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42)
을 위한 세계는 없다-142화(142/817)
〈 142화 〉 몰락한 자들의 도시 (5)
* * *
***
여명이 세티가 던진 검을 받아들고, 엘프의 기습을 막은 그 순간.
쩌엉!!
최초의 충돌음이 울렸다.
일격을 막아낸 여명의 근육이 일제히 수축하고, 딛고 있는 대리석 바닥이 박살 났다.
그러나 엘프의 공격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녀석의 검이 뿌리처럼 휘어지며 기어코 그의 목을 노렸다.
여명은 마나를 끌어 올리고, 어깨에 힘을 실었다.
파양결의 마나가 호응한다. 팽팽하게 당겨진 혈관과 근육들을 따라 검에 파도가 담겼다.
!!!
검과 검이 부딪치며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폭발한 마나가 소리를 집어삼킨 탓이었다.
어쩌면, 고막이 터진 걸지도.
어느 쪽이건 상관없었다. 여명은 검을 휘둘렀고, 엘프 또한 재차 그에게 검을 뻗었다.
엘프의 검은 시작과 끝이 없었다. 어떨 때는 직선을 그렸고, 어떨 때는 곡선을 그리며 끝없이 이어졌다.
익숙한, 엘프 검술.
쇠미리의 호위인 리메가 보여준 것과 똑같은 초식, 똑같은 궤적을 그리는 검술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격이 달랐다.
리메의 검술이 권총이라면, 눈앞의 엘프가 휘두르는 검은 대포나 다름없었다.
칼에 담긴 위력이, 검술이 만들어내는 결과가 그랬다.
검과 검이 부딪치며 일어난 충격파에 대리석 바닥이 으깨진다. 유리창이 터져나가고, 기둥에 쩌저적 금이 갔다.
레스토랑 건물 전체가 흔들리며 비명을 질러댔고, 도망치는 사람들은 그보다 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엘프의 검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
붉은 잎사귀가 그려진 그의 검은 여명의 목을 자르긴커녕 자잘한 상처만 입혔다.
어째서? 붉은 머리의 엘프는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녀석, 이미 엘프 검술을 알고 있구나.
“…이제야 범인을 찾았군.”
“무슨 개소리야?”
여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밑도 끝도 없이 기습하더니, 범인이 어쩌고 어째?
“잡아떼봤자 이미 늦었다. 이 도둑놈아.”
엘프는 그리 말하며 검기를 일으켰다. 정순한 마나를 가진 엘프 특유의 반투명한 검기.
여명은 엘프가 뭔가 오해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지만, 대화로 풀 생각은 없었다.
이미 검을 맞댄 이상, 말보다는 검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으니까.
“인간들은 팔 하나쯤 자르면 고분고분해지지. 너는 조금 더 버티길 바라마.”
엘프가 이죽거리며 검을 휘두르는 것과 여명이 얼음송곳 주문을 완성하는 건 거의 동시였다.
다음 순간, 반투명한 검기와 얼음송곳이 충돌하며 작은 얼음 송이들이 허공을 가득 채웠다. 엘프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법?”
여명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건물 바깥으로 내달리는 동시에, 아슬아슬한 기둥들을 얼음송곳을 날렸다.
까드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기둥이 박살 나고,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엘프 또한 즉시 건물 바깥으로 몸을 날렸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여명이 미리 깔아놓은 얼음송곳이었다.
“…도둑놈치고는 제법인데.”
녀석은 옆구리에 박힌 얼음송곳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여명은 가볍게 응수했다.
“그쪽도 암살자치곤 제법이야.”
사나운 미소, 짧은 침묵.
여명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 한 방울이 턱 끝에 맺히고, 땅으로 떨어지는 그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검기를 흩뿌렸다.
***
“거참, 오래 살다 보니 엘프에게 기습도 당해보는군요.”
요제프는 저 멀리, 건물 지붕 위에서 격돌하는 여명과 엘프를 보며 중얼거렸다.
무너진 레스토랑 건물 잔해에서 시작된 불이 주변으로 번진 덕분에, 밤하늘 아래에서도 둘의 싸움이 선명히 보였다.
“혹시, 엘프에게 뭔가 원한을 산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요제프의 질문이 향한 건 검은 드레스 차림의 세티였다.
그녀는 요제프를 비롯한 레스토랑의 일반인들을 구한 뒤 여명을 도우려 했지만, 정작 싸움에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도와줬으면 도와줬지, 이렇게 기습당할만한 일은 한 적 없어요.”
“그건 좀… 이상하군요.”
요제프는 엘프의 복장을 확인하며 턱을 쓸었다. 세티는 여명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물었다.
“정말 이유를 모르겠어요. 금화에 걸린 추적 마법 때문인가? 우리가 금화를 훔쳤다고 오해하는 걸까요?”
“아뇨, 분명 그건 아닐 겁니다.”
“….”
