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53)
을 위한 세계는 없다-153화(153/817)
〈 153화 〉 차가운 지옥으로 가는 길 (4)
* * *
***
궁정백씩이나 되는 인간이 어째서 하수도를 돌아다니고 있는 걸까?
그것도 가짜 얼굴을 뒤집어쓴 채로.
여명은 다가오는 동 궁정백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시체 하나당 금화 열 닢을 주지. 어떤가?”
그는 술집 주인으로 변신해있던 저번과는 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치렁치렁한 로브를 입고 낡은 지팡이를 든 꼴이 전형적인 골방 마법사를 떠올리게 했다.
익숙한 목소리 아니었다면,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로 완벽한 변장.
“으음… 금화 서른 닢으로는 모자란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궁정백이 물었다.
아직 목소리 변조를 할 줄 모르는 여명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궁정백 또한 목소리로 여명의 정체를 눈치챌 수도 있었으니까.
그는 입을 다문 채 한걸음 물러나, 궁정백에게 길을 터줬다.
“…꽤 과묵한 친구로군.”
다행히, 궁정백은 여명의 얼굴을 덮고 있는 환상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
피눈물의 환상이 정교한 것도 있었지만, 그의 시선이 죽은 양치기들에게 쏠려있는 덕분이었다.
여명이 길을 터주자마자, 궁정백은 먹이를 발견한 고양이처럼 쪼르르 양치기들의 시체로 다가갔다.
“오호… 강령술과 흑마법을 동시에…”
그가 감탄하며 양치기들의 시체를 이리저리 살펴보길 잠시.
그 꼴을 바라보던 여명은 팔짱을 끼고 발끝으로 바닥을 탁, 탁 두들겼다.
노골적인 신호. 궁정백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내 휙 던졌다.
“이런, 미안허이, 나이가 들면 깜빡 깜빡한다니까.”
여명이 주머니를 낚아채 입구를 벌려보니, 그 안에는 금화가 가득 들어있었다. 그것도 제국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진짜 제국 금화가.
“금화 서른 닢. 혹시 잔돈이 있다면 그냥 가지게. 나는 이 시체들로 충분하니.”
궁정백은 그렇게 말한 뒤 다시 양치기들의 시체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돌아간 걸 확인한 여명이 투명 망토 아래 숨어있는 네티에게 손짓을 보냈다.
그맇게 두 사람이 하수도 저편으로 떠나려는 그 순간.
“시체에 남은 칼 솜씨가 범상치 않군.”
궁정백의 목소리가 여명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여전히 시체를 뒤적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 도시에서 이 정도 칼잡이는 흔하지 않은데… 자네, 소문을 듣고 도시로 온 외부인인가?”
“….”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을 긍정으로 해석한 건지, 궁정백은 계속 지껄여댔다.
“뭐, 중요한 건 출신이 아니라, 실력이지. 자네… 용병일 한 번 해보지 않겠나?”
용병? 여명은 도시의 혼란을 막기 위해 힘을 빌려 달라던 동 궁정백의 부탁을 떠올리고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에도 혼란을 막기 위한 도움을 요청하는 걸까?
하지만 정작 동 궁정백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의 예상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어려운 일은 아닐세. 그냥… 엘프 한 명 죽여줬으면 하는데. 어떤가? 값은 톡톡히 쳐주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네티가 놀라는 걸 느낀 여명은 자연스레 그녀의 입을 막았다.
짧은 침묵.
궁정백이 고개를 돌리기 전에, 여명은 네티를 챙겨 하수도 저편으로 향했다.
다행히 궁정백은 여명을 붙잡지 않았다. 대신, 떠나가는 그의 등을 향해 아쉬운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동부에서 울리야노프라는 물약 상점을 하고 있다네.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찾아오게.”
***
“그 노인네랑 엘프, 동맹 아니었어요?”
