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44)
을 위한 세계는 없다-144화(144/817)
〈 144화 〉 복고주의자, 이기주의자 그리고 빨갱이
* * *
공산주의자 – 마르크스와 스탈린을 신으로 섬기는 무신론자들. 종족과 혈통을 가리지 않고 발생한다는 점에서 고대의 마족들과 유사하다.
*유의어 – 빨갱이
(중략)
민주주의 – 농노들이 직접, 자신들만큼이나 멍청한 자를 지배자로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신병의 일종.
거의 모든 종류의 공격 마법으로 치료할 수 있다.
(중략)
투표 마나를 다루는 고귀한 귀족과 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오크가 동등한 권리를 행사하는 불합리한 행위.
귀족원은 농노가 투표용지 값으로 호밀 빵 두 개, 혹은 달걀 네 개 이상을 요구할 경우 채찍질할 것을 당부했다.
『제국 귀족들을 위한 지구어 해설서 중 발췌』
***
쓰레기 도시 위로 여명이 떠 올랐다.
햇볕이 손을 내밀어 어둠을 벗겨내자, 그 아래 잠들어 있던 도시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자연법칙상, 햇빛이 가장 먼저 비춘 건 도시의 동부였다.
소련이 남겨두고 간 공장들과 노동자들의 주거지가 어지럽게 뒤섞인 곳.
그런 동부의 뒷골목, ‘낙타의 눈물’이라 불리는 술집 다락방에서 한 청년이 새벽 공기를 맡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우연치고는 기가 막히게도, 청년이 창문을 여는 순간 햇빛이 주변을 밝게 비추었다.
갑작스러운 햇빛에 청년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빛에 익숙해지기 위해 눈 몇 번 깜빡인 뒤, 창문 아래 풍경을 눈에 담았다.
피곤에 절여진 채 출근하는 노동자들, 북부로 향하는 상인들과 이제야 문을 닫기 시작하는 술집들…
그 풍경은 청년으로 하여금 인천의 뒷골목을 떠올리게 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거기서 거기인 걸까?
그는 바다 비린내 대신 녹슨 쇠와 눅진한 약품 냄새가 나는 도시를 보며 고향을 추억했다.
등 뒤에서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계속.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를 따라 청년이 고개를 돌리자,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검은 머리 소녀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어젯밤에 미처 갈아입지 못한 드레스 자락을 질질 끌며 방안으로 들어오더니, 방의 유일한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안녕 여명, 좋은 아침… 은 아니네, 왜 벌써 일어났어? 혹시 밤샌 건 아니지?”
“자긴 잤어. 깊이 자지는 못했지만.”
청년, 여명이 그렇게 대답하기 무섭게 소녀는 기지개를 켰다. 드레스 사이로 매끈한 겨드랑이가 살짝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여명은 애써 시선을 돌리며 창문을 닫았다.
햇빛이 차단된 방으로 은은한 어둠이 깔리자, 소녀는 의자 등받이에 무게를 실어 의자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삐걱, 삐걱. 의자가 비명을 지르는 가운데, 여명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세티, 너야말로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너랑 비슷한 이유지 뭐.”
잠이 오질 않았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여명, 어젯밤에 그 제안… 어떻게 할 거야?”
앞뒤가 다 잘린 질문.
여명은 무슨 소리냐고 되묻는 대신, 어젯밤에 들었던 비코프… 그러니까, 동부 궁정백의 말을 떠올렸다.
용의 해방자, 외람되지만… 나를 좀 도와줄 수 있겠나?
술집 주인으로 변장해 있던 궁정백은 정체를 밝힌 뒤, 설명을 시작했었다.
반년 전부터 누군가 도시 바깥으로 소문을 흘리고 있다네. 세계수의 결정과 비전유물이 도시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허무맹랑한 소문을… 덕분에 온갖 놈들이 도시에 모여들고 있지.
여명은 그의 말이 진실이냐고 물어보지 않았었다. 바로 어제 만난 무기상 요제프가 그 소문의 산증인이었으므로.