“금화에 걸려있는 추적 마법은 기본적인 수준입니다. 욕심 많은 인간 마법사라면 모를까, 붉은 가지가 이런 수준의 추적 마법을 걸었을 리 없습니다.”
“…붉은 가지?”
세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요제프를 돌아봤으나, 요제프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저 엘프, 분명 붉은 가지입니다. 무기상이 그것도 구분 못 하겠습니까? 장담하죠. 붉은 가지 중에서도 꽤 거물급 인사일 겁니다.”
붉은 가지.
세티는 그게 엘프들이 운용하는 특수군의 명칭이라는 걸 떠올렸다.
현대전에서 초인 게릴라가 얼마나 무서운지 똑똑히 보여준 자들.
몰타 발표로 모든 엘프 게릴라가 지구에서 추방되기 전까지, CIA 요원들의 사망 원인 1위가 바로 그들이었다.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자들이 왜 드레이테리얼에… 아니, 이상할 것 없나.
여긴 지구가 아니라, 차원문 너머였으니까.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지.’
세티는 아랫입술을 씹었다.
여명이 질 리는 없겠지만, 이 싸움을 지켜보고 있을 도시의 다른 초인들이 문제였다.
궁정백과 그 휘하의 초인들, 어딘가에 숨어있는 한국 정부의 양치기들까지.
한두 명도 아니고, 변수가 이렇게 많아서야.
세티는 애가 탔다.
맨손인 그녀는 저 정도 싸움에 함부로 끼어들 수가 없었다. 실력 이전에, 상성의 문제였다.
‘망치라도 있으면, 어떻게 기회를 만들어볼 텐데…’
지금으로선 걱정해주는 것 말고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리고 여명과 엘프가 시야 바깥으로 사라질 때쯤,그녀의 걱정은정점에 이르렀다.
세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했다.
“요제프, 우리 숙소 알죠? 거기에 금괴가 든 궤짝하고 금화 자루가 있으니까, 당장 가서 챙기세요. 가능하면 추적 마법도 풀어놓으시고요.”
“…저 싸움에 끼어드실 생각입니까?”
“기회를 봐야죠. 살아남으면 처음 만났던 하수도에서 다시 만나요.”
세티는 그렇게 말한 뒤 즉각 비각술을 펼쳐 건물 옥상으로 뛰어올랐다.
불길에 삼켜지는 도시의 광경은 처참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녀의 눈은 오직 여명만을 쫓았다.
‘괜찮아, 승산은 여명에게 있어.’
세티는 지붕을 훌쩍 뛰어넘으며 도시를 가로질렀다. 만에 하나 문제가 생겼을 때 바로 개입하기 위해 여명을 따라가는 것이었는데…
그녀가 여명과 엘프가 격돌하는 건물 주변에 도착한 바로 그때.
허공이 갈라지며 익숙한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투복을 입고, 군장을 찬 소녀는 세티도 익히 아는 인물이었다.
“…네티?”
세티는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볐다. 하지만 그녀의 동생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고, 심지어 그녀를 발견하고 후다닥 곁으로 다가오기까지 했다.
“언니!”
“너, 너 어떻…”
“사정은 나중에 설명할게, 우선 상황 좀 알려줘. 여긴 어디고, 대체 왜 형부가 엘프랑 싸우고 있는 거야?”
너무나 갑작스러운 재회라서 그랬을까, 세티는 형부라는 말에 태클 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상황부터 설명했다.
이곳은 드레이테리얼이란 도시고, 무기상과 만나는 도중 엘프에게 갑작스럽게 공격당했다…
밑도 끝도 없는 개떡 같은 설명이었음에도, 네티는 찰떡처럼 알아들었다.
“저 엘프가 적이고, 언니는 지금 비무장이라 아무것도 못 한다 이거네?”
“…정확해.”
“좋아, 그럼 우선 무기부터 챙겨줄게.”
네티는 즉시 군장을 땅에 내려놓고, 안의 내용물을 차곡차곡 꺼냈다.
각종 총기와 수류탄, 엘프의 머리카락으로 만들어진 장갑, 그리고…
망치 머리, 철봉, 손잡이로 나눠진 조립식 워해머.
세 부품을 딱딱 연결하자, 금세 커다란 워해머가 완성되었다. 네티는 언니에게 워해머를 건넸다.
익숙한 묵직함. 그 감각을 느끼고 나서야, 세티는 눈앞의 동생이 가짜가 아닌 현실이라는 걸 실감했다.
그리고 그녀의 실감과 상관없이, 네티는 능숙하게 주문을 엮으며 말했다.
“내가 염동력으로 엘프의 발목을 붙잡을 테니까, 언니는 그사이에 형부한테 합류해. 셋이서 합공하자.”
그녀가 내놓은 전술은 정석이나 다름없었으나, 세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엘프에게 기회를 주면 안 돼.”
상대는 붉은 가지다. 게릴라 중의 게릴라.
