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45)
을 위한 세계는 없다-145화(145/817)
〈 145화 〉 복고주의자, 이기주의자 그리고 빨갱이 (2)
* * *
***
여명이 철도에 남은 불꽃을 주의 깊게 살펴보던 그때.
모두 역에서 나가라!
꼬장꼬장한 늙은이의 목소리가 무너진 역 전체에 쩌렁쩌렁 울렸다. 마법으로 성량을 키운 듯, 마나가 가득 담긴 목소리.
조 판토리아노 궁정백님의 명령이다! 지금부터 역은 마법사단이 통제한다!
조 판토리아노? 여명은 그게 서 궁정백의 이름이란 사실을 떠올리고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양치기와 손을 잡은 궁정백.’
카할 마그두가 역을 습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 궁정백의 병력이 역을 점령한다고?
우연이라기엔 공교롭고, 준비된 계획이라기엔 노골적이다.
카할 마그두가 한국 정부와 손을 잡았던 북만주 사태를 떠올려보면, 역을 파괴한 게 서 궁정백의 계획일 가능성이 크지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철도를 파괴한 거지? 도시의 젖줄을 스스로 끊어버리다니.’
여명은 의문을 삼키며 걸음을 돌렸다. 더는 역에서 볼 일이 없었으므로.
네티가 자연스레 그의 뒤를 따랐고, 두 사람은 피난민처럼 우르르 바깥으로 나가는 상인들 틈바구니에 끼어들었다.
궁정백님의 명을 어기고 역에 남는 사람은 신분을 불문하고 즉결처벌할 것이다! 반복한다! 모두 역 바깥으로 나가라!
위협적인 마법사의 경고를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역을 벗어났다.
역 밖에서 출입을 통제하던 마법사 몇 놈이 여명과 네티를 힐끗거렸으나, 마나를 느낀 건지 굳이 두 사람을 검문하지 않았다.
잠시 후, 앞서 나가는 여명의 등을 향해 네티가 물었다.
“형부, 이걸로 지구로 돌아가는 길 막힌 거죠?”
“한동안은? 철도가 저 정도로 망가졌으니… 수리할 때까지 꼼짝없이 이 도시에 있어야 해.”
“그럼 철도 말고, 걸어서 차원문이 있는 도시까지 가는 건 어때요?”
네티의 눈동자가 묘한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여명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글쎄, 나는 상관없지만… 몇 달 동안 화장실도 없이 길에서 노숙하면서 갈 수 있겠어?”
“….”
몇 달씩이나? 네티는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질색했다.
“…그냥 철도가 수리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겠네요.”
여명은 세티와 닮은 그녀의 표정을 보며 피식 웃은 뒤,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역 앞 길목에는 쫓겨난 상인들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널브러져 있었는데, 모두 조금 전의 테러로 돈과 상품을 잃은 상인들인 듯싶었다.
잠시 상인들을 둘러보던 여명이 입을 열었다.
“저기… 네티?”
“이름 말고 처제라고 부르셔도 되는데.”
네티가 은근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명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세티를 만나러 가는 건 조금 미뤄야겠어.”
“예? 왜요? 기차 때문에요?”
“그런 것도 있고… 여기가 작업을 시작하기엔 딱인 것 같아서.”
네티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이라니? 무슨 말이지?
여명은 그녀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대신, 커다란 짐을 질질 끌고 가는 상인에게 다가갔다.
“뉘쇼?”
갑작스러운 접근에 상인이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여명은 적의가 없다는 걸 증명하려는 듯,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 어르신. 말씀 좀 묻겠습니다.”
“…바쁜 거 안 보이쇼?”
상인이 퉁명스레 대답하자마자, 여명은 품에서 슬쩍 은화 한 닢을 꺼냈다.
“잠깐이면 됩니다.”
돈을 거부하는 상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법.
반짝이는 동전을 본 상인은 못 이기는 척 동전을 받았다.
“뭐… 들어나 봅시다.”
돈 앞에서 태도가 뒤바뀌는 걸 본 네티가 헛웃음을 내뱉건 말건, 여명은 질문을 이어나갔다.