내가 따로 추적해보니, 소문의 진원지는 서쪽과 남쪽의 궁정이었다네.분명 두 궁정백이 각자 가진 보물을 미끼로 의도적으로 소문을 뿌리는 거겠지.
두 궁정백이 뭘 노리는 건지 모르겠지만, 분명, 이 도시에 좋지 않은 일이겠지. 둘 다 이 도시를 끔찍이도 싫어하니 말일세.
난 그들의 음모를 막을 생각이라네. 이 도시는 내 고향이고, 몇몇 멍청이들의 욕심으로 고향이 망가지는 걸 구경만 할 수는 없네.
그것을 끝으로, 동 궁정백은 간곡한 목소리로 여명에게 손을 내밀었다.
용의 해방자… 아니, 천여명. 나와 함께 그들의 음모를 막아줄 수 없겠는가? 이 도시의 모든 인민을 위해서.
그러나 여명은 그가 내민 손을 붙잡는 대신, 조금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했다.
동부 궁정백이 그를 기습한 엘프와 동맹이라서?
물론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떠날 사람이란 점이었다.
여명과 세티가 이 도시에 볼 일은 단 하나.
서 궁정백과 결탁한 한국 정부의 양치기들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느냐 뿐.
양치기들을 죽이게 될지, 아니면 그냥 음모만 알아내고 떠날지 확실히 정한 건 아니지만.
어느 쪽이건 그 일이 끝나는 대로 여명은 기차를 타고 도시를 떠날 생각이었다.
초인 올림피아 전까지 아카데미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동 궁정백과 손을 잡고 일을 벌이기엔, 시간이 넉넉지 않다…
여명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세티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난 거절에 한 표.”
“왜? 너는 찬성할 줄 알았는데.”
여명이 되묻자마자, 세티의 고운 아미가 살짝 휘어졌다.
“시간도 문제지만… 동 궁정백, 그 노인네 영 믿음이 안 가.”
“믿음이 안 간다… 뭐, 확실히 그렇긴 해.”
러시아식 이름을 쓰고 빨갱이 엘프와 손을 잡은 건 그렇다 쳐도, 정체를 숨기고 직접 술집을 운영하는 높으신 분이라.
단순한 취미 생활이라고 넘어가기엔, 여명의 뒷골목 생활이 너무 길었다.
주변이 전부 내려다보이는 이 술집 위치, 엘프와 나눈 비밀 암호… 척 보면 알 수 있었다.
동 궁정백은 뒷골목과 밀접한 연관이 있거나, 혹은 뒷골목 돌아가는 꼴을 매우 잘 아는 사람이라는 걸.
“그럼 동 궁정백의 제안은 거절하기로 하고… 남은 문제는 우리끼리 서 궁정백의 뒤를 캘 수 있느냐인데.”
“그거야 뭐 문제 돈도 있고, 요제프도 있잖아?”
세티는 어젯밤 요제프에게 금화를 회수하고 추적마법을 지우라고 명령한 것, 그리고 하수도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던 것까지 덧붙여 설명했다.
엘프와 싸우는 새에 그런 일을? 여명은 세티의 손등을 쿡 찔렀다.
“잘했어.”
“별말씀을.”
세티가 호응하듯 그의 볼을 쿡 찔렀다. 둘은 서로를 보며 피식 웃은 뒤, 각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동 궁정백에게는 아쉬운 일이지만, 두 사람은 이대로 작별 인사도 없이 술집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와 손잡지 않기로 선택한 이상, 이 술집에 있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아 참, 그리고… 그, 네티 말인데.”
“내 동생?”
“어떻게 이 도시로 온 거야? 자매들 간의 특수 능력 같은 건가?”
“…그런 특수 능력은 없어. 있으면 좋겠지만.”
“그럼?”
“그… 미안, 나도 아직 잘 몰라. 정신이 없어서 자세히 못 들었거든. 잠들기 전에 한 설명으로는 쇠미리가 차원문을 열었다는데…”
“…쇠미리가?”