승산이 없다면 바로 몸을 빼서 도망칠 테고, 그럼 또 이유도 모른 채 기습을 당해야 하겠지.
고민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네티, 예전에 했던 양 포격 훈련 기억해?”
양 포격이란 단어가 나오자마자, 네티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녀는 저 멀리서 검기를 뿌리는 엘프의 모습을 슬쩍 곁눈질했다.
“…일격에 끝내려고?”
“그게 최선이니까.”
세티는 반론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히 말했다. 네티는 고개를 끄덕인 뒤 염동력 주문을 외웠다.
태생부터 마나 정밀 조작에 재능이 없던 그녀를 위한 최고의 주문.
그 주문이 완성됨과 동시에 보이지 않는 힘이 세티의 몸을 감싸고, 그대로 하늘 위 높은 곳까지 끌어올렸다.
이윽고.
여명과 엘프가 손바닥만 하게 보일 정도로 높이 떠오른 세티가 망치를 꽉 쥐었다.
‘홍단벽력(????)’
무지개를 끊어버리는 벼락, 세티는 마나를 끌어 올려 그 벼락을 망치에 담았다.
땅에서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번쩍이는 망치를 확인한 네티가 염동력 마법을 해제한 순간.
도시 위로 벼락이 내려쳤다.
***
엘프가 하늘 위에서 떨어지는 무언가를 감지했을 땐, 그것은 이미 코앞까지 다가온 뒤였다.
핑곗거리는 많았다.
눈앞의 인간에게 너무 신경을 쏟았기 때문에,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집중력을 앗아갔기 때문에.
하지만 그 핑계가 무엇이건 간에, 엘프의 회피는 충분하지 못했다.
!!!!!
벼락이 담긴 망치에 직격당하는 것은 피했으나, 그뿐이었다.
그가 서 있던 건물 지붕이 통째로 가루가 되어버렸으니까.
파편들이 허공에 튀어 오르고, 디딜 곳을 잃은 발이 아래로 추락했다.
만약 그것뿐이었다면, 엘프는 충분히 상황을 수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겐 조금 전까지 치열하게 검을 나누던 적이 있었고, 그 적은 이 기회를 놓치긴커녕 기다렸다는 듯 엘프에게 달려들었다.
스악!
연한 노란빛 검이 엘프의 왼쪽 어깨를 훑고 지나갔다. 뼈와 근육을 깔끔하게 잘라버리는, 극도로 절제된 일격.
그는 떨어져 나간 팔을 보며 비명을 지르는 대신, 낙법을 펼쳐 땅에 떨어지는 충격을 줄였다.
쿵! 추락의 충격이 폐부를 강타했다.
피가 목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엘프는 이를 악물고 남은 오른팔만으로 검을 들었다.
아니, 들려고 했다.
하지만 자세를 잡기도 전에, 그의 팔을 자른 검이 지그시 목을 눌렀다.
“…도둑놈에게 질 줄이야.”
기습으로 패배했다는 억울함은 없었다. 애초에 그 또한 기습으로 시작한 싸움이었으니까.
엘프는 아이러니함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목에 검을 들이댄 인간의 황금색 눈동자에는 승리의 쾌감이나 자부심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의문뿐.
“이제, 왜 이 지랄을 벌였는지 말해라.”
승자의 질문치고는 담백한 맛이 있었지만, 엘프는 입술을 비틀었다.
“…그건 네가 더 잘 알 텐데?”
인간, 천여명은 살짝 짜증을 느꼈다. 엘프는 양팔이 잘려야 고분고분해지나?
그가 한 번 더 검을 들어 올리려는데, 엘프가 이죽거리듯 덧붙였다.
“잡아떼봤자 소용없다. 지금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으니.”
“뭘?”
“네 몸에서 느껴지는 세계수의 마나… 쓰레기들이 훔쳐 간 세계수의 결정이 네놈 배 속에 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지.”
“….”
“세계수를 모욕한 인간이여. 나를 죽여도 다른 엘프가 너를 쫓을 것이다. 우리 혁명단이 남아있는 한, 너는 결코 편히 잠들 수 없을 것이다.”
진지하다 못해 결연한 목소리에 여명은 할 말을 잃었다.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인단 말인가?
물론, 그가 세계수의 결정을 먹은 건 사실이지만, 이 도시에 있다는 세계수 결정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물건이었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증명하냐는 것인데…
‘…증명은 무슨.’
여명에게 기습한 엘프를 살려주고, 오해까지 풀어줘야 할 의리는 없었다.
엘프와 관계가 나빠진다고 해도, 피해자는 누가 봐도 이쪽 아닌가.
이런 상황이라면 쇠미리도 이해해줄 것이다.
‘죽이자.’
여명이 그대로 검을 내려치려는 바로 그 순간.
낯선 목소리가 그의 검을 막았다.
“그 청년의 무고함은 내가 증명할 수 있을 것 같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