“제가 외지인이라 그런데, 괜찮은 숙소를 추천해주실 수 있을까요?”
“…숙소?”
“철도가 수리될 때까지 꼼짝없이 이 도시에 갇혀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가격은 상관없으니, 상인분들이 잘 아시는 곳을 추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뜬금없는 질문이었던 걸까? 상인은 말없이 여명의 위아래를 훑었다. 그리고 뒤에 있는 네티의 얼굴까지 보고 나서야, 턱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이런 도시까지 관광을 오다니, 참 팔자도 좋소.”
“여행은 젊어서 해야 하는 법이니까요.”
“그거야 귀족 나리들이나 그렇지… 뭐, 여기서 큰길을 따라 서쪽으로 쭉 가면 황금 연못이란 곳이 나올 거요. 가격은 좀 비싸지만, 치안은 이 도시에서 가장 좋은 곳이니. 그곳으로 가시오.”
거기까지 말한 상인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휙 등을 돌렸고, 여명 또한 굳이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는 상인의 추천대로 서쪽으로 향하는 대신, 다른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그가 은화를 뿌린 걸 모르는 상인들의 사이에 도착한여명은 또 다른 상인에게 다가간 뒤,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제가 외지인이라 그런데, 괜찮은 숙소를 추천해주시겠습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은 있어도, 은화를 거부하는 상인은 없었다.
그들은 모두 상인다운 정직함으로 질문에 대답했다. 대답이 모두 비슷비슷하다는 게 그 증거였다.
황금 연못, 호박 탑, 비취 궁전…
네티가 이 도시의 고급 숙소 이름을 전부 외우고, 여명이 적어도 은화 스무 닢은 썼을 때쯤.
가만히 그를 따라다니던 네티가 물었다.
“형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별 거 아냐, 얼굴도 알리고, 낚시도 하고.”
“…낚시요? 우리 지금 상인들만 만나는 거 같은데요?”
“상인들은 강이지. 우리가 상인들에게 미끼를 던졌으니, 이제 곧 진짜 물고기가 낚일 거야.”
그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네티가 무어라 더 묻기 전에, 여명이 또 다른 상인을 찾아낸 까닭이었다.
이번 상인은 얼굴의 흉터가 인상적인 중년인이었는데, 그는 여명의 질문에 남들과 조금 다른 답을 내놨다.
“숙소? 괜찮은 숙소라면 내가 아주 잘 알지, 원한다면 직접 안내해줄 수도 있고.”
여명과 네티를 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노골적인 탐욕이 깃들어 있었으나, 여명은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감사하다며 은화 한 닢을 더 건네기까지 하자, 상인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자, 따라오게, 부인분도 편히 쉴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해주지.”
부인? 거, 음흉한 눈빛이나 치우고 말하지.
네티는 자신의 몸을 훑는 상인의 머리를 날려버리고 싶은 욕망을 꾹 참았다. 여명이 말한 낚시가 무엇인지 이제야 깨달았으니까.
아무튼, 두 사람은 순순히 상인을 따라갔다.
그리고 북부를 벗어나 서 궁정백이 사는 탑이 보일 때쯤, 상인은 지름길이 있다며 대로를 벗어나 골목길 사이로 그들을 이끌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안전한 골목만 다니고 있으니.”
상인이 뭐라고 지껄이건 간에, 여명은 호구처럼 웃기만 했다.
그렇게 뒷골목 특유의 냄새에 네티가 인상을 찌푸리고, 태양이 슬그머니 기울어질 때가 돼서야, 상인은 어떤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숙소는커녕, 술집으로도 못 써먹을 낡은 건물.
“자, 도착했다! 던칸의 여관, 아는 사람만 아는, 이 도시에서 가장 훌륭한 숙소지!”
가장 훌륭한 숙소라고? 여명은 피식 웃었다.
초인의 민감한 후각은 건물 너머에서 달짝지근한 풀 타는 냄새와 그사이에 숨겨진 피 냄새를 놓치지 않았으니까.