하수도에서 빠져나온 네티의 첫마디는 그것이었다. 여명은 깔창에 묻은 오물들을 툭툭 털며 대답했다.
“…동맹끼리 뒤통수를 노리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특히 이런 도시에서는.”
“그거 참, 빨갱이 답네요.”
두 사람은 그런 대화를 나누며 여관으로 향했다.
하수도로 몰려간 사람이 워낙 많아서 그런 건지, 도시는 평소보다 훨씬 한산했다.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네티가 대뜸 물었다.
“…형부, 근데 언니는 뭐하고 혼자 오셨어요?”
여명은 가볍게 대답했다.
“세티는 피곤해 보여서 재우고 그냥 나 혼자 왔어. 널 찾는 건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까.”
“아… 하긴, 무아지경에 빠진 오빠를 경호한다고 요 일주일간 계속 쪽잠만 잤으니까요…”
언니 재우면서 아무 짓도 안 하셨나요?라는 질문이 목 끝까지 올라왔으나, 네티는 애써 질문을 삼켰다.
왠지 정말로 뭔가 했을 거 같은… 그런촉이 왔으니까.
‘…언니한테 물어봐야지.’
그 대신이라고 하기엔 뭐 하지만, 그녀는 지난 일주일간 언니가 진행한 계획에 대해 쭉 설명했다.
주정뱅이들에게 돈을 뿌려 소련의 비밀금고가 있다고 소문을 퍼트린 것부터, 어째서 자신이 하수도에 있었는지까지, 전부.
설명은 길었고, 여명이 중간중간 진행 상황을 물은 덕분에 더더욱 길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일주일간의 설명이 끝날 때쯤, 두 사람은 요새화된 여관에 도착했다.
여관의 창문과 옥상 초소에는 무장한 사람들이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는데, 모두 요제프의 부하들이었다.
네티는 투명 망토를 벗으며 물었다.
“형부, 이제 뭐부터 할까요? 언니가 준비는 끝났다고 했는데.”
여명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여관 입구에서 스팸을 퍼먹는 발라구를 잠시 바라본 뒤, 품에서 피눈물의 열쇠를 꺼내며 말했다.
“계획대로 판을 뒤엎어야지.”
***
드레이테리얼에는 생각보다 많은 마법사가 살고 있다.
물론, 제대로 된 마법사들은 아니었다.
다갈처럼 혈통이 천해 주류가 되지 못한 떨거지들.
인체실험이나 금지된 마법을 연구하려는 또라이들.
그리고 수배를 피해 이곳까지 흘러든 범죄자들까지.
하나같이 비정상적인 이 마법사들은 이미 도시의 한 축이나 다름없었다.
워낙 도시 곳곳에 숨어있는 탓에 궁정백들조차 그들을 찾아 추방하기보단 그냥 내버려 두는 판이었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아무튼.
지금 발라구의 안내를 따라 찾아가는 ‘벤두’ 또한 그런 마법사 중 하나였다.
그는 드레이테리얼 최고의 감식 마법사로 알려져 있었는데, 발라구가 도시를 탈출하던 시절부터 꾸준히 이름을 날리던 자였다.
당장 그가 운영하는 전당포의 크기부터가 그런 이름값을 증명했다.
백 명은 너끈히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콘크리트 창고.
[만물 전당포]라고 적힌 간판을 올려다보던 여명은, 발라구를 향해 물었다.“…감식 마법사가 운영하는 전당포라. 제대로 찾아왔네.”
“아마 이 도시에서 가장 잘나가는 전당포일 겁니다. 이곳을 운영하는 벤두의 실력은 궁정백들도 인정할 정도이니 말입니다.”
발라구는 그렇게 말하며 전당포의 문을 탕탕 두들겼다. 그러자 커다란 창고 문이 슬쩍 열리며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로 오셨소? 대출? 판매?”
“감식.”
“감식? 그건 값이 좀 나가는데… 돈은 가지고 왔소?”
