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47)
을 위한 세계는 없다-147화(147/817)
〈 147화 〉 복고주의자, 이기주의자 그리고 빨갱이 (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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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궁정이란 정식 명칭보다 판토리아노 빌딩이란 이름으로 더 자주 불리는 드높은 건물의 33층.
드레이테리얼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널찍한 라운지에서, 두 남자가 조용히 저녁을 먹고 있었다.
메뉴는 온갖 고급 재료로 만든 산해진미와 지구에서 수입해온 고급 와인.
마법사들조차 쉽사리 먹을 수 없는 사치스러운 식사였으나, 음식을 먹는 두 사람에게서 즐거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식사.
그릇을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이어지던 정적을 깬 건, 금발을 올백으로 넘겨 빗은 세련된 외모의 남성이었다.
“오늘은 컨디션이 영 별로인가 보군.”
남자는 와인을 홀짝이며 말했다. 술잔을 까딱이는 그의 모습에선 숨길 수 없는 귀티가 묻어나왔다.
“아니면 식사가 입에 맞지 않나?”
“…아닙니다. 음식은 훌륭합니다. 단지… 생각할 거리가 조금 있는지라.”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정중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는 이 도시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검은 머리의 동양인이었는데, 행동거지 하나하나에서 절도가 느껴졌다.
마치, 잘 훈련된 짐승의 그것처럼.
“여기까지 와서 고민할 게 뭐 있다고, 전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지 않나.”
“…이 세상에 계획대로 흘러가는 일 따윈 없는 법입니다.”
“어린 용을 위한 격언? 지구인의 입에서 들으니 색다른 맛이 있군.”
금발의 남자는 피식거리며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아직 핏기가 남아있는 스테이크를 포크로 푹 찍었다.
“설마 아침에 역을 공격당한 일 때문에 그러는 건가? 그거라면 신경 쓸 필요 없어. 어차피 늙은이들의 마지막 발악일 뿐이니.”
“…그리 가볍게 여기실 일이 아닙니다. 저희가 확인해 본 바에 의하면, 이번 공격은… 적어도 드래곤, 혹은 그에 필적하는 마법사의 짓입니다.”
동양인의 목소리는 사뭇 진지했으나, 금발의 남자는 별일 아니라는 듯 스테이크를 입에 넣고 씹었다.
“드래곤에 준하는 마법사? 남쪽의 늙은이가 드디어 미쳤군. 한 달 뒤에 열릴 황제 생일에 찾아가고 싶어 몸이 달았나.”
“….”
동양인은 말없이 그의 식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남자가 고기를 삼킬 때쯤, 다시 입을 열었다.
“…지하 벙커까지 도달하려면 아직 한 달이나 남았습니다.”
“정확히는, 한 달밖에 안 남은 거지.”
“…궁정백님, 한 달은 긴 시간입니다. 엘프를 비롯한 외부인들이 활개 칠수록 변수가 늘어날 겁니다.”
궁정백이라 불린 금발의 남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와인으로 목을 축이고, 부드러운 빵까지 한입 베어 먹은 뒤에야, 느긋한 어투로 대답했다.
“내가 이 도시에서 궁정백으로 살면서 깨달은 게 한 가지 있는데, 그게 뭔지 아나?”
“…경청하겠습니다.”
“동쪽 늙은이는 미쳤고, 남쪽 늙은이는 멍청하다는 거야.”
“….”
“이제 와서 늙은이들이 무슨 발악을 하건, 승산은 이미 우리 쪽으로 기울었다는 걸 잊지 말게. 늙은이들은 우리가 하수도를 파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지 않나.”
“그건…”
“애꿎은 북쪽 역을 공격한 게 가장 결정적인 증거 아닌가. 뭐가 뭔지 모르니 일단 보급부터 끊는다… 구시대 인물다운, 멍청한 전술이지.”
서 궁정백, 조 판토리아노는 그렇게 단언했다.
동양인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으나,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해 분위기를 망칠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다시 침묵이 찾아오려는 찰나, 궁정백이 대화 주제를 돌렸다.
“일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지, 어차피 전권은 전부 그쪽에게 넘기지 않았나. 여태껏 그랬던 것처럼 알아서, 원하는 만큼 내 재산을 축내게. 애초에 그런 계약이었으니.”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됐고, 지금은… 내 보상에 대해서 듣고 싶군.”
보상.
그 단어가 나오자마자 동양인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아래에 놓여있던 가방을 꺼냈다.
가방 안에는 적어도 열 장이 넘는 서류가 들어 있었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한국 국적을 증명하는 위조 서류들이었다.
아니, 한국 정부에서 정식으로 만들어준 서류이니, 그 어떤 것보다 합법적인 서류이리라.
“이게…”
“출생증명서, 졸업증명서, 주민등록등본. 이 일이 끝나는 대로 한국인… 즉, 지구인이 되실 수 있습니다.”
궁정백은 열망에 찬 눈으로 서류를 확인했다.
“이게 끝은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각하’께서는 궁정백님이 원하시는 거라면 뭐든 제공하라고 하셨습니다.”
