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41)
을 위한 세계는 없다-141화(141/817)
〈 141화 〉 막간 – 공주님의 경우
* * *
***
로드 하우 아카데미 외곽.
교직원들은 물론이고 3학년들조차 찾아오지 않는 아카데미 섬 남부의 해안 절벽.
유약한 외모의 소년이 힘겹게 절벽을 오르고 있었다.
허리에 기다란 줄을 매단 소년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지만, 그의 표정에는 기쁨과 기대감이 가득했다.
힘겨운 등반 끝에는 달콤한 과실이 기다리는 법이었으니까.
물론, 그의 기대가 현실로 이뤄지는 일은 없었다.
소년이 미처 예상치 못한 불청객이 절벽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탓이었다.
미리디스, 아니, 쇠미리.
그녀는 마치 그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캠핑용 의자에 앉아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생각보다 늦게 올라오셨네요?”
소년, 바오닉 레락은 멍하니 소설 속 히로인을 바라봤다.
‘이년이 왜 여깄어?’
턱 밑까지 질문이 올라왔지만, 절벽을 올라오느라 바닥난 체력은 그에게 헐떡거리는 것 외의 어떠한 행동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바오닉이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쇠미리가 의자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바오닉이 뭔가 싶어 고개를 들던 순간, 쇠미리는 그의 주머니에서 원하던 것을 이미 낚아챈 후였다.
영약을 담기 위해 특별 제작된, 붉은색 나무 상자.
쇠미리는 ‘작가’가 간신히 찾아낸 기연을 열어보며 말했다.
“절벽에 숨겨진 영약이라, 설립자께서는 참 고전적인 걸 좋아한다니까요.”
“…너 뭐야?”
바오닉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어떻게 여기서 날 기다리고 있던 거지? 그놈이 말했나? 하지만 그놈은 급히 아카데미를 떠난 거 아니었어?
의문이 가득한 바오닉의 표정을 보며, 쇠미리는 상자를 자연스럽게 품에 넣으며 말했다.
“바오닉 레락.”
“….”
“주인이 없다고 함부로 이것저것 뒤지면 안 되죠.”
“주, 주인이라고? 니가 뭔데 나한테 그런 말을…”
바오닉은 그 이상 말하지 못했다. 쇠미리가 대뜸 분홍색 알약 하나를 내민 탓이었다.
어떤 문양도 없었지만, 바오닉은 이미 무슨 맛인지 알고 있는 약.
“이번에는 영약을 봐서 경고로 끝낼게요. 하지만 주인이 안 보인다고 다음에 또 목줄을 벗으면… 삶아버릴 거에요. 알았죠?”
“….”
“다음 달에는 직접 약 받으러 와요.”
바오닉은 떠나는 쇠미리의 등을 붙잡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알약을 입에 넣고 씹었다.
알약에선 익숙한 딸기 맛이 났다.
***
[학생 개인의 일탈로 인한 사소한 사고.]하수도에서 일어난 대규모 소요 사태에 대해, 아카데미의 공식 발표는 그것뿐이었다.
물론, 그 발표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카데미 지하에서 뿜어져 나온 뒤틀린 마나를 느낀 마법사가 몇이고, 정체불명의 결계를 확인한 교직원이 몇인데, 그런 헛소리를?
긴급 출동한 호주군과 특별 교사들이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런 말을 믿을 리 없었다.
하지만 믿지 못하는 것과 진실을 요구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몇몇 기자들이 눈치 없이 아카데미에 항의하기도 했지만, 그런 기자들은 며칠도 지나지 않아 섬 바깥으로 쫓겨났다.
다른 누구도 아닌, 까마귀 수인과 미군의 손에 의해서.
그제야, 사람들은 이 사건에 각국 정부가 얽혔다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아카데미가 직접 미국과 한국, 그리고 차원문 너머의 성국마저 끌어들여 덮는 일이라니.
궁금증도 좋지만, 가끔은 모르는 게 약인 일도 있는 법이다… 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물론, 진실은 그것보다 조금 더 복잡했지만.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군요. 아카데미가 성국의 부탁을 받고 사건을 묻어버리다니.”
히메나 교장은 서류 뭉치를 넘기며 한숨 쉬듯 말했다. 그러자 그녀의 책상 앞에 앉은 소녀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진실을 밝히시려구요?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짜잔, 아카데미 학생 중에 인천 도살자가 있었답니다!”
“….”
“그 도살자가 아카데미에 숨어있던 테러리스트와 손잡고 미국의 자랑과 성녀를 동시에 노리고 차원문을 열었다… 할리우드에서 각본을 사갈 정도로 재밌는 뉴스네요?”