남자의 질문에 대답한 건 여명이었다. 그는 금화가 가득 든 동전 주머니를 꺼내 흔들었다.
짤랑, 짤랑. 금화 소리가 난 직후,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들어오시오.”
남자를 따라 들어선 전당포의 내부는 생각보다 어수선했다. 장식장에는 온갖 물건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고, 바닥에도 칼이나 옷가지들이 굴러다녔다.
문을 연 남자는 물건들을 피해 성큼성큼 걸으며 말했다.
“벤두님께선 지금 지하에 계시오.”
발라구와 여명은 그를 따라 창고를 가로지르고 계단을 내려가, 작은 지하실로 들어갔다.
문 너머에는 살찐 대머리 노인네 하나가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몸에서 풍기는 마나를 보아하니 저자가 바로 벤두인 듯싶었다.
“벤두 님, 감식 의뢰를 하러 오신 손님분들입니다.”
처음 문을 열어줬던 남자는 짧게 두 사람을 소개했다. 대머리 노인은 여명과 발라구를 위아래로 훑으며 물었다.
“감식을 하러 왔다고? 오랜만에 손님이로군. 그래서, 두 분께선 뭘 감식하러 왔나?”
“비전 유물.”
“…뭐?”
영업용 미소를 짓던 대머리 노인의 얼굴은 여명의 대답을 듣자마자 딱딱하게 굳었다.
“이봐 젊은 친구. 하수도에서 뭔가를 주웠나 본데, 아쉽지만 꽝이야. 비전 유물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거든.”
비전 유물을 감식하기 위해 찾아온 손님이 처음이 아니었던 걸까? 벤두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여명은 그 말에 반박하는 대신, 품에서 피눈물의 열쇠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꽝이라니까. 괜히 감식 요금 쓰지 말고 그냥 나가…”
벤두의 말은 그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피눈물의 열쇠를 내려다보던 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다음 순간, 벤두는 여명의 손에서 열쇠를 낚아챘다.
“이 열쇠… 마나가 느껴지는군. 마도구인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외눈 안경을 꺼내 눈에 걸치더니, 곧바로 피눈물의 열쇠를 살피기 시작했다.
곧이어 짧은 침묵이 지하실을 채웠다.
갑작스러운 침묵에 여명을 안내한 남자가 슬쩍 눈치를 살필 때쯤, 벤두가 입을 열었다.
“이거… 진짜 비전 유물이잖아.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인데.”
“….”
“어디 보자… 재료는 흡혈귀의 뼈와 잿가루… 사람 피로 색을 냈고…대충 소련 시절에 만들어진 물건이 맞군. 이봐, 이거 어디서 구했어?”
여명은 즉시 대답했다.
“하수도.”
“오… 소문이 전부 거짓은 아니었다?”
그렇게 피눈물의 열쇠를 내려다보던 벤두는, 대뜸 여명을 향해 제안했다.
“이 비전 유물. 나한테 팔게. 비싸게 쳐주지.”
“생각 없다.”
“금화 천… 아니, 천오백 개.”
“다시 말하지만, 팔 생각 없어. 이미 사용했으니.”
“….”
이미 사용했다는 말에 벤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비전 유물을 다시 살피더니, 눈을 크게 떴다.
“재사용이 가능한 비전 유물…? 젠장, 금화 이천 개!”
“….”
“삼천 개! 천칠백 개는 이 자리에서 즉시 지불하고, 나머지는 전당포 물건을 처분한 뒤에 주지. 어때?”
여명은 대답 대신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백 마디 말보다 확실한 행동. 벤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욕심이 과했군. 사과하지.”
그는 잠시 열쇠와 여명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여명이 마나까지 뿜어내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감식비는 금화 다섯 개. 보증서는 추가로 열 개.”
가격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옆에서 듣던 발라구가 발끈했다.
“금화 열다섯 개? 시세보다 다섯 배나 더 받겠다고?”
