”
그 말을 끝으로, 세티는 낙타에 올라탔다. 이미 낙타를 타고 있던 여명은 북쪽을 향해 낙타의 고삐를 돌렸다.
그렇게 두 사람이 떠나려는데…
“여기서 드레이테리얼까지 북쪽으로 삼 일이면 충분할 겁니다.”
낙타를 탄 발라구가 두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너 뭐야? 라는 세티의 눈빛이 꽂히기 무섭게, 발라구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저번에 말씀드렸지요? 제가 드레이테리얼의 노예 출신이라고.”
세티는 처음 듣는 소리였으나, 요 며칠간 그의 수다에 시달렸던 여명은 한숨 쉬듯 대답했다.
“…그래서?”
“사실… 제가 자력으로 도시를 탈출한 아주 능력 있는 오크입니다. 장담컨대, 절 데리고 가시면, 두 분께 아주 큰 도움이 될 겁니다.”
“….”
“두 분 모두 쓰레기 도시는 처음이시잖습니까? 드레이테리얼은 초심자에게 아주 잔혹한 곳입니다. 적절한 안내원이 없다면, 입구부터 소동에 휘말리시는 게 당연할 정도지요.”
“흐음… 소동에 휘말려? 왜?”
별 관심 없는 여명과 달리, 세티는 낙타 혹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며 물었다.
“금을 궤짝으로 들고 있는 선남선녀, 게다가 두 분 다 기사… 아, 지구에서는 초인이라고 하던가요? 어쨌든 마나를 깨달으신 분들이니, 당장 시선을 끄실 겁니다.”
“….”
“온갖 조직들과 마법사, 범죄자, 기업가, 그리고 궁정백까지… 눈치 빠른 모두가 두 분을 노리겠지요.”
그제야, 여명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궁정백, 한국의 양치기들과 접촉한 게 분명한 그들과 한 번은 만나봐야 했으므로.
“절 믿으시지요. 제가 두 분을 안전하게 모셔드리겠습니다.”
발라구의 당당한 태도에, 여명과 세티는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여명이 슬며시 고개를 끄덕이자, 세티는 피식 웃으며 발라구에게 금화 한 닢을 던졌다.
“그럼 어디 실력 좀 볼까요? 안내원 씨.”
***
이틀 뒤.
강행군을 거듭한 낙타들이 침을 질질 흘리고, 초인이 아닌 발라구가 반쯤 죽어갈 때쯤.
지평선 너머에서 커다란 성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돌 성벽 위에 현대적인 철조망 펼쳐져 있고, 녹슨 철판들이 여기저기 박혀있는 기괴한 성벽.
무슨 세기말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광경을 본 여명이 눈살을 찌푸리는데, 발라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게 바로 드레이테리얼의 남쪽 성문입니다만… 저 문으로 들어가는 건 추천 드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한 발라구는 물통을 열어 얼굴을 씻었다. 아슬아슬하게 정신을 차린 듯 눈을 비비는 그를 향해, 여명이 물었다.
“성문을 추천하지 않는 이유는?”
“남쪽 경비병들은 고약하기로 유명하지요. 원체 돈 되는 일이 없다 보니… 두 분께서 가진 금 궤짝을 보면 당장 칼부터 들이댈 겁니다.”
“개판이네. 그럼 다른 길은?”
“서쪽으로 빙 돌아서, 하수구로 들어가는 길이 있습니다. 조금 더럽긴 하지만, 통행료와 불필요한 싸움을 피할 수 있지요. 어떠십니까?”
귀찮은 소란에 휘말릴지 모르는 정문과 약간 더럽지만 조용히 넘어갈 수 있는 하수구.
여명이 어느 쪽을 선택할지는 뻔했다.
단지…
“…또 하수구야?”
며칠째 옷을 갈아입지 못한 소녀의 한숨을 마지막으로, 일행은 서쪽으로 낙타 머리를 돌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