검은 안대를 찬 소녀의 말투는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방정맞기 그지없었다.
교장은 눈앞의 모습과 대중적인 모습 중 어느 쪽이 그녀의 진짜 본모습일지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그 대신, 주제를 돌렸다.
“…그러는 성녀님은 괜찮으신지요?”
“제가요? 갑자기 왜요?”
“눈앞에서 친구를 잃으셨잖습니까.”
교육자다운, 걱정이 듬뿍 담긴 말을 하면서 손에 들린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놨다.
서류에는 [임시 휴학 처리]라고 적힌 소년 소녀의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성녀가 매일 같이 쫓아다니던 두 친구의 사진이었다.
홍세티, 천여명.
성녀는 잠시 서류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잃은 적 없어요. 두 사람은 꼭 돌아올 거에요.”
“성녀님, 저도 하수도에 남아 있는 불안정한 차원문의 흔적을 확인했습니다. 두 학생이 아무리 운이 좋다고 해도, 생존 가능성은…”
“교장 선생님.”
“예, 성녀님.”
“제 예지를 떠보는 건 여기까지만 하세요. 괜히 이런 일로 성기사들에게 노려지는 건 좀 그렇잖아요?전 교장님 좋아해요.”
히메나 교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이 정도로는 안 넘어오나.
성녀가 예지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그녀의 예지가 어느 정도인지 아는 사람은 더더욱 적었다.
성국의 1급 비밀.
그 비밀의 단면이라도 살펴보려고 했었거늘, 성녀는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걱정까지 해주는 게 아닌가.
그녀는 거기서 잠시 이야기를 멈췄다.
짧은 침묵. 그리고 조금 더 긴 고민.
먼저 입을 연 건, 성녀였다.
“교장 선생님,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예, 물론 얼마든지 하셔도 됩니다. 뒤처리를 도와주신 성녀님께 질문 하나 못 받겠습니까?”
“그럼… 도살자의 시체는 누가 가져갔어요? 미국? 한국?”
“….”
젊음의 무모함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열정이라고 해야 할까? 성녀의 질문은 직설적이었다.
‘뭐든 빙빙 돌리기 좋아하는 엄마와는 딴판이란 말이지.’
교장은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해주었다.
“한국이 가져갔습니다. 이번 사건을 묻어버리는 데 도움을 주는 대가였죠. 김관형 장관이 직접 나선 일이라, 미군도 내버려 두더군요.”
“…한국.”
성녀는 예상외라는 듯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다가,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갑자기 교장실의 문이 열렸다.
혹시 손님이 왔나 싶어 교장이 문을 바라봤으나, 그녀를 찾아온 손님은 없었다.
떠나는 사람은 있었지만.
***
“야! 그렇게 갑자기 나가면 어떻게 해! 들키면 어쩌려고!”
1학년 여학생 기숙사로 향하는 길 위, 성녀가 버럭 소리쳤다.
“투명 망토가 만능인 줄 알아? 특히 엄마의 투명 망토는 중급품이라 교장쯤 되면 눈치챌 수도 있다고!”
잔뜩 화가 난 목소리였으나, 정작 그 목소리가 향하는 대상은 별다른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한 성녀가 폭발했다.
“야 이 빨갱이년아! 자꾸 무시할래?”
그제야, 휴대폰으로 어딘가 문자를 보내던 쇠미리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슬쩍 눈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성녀님, 제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부탁드렸던 거 같은데요?”
“니가 먼저 무시했…!”
“그리고 무엇보다, 성녀님 어머니 생각도 하셔야죠. 그거 누워서 침 뱉기에요.”
너희 엄마도 빨갱이잖아 라는 뜻이 담긴 말.
성녀는 불현듯 귀쟁이를 쏴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으나, 가까스로 분노를 억눌렀다.
아마 오랜 수도 생활로 쌓은 수양 탓도 있겠지만, 이제 곧 만날 사람들과 단정하게 만나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기도 했다.
‘이 일이 끝나면 두고 보자’
아무튼, 성녀와 쇠미리는 여학생 기숙사를 문턱을 넘어 방으로 올라갔다.
바로 얼마 전까지 세티와 쇠미리가 함께 쓴, 그리고 이제는 쇠미리 혼자 지키는 바로 그 방으로.
하지만 두 사람은 방으로 바로 들어가진 못했다.
문 앞에 선 성녀가 문고리를 잡은 채 한참 동안 심호흡을 하며 시간을 낭비한 덕분이었다.
“…성녀님, 어차피 온 거 다 알 텐데, 그냥 빨리 들어가시죠?”