“다른 물건도 아니고 비전 유물이야. 이 정도면 싸게 받는 거지.”
“그게 무슨 말도 안…”
발라구가 한소리 하려 했으나, 여명이 그를 제지하고 동전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냈다.
“금화 열다섯 개. 확인해 봐. 보증서는 얼마나 걸리지?”
“삼 분… 아니, 십 분이면 충분해. 잠깐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게.”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벤두는 부하를 불러 무언가를 명령했고, 여명은 피눈물의 열쇠를 챙겨 지하실을 나섰다.
그리고 10분이 조금 더 지난 뒤, 처음 문을 열었던 남자가 돌돌 말린 양피지 하나를 여명에게 건네주었다.
“안녕히 가시오.”
어딘가 비웃는 듯한 남자의 작별 인사를 끝으로, 여명과 발라구는 전당포를 나섰다.
길거리의 부랑자들이 전당포에서 나온 두 사람을 따라붙었으나, 두 사람 모두 신경 쓰지 않았다.
혹은 그런 척했거나.
잠시 후, 여명보다 조금 뒤에서 걷던 발라구가 말문을 열었다.
“…꼬리가 붙었습니다. 한두 놈이 아닙니다.”
긴장이 가득한 그와 달리, 여명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알아.”
그의 태도를 본 발라구는 초인인 여명이 그보다 훨씬 먼저 눈치챘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혹시, 이렇게 될 걸 예상하셨던 건 겁니까?”
“쓸만한 감식 마법사를 소개해달라고 했지. 양심적인 마법사를 찾아 달라곤 안 했으니까.”
발라구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건… 그렇지요.”
“혹시라도 자책은 하지 마. 처음부터 이러려고 안내를 부탁한 거니까.”
“….”
다음 순간, 여명은 허리에서 검을 뽑아 휘둘렀다. 그들을 노리고 날아온 화살 두 대가 동시에 잘려나갔다.
?!
발라구가 깜짝 놀라 입을 벌리자마자, 화살이 더 쏟아졌다.
이번에는 검으로 막아내기엔 너무나 많은 양이었고,여명은 즉시 발라구의 허리띠를 붙잡고 뒤쪽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타다다닥!
두 사람이 서 있던 자리로 수십 발의 화살이 꽂혔다. 여명과 함께 바닥에 착지한 발라구는 얼빠진 얼굴로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봤다.
문을 열어줬던 험악한 인상의 남자와 벤두, 그리고 정체불명의 깡패들까지.
골목 저편, 수십 명이석궁을 든 채로 이쪽을노려보고 있었다. 눈에 가득한 탐욕이 마치 마나처럼 이글거렸다.
저놈이다!
녀석들은 석궁을 조준한 채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몇몇은 양옆으로 갈라져 골목 사이로 사라졌는데, 아마 포위를 하려는 것 같았다.
여명은 잠시 그 꼬락서니를 바라보다가, 염동력 주문을 엮으며 발라구에게 물었다.
“발라구, 이런 소문 어때? 하수도에서 나온 비전 유물과… 그 비전 유물을 사용한 녀석에게 유명한 마법사 패거리가 쓸려나갔다는 소문.”
“….”
그런 노림수였다고? 발라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여명이 그럴만한 힘이 있다는 걸 깨닫고 한 번 더 웃었다.
“도시를 화끈하게 달굴만한 소문이군요. 목격자들도 많으니… 한동안 모두 그 소문 이야기만 할 겁니다.”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여명은 피식 웃으며 염동력 주문을 완성 시켰다.
그 직후, 깡패들이 석궁을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투두둑 소리와 함께 수십 발의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고…
그대로 염동력에 붙잡혔다.
“…마법사라고?”
녀석들의 선두에 서 있던 벤두가 중얼거렸다.
여명은 화살을 거꾸로 돌리고, 그들에게 화살을 돌려주는 것으로 화답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