엘프 공주에게 차원문을 여는 능력도 있었나? 여명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문에 귀를 딱 붙이고 있던 소녀가 방안으로 쓰러졌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넘어진 그녀는 갑작스레 문을 열 줄 몰랐다는 듯,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여명과 세티를 올려다봤다.
“….”
짧은 침묵. 그녀를 내려다보던 세티가 도끼눈을 뜨자, 소녀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어, 언니, 저기… 나는… 여, 엿들으려던 게 아니고…”
“네티!”
네티가 무어라 변명하려 했지만, 세티가 빽 소리치며 그녀의 귓불을 붙잡는 게 조금 더 빨랐다.
귀를 잡힌 네티는 비명을 지르며 바깥으로 끌려나갔다.
잠시 자매들의 해프닝을 지켜보던 여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두 소녀를 뒤따랐다.
***
네티는 마차 바깥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도로를 걷는 사람들을 살펴보다가, 다시 고개를 안으로 넣고 여명을 바라보았다.
“형부, 우리 지금 어디로 가요?”
“…”
마차 의자에 등을 파묻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여명은 잠이 확 달아나는 느낌을 받았다.
형부라는 단어 속에 담긴 낯간지러움 탓이었다. 그는 자신을 형부라 부르는 소녀를 보며 눈을 껌뻑였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계속 부르라고 해야 하나?
‘형부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면 오빠라고 부를 거 같은데…’
어째서일까? 오빠라고 불리면 안 된다고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명은 그냥 대답만 했다.
“…일단, 도시 북부의 기차역으로 가는 중이야.”
“오, 기차. 여기가 그거죠? 차원문 너머에서 가장 큰 남북 대륙 횡단 철도.”
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티의 말대로, 드레이테리얼의 북부에는 거대한 기차역이 존재했다.
이름을 붙여줄 스탈린이 사라졌기에, 그저 남북 횡단 철도의 종점이라고 불리는 곳.
“그리 큰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아. 지구인이 보기에는 그냥 크기만 큰 옛날 기차역이니까.”
“얼마나 큰 데요? 개성역보다 커요?”
“당연히 개성역보다는 클걸. 정확히는 몰라도 몇 배는 더 크겠지.”
이 쓰레기 도시가 유지되는 이유 중 7할이 대륙 횡단 철도와 저 기차역 덕분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 더 설명해 무엇할까.
네티는 오, 감탄사를 내뱉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고 여명은 다시 눈을 감았다.
조금이라도 잠을 보충할 생각이었는데, 처제(?)는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또다시 그를 불렀다.
“저기, 형부.”
“…왜, 또 뭐가 궁금한데?”
“언니랑 어디까지 진도 뺐어요?”
여명은 물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물을 마시던 중이었다면 당장 물을 뿜었을 테니까.
그가 정색하는 걸 본 네티가 음흉하게 미소지었다.
“우리 언니, 잘해요?”
“…뭐?”
“에이, 아시면서. 이거요. 이거.”
네티는 양손으로 어떤 모양을 만들어 손가락을 넣었다, 뺐다. 노골적이다 못해 얼굴이 화끈거리는 제스처.
여명이 뭐라 할 말을 떠올리지 못하고 관자놀이를 주무르는 사이. 네티가 재차 말했다.
“설마… 목석은 아니죠?”
“…뭐?”
“사실, 엄청나게 걱정했어요. 그렇게 안 보여도 우리 언니가 부끄러움이 많아서… 그, 정작 실전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못 하는 게 아닐까…?”
“….”
“그리고 형부는 딱 봐도 경쟁자가 많잖아요? 그에 비해 언니는… 섹시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없고…”
그녀가 말끝을 흐리는데, 여명이 정색하며 한마디 했다.
“…세티는 충분히 매력적이야.”
“에이, 우리 언니는 속옷도 맨날 보급받은 것만 입는걸요? 이번에 검은 레이스 달린 거 선물 해주…”
쿵!