결국, 보다 못한 쇠미리가 한마디하고 나서야, 성녀는 벌컥 문을 열었다.
은은한 노을이 비추고 있는 붉은 방에는 세 명의 소녀가 앉아 있었다. 셋 모두 교복이 아닌 딱 달라붙는 전투복을 입은 채였다.
“늦으셨네요.”
그중 가장 키가 큰, 푸른 숏컷이 인상적인 소녀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일이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쇠미리는 자기 탓이 아니라는 뜻을 담아 성녀를 힐끔 바라봤는데, 정작 그녀는 소녀들을 보며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껴안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는 모습.
쇠미리는 그런 성녀를 애써 외면하고 소녀들… 아니, 세티의 자매들을 향해 말했다.
“모두 준비는 끝났어요?”
준비. 그 단어가 나오자마자 자매들은 기다렸다는 듯 군장을 꺼내 들었다.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빵빵한 완전 군장.
전투복에 군장이라니, 그제야 성녀도 이상함을 느끼고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갑자기 군장은 왜?”
“스토커… 아니, 성녀님은 아무것도 몰라요?”
붉은 단발머리의 소녀, 시리가 쇠미리를 향해 묻자, 쇠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면 여기까지 순순히 안 따라오셨을 테니까.”
“뭐? 니들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성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매들을 번갈아 쳐다보는 사이, 쇠미리가 품에서 두 개의 물건을 꺼냈다.
하나는 여명이 남겨두고 간 푸른 쥐의 투명 망토, 그리고 또 하나는…
“…너, 너! 그걸 왜 니가 가지고 있어?!”
황금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기묘한 보석.
그건 세티와 여명이 넘어간 차원문이 있던 자리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마석이었다.
타락석도, 그렇다고 차원마법이 담긴 것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마석.
“…당연히 미군이 가져갔을 줄 알았는데?”
“당연히 그 전에 제가 챙겼죠.”
“나, 난 왜 못 봤지?”
“그야… 성녀님은 코르부스랑 미군이 올 때까지 대성통곡하고 계셨으니까요?”
“….”
다음 순간, 세티 자매들의 묘한 눈빛이 성녀에게 쏟아졌다. 성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그 사이 쇠미리는 마석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다시 희생양 자매들을 바라보았다.
“저번에 말씀드렸듯이, 이 마석은 작은 유사 차원문이 됐어요. 마나만 충분하다면, 여명과 세티가 있는 곳으로 차원문을 열 수 있을 거예요.”
“…마나만 충분하다면 말이죠.”
막내가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마석과 쇠미리를 번갈아 바라보며 덧붙였다.
“겨우 그런 걸 말해주려고 우리를 불러 모은 건 아니라고 믿어요. 룸메이트 언니.”
“…물론, 방법이 있으니까 부른 거랍니다.”
쇠미리는 흠흠, 헛기침으로 시선을 모은 뒤 조심스레 단검을 꺼냈다. 지하 하수도에서 봤던 고급스러운 제사용 단검.
단검을 본 성녀는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건지 깨닫고 눈살을 찌푸렸으나, 쇠미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희생양 자매분들? 마석에 각자 피를 흘려주세요.”
“…우리 피를?”
박네티는 거부감이 드는 듯, 인상을 왈칵 찌푸렸다. 희생양 자매란 단어도 마음에 안 드는데, 진짜로 피를 흘리라니, 정말로 희생양 아닌가.
“하수도의 차원문은 세티 양의 피로 완성됐었어요. 적당한 조정이 있다면, 자매 여러분들의 피도 충분히 차원문을 열 수 있겠죠.”
“하지만 그때는… 반쯤 완성된 차원문에 뿌린 거잖아.”
성녀가 그렇게 지적하기 무섭게, 쇠미리가 덧붙였다.
“그러니 이번에는 조금 더 많이 뿌려야겠죠.”
더? 얼마나 더? 성녀가 묻기도 전에, 시리가 불쑥 앞으로 나서서 단검을 잡아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푹 !
자신의 손바닥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붉은 피가 콸콸 흘러내리며 마석을 적셨으나… 마석의 마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쇠미리의 가설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실패인가? 성녀와 쇠미리가 동시에 눈살을 찌푸리는데, 네티와 막내 또한 단검을 들었다.
네티는 손금을 따라 상처를 냈고, 막내는 아예 손목을 그으려다가 쇠미리에게 제지당하고, 손가락 끝을 작게 따였다.
그렇게 세 희생양의 피가 흘러 피 웅덩이를 만들고, 마석이 피 웅덩이 속에 살짝 몸을 담근 그 순간.