원하는 건 모두? 분위기가 한껏 느슨해지고, 궁정백의 잔에 다시 와인이 차올랐다.
“각하께서 사람 다루시는 법을 아는군. 물론, 나도 염치를 아는 사람이니, 대단한 건 바라지 않겠네.”
“….”
“돈은 오백억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군. 아, 물론 전부 달러로. 그 외에 필요한 건… 지배자의 권리, 이 두 개면 충분하다고 각하께 전해드리게.”
“…지배자의 권리라 하시면?”
“국회의원, 시의원, 도지사… 어디 함경도 같은 곳이라도 괜찮으니, 내게 합법적으로 권력과 땅을 주게. 그래야 내 휘하 마법사들도 군말 없이 한국으로 따라갈 테니.”
귀족과 정치인을 구분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차원문 너머 귀족의 발언.
동양인은 굳이 그의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속으로 비웃음을 삼켰다.
“예, 각하께 그렇게 전해드리겠습니다.”
***
드레이테리얼의 밤.
거대한 짐말이 끄는 수레 여러 대가 낡고 냄새나는 하수도를 벗어나 도시를 가로질렀다.
수레에는 단단하게 봉인된 나무 상자가 가득 실려 있었는데, 상자에는 제각각 ‘요술봉’ ‘전기톱’ ‘솔방울’ 같은 글자가 적혀 있었다.
누가 봐도 밀수품처럼 보이는 상자들.
그러나 밤의 장막 덕분인지, 그들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밀수품을 노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째서인지 뒷골목에서 거들먹거리던 깡패들도, 공권력을 남발하던 경비대도 그들을 보자마자 꽁무니를 빼며 도망가는 게 아닌가.
물론,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총으로 무장한 떡대 열 명이 호위하는 밀수품을 노릴 정도로 간 큰 녀석은 남부에 없었으니까.
아무튼, 수레가 도착한 곳은 상자를 가득 쌓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한 3층짜리 여관이었다.
“…여관?”
하지만 여관이란 이름과 달리 건물의 외관은 평범한 여관과 거리가 멀었다.
세상천지 어떤 여관이 철조망이 쳐진 콘크리트 담장을 성벽처럼 두르고, 옥상에 초소까지 달겠는가?
심지어 초소에는 기관총을 거치하기 위한 거치대까지 달려 있었는데, 이건 마치…
“…여관이 아니라 무슨 군사 진지 같네.”
여관(?)으로 밀수품 상자를 옮기던 푸른 눈의 소녀가 짧은 감상을 내뱉었다.
그러자 뒤편에 있던 남자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보는 눈이 좋으시군요. 이곳은 소련이 남겨둔 군사 주둔지 일부를 재활용해서 여관으로 쓰던 곳입니다.”
“….”
“제가 사업장으로 쓰기 위해 구입한 뒤 다시 진지로 개조했지요. 재밌는 역사를 가진 곳 아닙니까?”
“…아뇨, 딱히.”
정감 있는 남자의 말투와 달리, 소녀의 대답은 차가웠다.
그녀는 남자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짐을 들고 여관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 태도를 본 떡대들이 한마디 하려 했으나, 정작 무시당한 남자가 손을 내저어 그들을 막았다.
“요제프 님, 하지만…”
“고객이시다.”
“….”
“그것도 금을 궤짝으로 들고 다니는 초인 고객이지. 너희가 받은 보너스가 다 저분 주머니에서 나온 걸 잊지 마라.”
요제프는 수레에서 짐을 들어 올리며 덧붙였다.
“그리고 임자 있는 여자는 원래 다 저런 법이다. 니들은 엉덩이 가벼운 년만 만나서 모르겠지만.”
떡대들은 말이 좀 심하시다거나, 요제프님도 똑같지 않냐는 둥 투덜거리며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나무 상자를 옮겼을까? 수레를 지키던 짐말들이 앞발을 탁탁거리고, 떡대들이 전부 땀에 절었을 쯤.
골목 너머에서 익숙한 실루엣 두 개가 여관으로 다가왔다.
요제프는 반가운 표정, 그러니까 영업용 표정을 짓고 그를 맞이했다.
“오, 고객님, 드디어 오셨…”
하지만 그의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달빛 아래 드러난 손님의 몰골이 심상치 않았으니까.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너덜너덜한 옷과 온몸에 가득한 핏자국.
전쟁터 피난민이 떠오르는 모습이었으나, 고객의 표정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특유의 황금색 눈동자를 빛내며 물었다.
“제가 너무 늦게 왔나요?”
요제프는 예, 좀 늦으셨습니다 라고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어색하게, 이제 막 저녁을 차릴 거라고 대답했다.
***
“…서부의 뒷골목 조직들을 털었다고?”
‘솔방울’이라고 적힌 나무상자에서 수류탄을 꺼내던 세티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물었고.
“나 말고 형부가 다 했지.”
네티는 따뜻한 수프에 호밀빵을 찍어 먹으며 대답했다.
“…왜?”
“나야 모르지.”
“왜 몰라? 하루 종일 같이 있었다며?”
“어… 구경만 했으니까?”