마약과 피.
여명은 노골적으로 웃는 상인을 향해 마주 웃어줬다.
“…제대로 찾아왔네요.”
***
쿵!
쿵, 쿵!
쿵, 쿵, 쿵!
뒷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낡은 건물을 가득 채웠다.
아직 손님이 올 시간이 아닌데?
건물 1층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남자는 짜증과 피곤이 반반 뒤섞인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나, 뒷문으로 향했다.
“누구시오?”
“던칸이란 사람을 찾아왔는데.”
“…이 시간에? 누구 소개로 왔소?”
“이름은 모르지만, 흉터가 있는 상인의 소개로 왔어. 큰돈을 벌게 해준다고 하던데?”
“아, 마디안의 소개로 오신 분들이군. 잠시만 기다리시오.”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마디안 이름을 듣는 순간, 조금 전까지 몸을 억누르고 있던 피곤함이 싹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디안은 조직에서도 알아주는 노예상이었으니까.
남자는 이번에도 순진한 놈들이 제 발로 노예가 되기 위해 온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가 별걱정 없이 문고리를 잡은 순간.
쾅!
건너편에서 뭔가가 문을 후려쳤다. 낡은 나무문은 그대로 박살 났고, 문 뒤에 있던 남자도 덩달아 뭔가에 처맞았다.
“커헉!”
남자는 그대로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가슴에서 올라오는 고통 때문에 숨이 턱턱 막혔다.
갈비뼈가 부러진 것일까? 그는 숨을 내쉬기 위해 꺼억, 꺼억, 몸을 떨면서 문을 확인했다.
‘이런, 미친…’
문을 후려친 건 마디안이었다. 정확히는, 누군가가 마디안의 머리를 붙잡고 문을 후려쳤다.
이마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몸을 부르르 떠는 마디안과 피에 젖은 문짝.
설마 아까 문을 두들기던 소리도 마디안의 머리통으로 낸 걸까?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마디안의 움푹 들어간 이마가 설명되지 않았다.
“크흑, 너… 시발, 쿨럭, 누구냐?”
남자는 마디안의 머리카락을 붙잡은 낯선 청년을 향해 물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른 조직에서 보낸 암살자? 아니면 요즘 외부에서 별의별 놈들이 꼬인다더니, 그런 놈들 중 하나일까?
아니, 분명 그런 놈일 것이다.
대낮부터 사람의 머리통을 깨부수는 미친놈은 이 도시에서도 흔치 않았으니까.
“저, 정체를… 밝….”
남자의 말은 그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그대로 픽 고개를 숙였다. 기절이었다.
청년은 잠시 남자를 내려다보다가, 마디안을 문 앞에 내던지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말없이 건물 내부를 훑었다. 평범한 여관으로 위장한 건물 1층에는 특별할 게 없었다.
먼지 쌓인 바와 술병들, 그리고 어수선하게 널브러진 탁자와 의자까지.
하지만 겉모습은 감출 수 있어도, 냄새까지 숨길 수는 없는 법이다.
그는 후각에 마나를 모으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목표를 찾을 수 있었다.
바 테이블 뒤편, 입구가 숨겨진 지하실.
청년, 여명은 냄새를 따라 지하실로 향했다.
하지만 그가 몇 걸음 가기도 전에, 문 바깥에 있던 네티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형부… 설마 다 죽인 건 아니죠?”
세티와 달리 살인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녀는 피를 철철 흘리는 마디안과 쓰러진 남자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살인에 거부감을 가지는 게 정상이긴 하지.’
여명은 그런 생각을 하며 네티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둘 다 안 죽었어. 아직은.”
“아직은? 언니랑 비슷하게 말하시네요.”
그야 세티에게 배운 말투니까. 여명은 어깨를 으쓱인 뒤, 지하실로 향했다.
그가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네티는 그의 뒤를 따르며 재잘거렸다.
“아까 상인들을 이용한 것도 그렇고, 이런 곳은 어떻게 단박에 찾으신 거예요?”
“…정보와 경험이지.”