번쩍!
마석의 마나가 터져 나왔다.
성녀가 넘어지려는 쇠미리를 붙잡고, 세 자매가 진지한 표정으로 마석을 바라보길 잠시.
바닥의 피를 전부 빨아들인 마석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2M가 조금 모자란 높이의 황금색 장막을 만들어냈다.
차원문.
개성 차원문 같은 진짜와 비교하면 티끌에 불과했으나, 진짜 차원문이었다.
진한 마나를 느낀 성녀가 침을 꿀꺽 삼키고, 쇠미리에게 물었다.
“이거… 세티랑 여명에게 이어지는 거지?”
“성녀님은 못 써요.”
“뭐? 왜?!”
“성녀님이 만드신 게 아니잖아요. 여명과 희생양 자매만 쓸 수 있는 물건이에요… 이론상으로는.”
성녀는 그깟 이론 따위 뛰어넘어주겠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눈앞의 차원문에서 느껴지는 마나는 기껏해야 한 명만 넘으면 사라질 정도로 희미했기 때문에.
이 순간, 가장 안전한 선택은 차원문을 만든 세 자매였다.
“자매들 중 누가 넘어갈래요?”
쇠미리가 말하기 무섭게, 자매들은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네티, 시리, 시스. 셋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막내 시스였다.
“치유 능력은 나만 가지고 있으니까, 당연히 내가 가야 한다고 생각해.”
시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봤자 축복도 못 쓰는 반쪽짜리잖아. 차원문 너머에선 마법사가 특권 계층이니까, 마법사인 내가 가는 게 가장 나아.”
나름 합리적인 말이었으나, 이 또한 금방 반격이 들어왔다.
“나도 마법산데?”
네티의 말.
“뭐래, 정밀 조작도 못 하는 반푼이가.”
시리의 반격.
“어차피 언니들은 멍청해서 다 짐 덩어리일텐데… 그냥 지능 순으로 가면 안 돼?”
막내의 혐오 발언.
말싸움이 길어지려는 찰나, 쇠미리가 중재에 들어갔다.
“자, 다들 그러지 말고요. 시간 없으니까… 가위바위보로, 괜찮죠?”
딱히 더 나은 대안이 없기 때문인지, 자매들은 가위바위보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 결과…
“승자는 박네티. 다들 불만 없죠?”
막내가 작게 시발이라고 중얼거린 것 같았으나, 쇠미리는 못 들은 척 네티에게 투명 망토를 내밀었다.
“여기 투명 망토 챙겨가세요. 군장이랑 물약도 꼭 챙겨가시고요. 그리고… 성녀님?”
“응? 난 왜?”
“네티에게 성물 하나 건네주세요.”
“…왜? 축복이라도 빌어줄까?”
성녀가 가슴 사이에서 주섬주섬 성물을 꺼내며 그렇게 말하자, 쇠미리가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여명 때문에 예지가 잘 안 되시는 거 알아요. 성물에 예지를 쓰면 어떻게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
성녀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라고 묻지 않았다.
쇠미리가 여명에 대해 알고 있는 온갖 비밀들은 지금도 충분히 이상할 정도였으니까.
그저, 그녀의 예지처럼 뭔가 비밀이 있으리라고 짐작할 뿐.
‘…나중에 여명이 말해주겠지.’
성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가슴골 사이에서 책과 붓이 그려진 성물을 꺼냈다.
지혜의 청색 신 베눌의 성물.
그녀는 네티의 손에 성물을 꼭 쥐여준 뒤, 사심을 담아 포옹했다.
네티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포옹 받기를 잠시.
방에 있는 모두가 네티에게 각자 도움이 될만한 물건을 건넸다.
특히, 막내는 큰 언니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주 비밀스러운 물건을 그녀의 주머니에 남몰래 쑤셔 넣었다.
…아무튼, 준비가 끝난 네티는 군장을 등에 메고 차원문 앞에 섰다.
“언니랑 형부 찾아서 돌아올게.”
“구멍 동서… 아니, 기둥 자매는 되지 말고.”
막내의 말에 성녀가 기겁하는 순간, 네티는 차원문으로 뛰어들었다.
번쩍!
쇠미리와 성녀에게는 익숙한 황금색 마나가 뿜어져 나오며 네티를 집어삼켰다.
그렇게.
차원문을 넘는 당사자인 네티에게는 눈 한번 깜빡할 시간이 흐르고.
그녀가 가장 먼저 마주한 광경은, 검은 드레스를 입고 불타는 거리를 가로지르는 언니와…
붉은 머리의 엘프와 도시를 박살 내며싸우는 여명의 모습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