네티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마차가 갑자기 멈춰선 탓이었다.
세티가 왔나? 아니, 그건 아니었다.
그녀는 요제프와 금, 그리고 발라구를 회수하기 위해 따로 떨어져 도시 남부로 떠났으니까.
‘…불길한데.’
여명은 뭔가 찝찝함을 느끼고 마차에서 내렸다.
바깥 도로에는 온갖 달구지와 수레, 마차들이 가득했는데, 모두가 일제히 바퀴를 멈춘 채 북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명은 가만히 서 있는 중년인을 붙잡고 물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지게를 진 중년인은 운송 노동자인 듯싶었는데, 대체 뭘 봤는지 조금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 방금 못 봤소?”
“보다뇨? 뭘 보신 겁니까?”
“어… 그… 뭐냐, 운석? 운석이 떨어졌소.”
“…운석?”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졌다고? 그럼 도시가 이렇게 멀쩡할 리가 있나.
여명은 이 중년인인 다른 걸 보고 착각했거나… 마법을 봤다고 확신했다.
그는 뒤늦게 마차에서 내리는 네티를 확인한 뒤, 훌쩍 마차 위로 뛰어올랐다.
마차의 마부가 기겁했지만, 여명은 상관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떴다.
북부 기차역으로 향하는 길은 전부 정체되어 있었다.
“네티, 비각술 쓸 줄 알아?”
여명이 묻자마자, 네티는 대답 대신 훌쩍 깃걸음을 펼쳐 마차 위로 올라섰다.
백 마디 말보다 확실한 행동이었다.
여명은 마부에게 동전 주머니를 던져준 뒤, 비각술을 펼쳐 마차 위에서 훌쩍 뛰어올랐다.
파앗!
마차 지붕에서 수레로, 수레에서 건물 벽면, 그리고 다시 마차 지붕으로.
그가 거의 날아가듯 달려가며 뒤를 확인해보니, 네티는 아무 문제 없이 따라오고 있었다. 어떤 면에선 세티보다 더 익숙해 보이는 모습.
“형부, 전 신경 쓰지 말고 더 빨리 가셔도 돼요!”
네티가 소리쳤고, 여명은 기꺼이 속도를 높였다.
그렇게 두 사람이 비각술을 펼쳐 단숨에 거리를 주파하길 한참.
여명은 저 멀리서 보이는 기차역과 그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확인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폭격이라도 맞은 건가?”
기차역을 본 네티의 감상. 여명은 그 감상을 부정하지 않았다.
개성역보다 더 커다란 기차역에는 뻥 구멍이 뚫려 있었으니까.
두 사람은 속도를 줄여 천천히 북부 기차역으로 다가갔다.
가는 길목에는 소방관과 상인, 그리고 세 명의 궁정백들이 따로 관리하는 경비대가 쉴 새 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들을 지나쳐 기차 안까지 들어가 보니, 내부는 외부보다 더 심각했다.
무너지고 녹아내린 철골 아래, 수많은 기차가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기차가 아니라 철도였다.
비전문가인 여명이 보기에도 한동안 수리하는 게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녹아내린 철도.
“이거… 사고가 아니라 테러네요? 노골적으로 철도를 노렸어요.”
네티가 모습을 보며 말했다. 여명은 말없이 눈살을 찌푸렸다.
기차를 타고 차원문이 있는 도시로 가려던 계획이 어그러져서? 아니, 아니었다.
기차역을 강타한 불길이 무엇인지 눈치챈 탓이었다.
“대체 무슨 방법으로 공격한 걸까요? 미사일? 메테오?”
“…둘 다 아냐.”
“예? 형부는 뭔지 알아보시겠어요?”
여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철도를 바라봤다. 정확히는, 아직도 철도를 태우는 푸른 불꽃을.
“드래곤 브레스.”
그건 만주에서 이미 본 적 있는, 스켈레톤 드래곤의 숨결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