“왜 구경만 했는데?”
“….”
문득, 싸한 분위기를 느낀 네티는 수저를 멈추고 언니를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수류탄을 든 언니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장난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오물거리던 빵을 꿀꺽 삼킨 뒤, 조심스레 대답했다.
“아니, 그냥… 내가 싸움에 끼어드는 게 싫으신 것 같아서… 뒤에서 도망치는 놈들만 잡았지.”
“아, 그래서 그 사람 혼자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 돌아왔구나?”
이거 잘못 걸렸… 네티는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으나, 요제프와 떡대들은 이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맥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동맹은커녕 아군도 없나?
네티는 애써 언니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아니, 그게, 재생력 때문에 괜찮다고 하셨…”
“재생력이 강해도 고통은 그대로야.”
“….”
그제야, 네티는 언니의 연애가 마냥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딸자식 키워봤자 아무 소용 없다더니, 언니도 가족보다는 남자가 먼저였을 줄이야?
하긴, 형부가 괜찮은 남자이긴 했다. 하지만 그 냉철하던 언니가 이렇게 되다니.
네티는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본 세티의 고운 아미가 휘어졌다.
“…네티, 언니가 말하는데 어디 보는 거야? 이게 웃기니? 언니 말이 우스운 거야?”
“아, 미안, 근데 솔직하게 말하면 조금 웃기잖…”
다음 순간, 세티가 도끼눈을 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데, 때마침 2층에서 구세주가 등장했다.
“뭐야, 아직도 저녁 안 먹은 거야?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지.”
샤워실에서 피와 먼지를 씻은 천여명.
그는 수건으로 덜 마른 머리카락을 털며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그가 등장하자마자, 세티는 언제 도끼눈을 떴냐는 듯 미소 지었다.
“이야… 사랑이 무섭긴 무섭구나.”
네티는 그런 언니의 표정 변화를 보며 웃음 섞인 감탄을 내뱉었으나,세티는 동생을 무시한 채, 여명과 한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곧이어 눈치 빠른 떡대 하나가 수프와 빵, 찐 스팸과 감자를 테이블 위에 차려주었다.
여명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한 뒤, 수프 한 수저를 떴다.
허여멀건 수프는 밍밍하기 그지없었지만, 시장이 반찬이라고 그럭저럭 먹을만했다.
아무튼, 여명은 식사를 하며 말했다.
“…양치기들을 찾았어.”
네티와 요제프 일행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
그러나 세티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깨닫고 눈살을 찌푸렸다.
“…벌써?”
“다갈이 본 양치기가 처음이 아니었어. 적어도 반년에서 일 년… 이 도시 서부에서 꽤 오랫동안 활동한 거 같더라.”
“이 도시에 대체 뭐가 있길래? 녀석들도 세계수의 결정을 찾는 건가?”
“목적은 아직 미지수야. 하지만 하수도에서 뭔가를 꾸미는 건 확실해,”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예상과 실제로 확인하는 건 무게가 달랐다.
세티는 여명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또 하수도야?”
“어, 그것도 서부 궁정백의 거처 바로 아래 대형 하수도.”
“….”
“당장 내일이라도 뭘 하는 건지 확인하고 싶지만… 문제는 이 도시 어딘가에 숨어 있는 카할 마그두야. 녀석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이상, 우리 쪽에서 먼저 양치기들을 노리는 건 위험해.”
세티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최대한 다른 곳 정보도 모아봐야겠네.”
“내일은 남부 쪽 조직들을 털자. 하나씩 정보를 확인하다 보면 대충 윤곽이 드러나겠…”
그렇게 여명이 말을 끝마치려던 순간.
여관 문이 벌컥 열리며 한 명의 오크, 아니 한 명의 오크와 그 오크에게 업힌 인간이 여관으로 들어왔다.
“…발라구?”
세티가 그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발라구가 아무 말도 없이 업고 있던 인간을 여관 의자 위에 휙 던져버리는 게 아닌가.
일행들은 이게 뭔가 싶어 발라구가 던진 인간을 살펴보니, 그는 술에 잔뜩 취한 초인… 아니, 기사였다.
몸에서 느껴지는 마나가, 두꺼운 기사용 흉갑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술에 취한 걸 보니 그다지 수준이 높은 건 아닌 듯싶었는데… 이 사람을 왜?
모두의 시선이 발라구에게 향하기 무섭게,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 친구, 남 궁정백의 기사요.”
“…설마, 납치한 거야?”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냐는 질문. 발라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3차로 술 마시러 왔소.”
“….”
이게 무슨 개소리야? 여명이 눈살을 찌푸렸으나, 발라구는 당당했다.
“그 친구, 술만 들어가면 물어보는 건 뭐든 술술 답해줍니다. 오죽하면 별명이 뚫린 입이었지.”
“….”
“때마침 그 친구가 많이 취했는데, 이참에 남부 궁정의 사정을 좀… 물어보는 건 어떻겠소?”
여명은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금화 한 닢을 꺼내 발라구에게 튕겼고.
금화를 낚아챈 발라구는 윙크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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