사막의 망령, 다갈에게서 짜낸 정보와 청소부 시절 뒷골목 조직들의 항쟁과 밀수업자들을 구경하며 쌓은 경험.
여명은 굳이 자세한 내용까진 말하진 않았고, 네티는 그의 말을 멋대로 해석했다.
정확히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형부는…위험한 동네 출신인 거죠? 이 도시처럼 범죄자가 가득하고, 매일매일 총소리가 울리는… 멕시코 시티 같은 곳?”
“….”
인천이 그 정도 막장 도시는 아닌데. 여명은 굳이 그녀의 상상을 깨지 않았다.
“언니랑 첫 만남은 완전 드라마였겠네요. 범죄조직과 싸우는 형부를 보고 언니가 한눈에 반해서 구해줬다던가…?”
“…아니, 그건 아냐.”
“그럼 반대로 언니가 싸울 때 형부가 구해준 건가요?”
“….”
아니, 너희 언니가 날 기습하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팼어.
여명이 턱밑까지 올라오는 말을 삼킬 때쯤, 지하실로 향하는 계단에 자욱한 연기가 차올랐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연 연기.
콧구멍이 끈적거릴 정도로 달짝지근하고, 녹진한 연기가 기도를 타고 폐로 내려갔다.
폐에서 시작된 감각이 혈관으로 퍼지기 전에, 여명은 마나를 끌어 올렸다.
“…마약이야, 혈관으로 퍼지기 전에 차단해.”
네티는 경고를 들은 즉시 마나를 끌어 올리고, 코를 쥐었다.
“으, 공기 좀 정화할게요.”
네티는 그렇게 말하며 주문을 엮었다. 단숨에 완성된 염동력 마법이 허공을 휘젓고, 연기를 밀어냈다.
무술이 주력인 세티와 달리 그녀는 마법이 주력인 걸까? 여명은 네티의 염동력을 자세히 살피며 계단을 내려갔다.
잠시 후.
손님? 이 시간에?
누가 열어준 거야?!
찌 찌익, 인간, 인간 암컷이다!
두 사람은 마약에 절어있는 남자들이 가득 모인 너구리굴… 아니, 하수도의 일부를 개조해서 만든 아지트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하수도에서 만났던 쥐 수인은 물론이고, 인간과 오크, 그리고 드워프까지 한자리에 모여 약의 쾌락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 아지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약에 절은 이종족들이 아니라, 정중앙에서 눈을 감고 있는 노인이었다.
배꼽 아래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수염을 늘어트린 채, 가부좌를 틀고 있는 노인.
‘…마법사.’
여명은 단번에 노인의 정체를 알아봤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마나가 적지 않았으므로.
“누구시오?”
노인이 천천히 눈을 뜨며 물었다. 마약과 쾌락에 절어 허우적대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의 눈빛은 차분했다.
여명은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며 대답했다.
“손님.”
“…약을 사러 오신 것 같지는 않소만.”
“내가 원하는 건 약이 아니라 정보다.”
노인은 여명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우리는 정보를 취급하지 않소.”
“그래? 근데…”
여명은 검을 뽑았다. 아무 소리도 없이 드러난 연노란색 칼날이 섬뜩한 빛을 내뿜었다.
마약에 취한 이들조차 움찔, 할 정도로 진한 살기가 흘러내리는 검.
“…다갈의 말은 다르던데.”
“벌레나 조종하는 삼류 마법사 놈과 무슨 관계이신지 모르겠으나, 잘못 알고 오셨소. 우리는 정보를 살 뿐, 팔지는 않소.”
“팔 필요 없어. 나도 살 생각 없으니까.”
“…?”
그제야, 마법사의 얼굴 위로 표정이라고 할만한 게 떠올랐다.
의문, 의심, 깨달음, 그리고… 분노.
여명의 검이 그 표정에 호응하듯 우윳빛 검기를 머금었다.
눈부신 검기의 빛이 마약 연기를 밀어내는 가운데, 여명은 마법사가 예상한 답을 그대로 입에 올렸다.
“내놔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