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54)
을 위한 세계는 없다-154화(154/817)
〈 154화 〉 차가운 지옥으로 가는 길 (5)
* * *
***
“시발, 피해!”
석궁을 든 깡패가 등을 돌리며 소리쳤다. 마치, 그렇게 하면 날아오는 화살을 피할 수 있을 것처럼.
그러나 마법사인 벤두는 알고 있었다.
따로 보법을 배운 기사가 아닌 이상에야, 사람이 염동력으로 집어 던진 화살보다 빠를 수 없다는 걸.
“대, 대장? 잠까…!”
판단을 끝낸 벤두가 도망치던 부하를 붙잡아 방패로 삼고, 멍청한 부하들의 등으로 화살 비가 쏟아지는 건 거의 동시였다.
부하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기 무섭게, 벤두는 고기 방패를 집어 던지고 지팡이를 들어 주문을 엮었다.
감식으로 벌어먹고 있지만, 그 또한 드레이테리얼의 마법사. 전투라면 지겹도록 반복해왔다.
특히 마법사 대 마법사의 전투라면 질리도록…
그러나 다음 순간, 상대는 벤두의 예상과 다르게 움직였다.
염동력 마법을 유지하거나 다른 주문을 엮는 대신, 검을 뽑고 그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기사였어?”
아니, 당연히 기사겠지. 세상 어느 천지의 마법사가 저런 단련된 몸을 가지고 있겠는가?
‘…그럼 염동력 마법은 어떻게 쓴 거지?’
떠오르는 의문을 삼키며, 벤두는 준비하고 있던 주문을 완성 시켰다.
파지직 거리는 소음과 함께 그의 지팡이에서 벼락이 뿜어져 나왔다. 염동력 마법을 꿰뚫어버릴 생각으로 일으킨 벼락의 창이었다.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강렬한 창을 앞둔 상대의 대응은 간단했다.
그는 검을 든 손을 높이 치켜들었고, 창과 충돌하는 순간…
그대로 검을 내려쳤다.
마나로 이루어진 빛이 터져 나오며 주변 사람들의 눈을 가렸으나, 거리에 있는 모두가 볼 수 있었다.
그의 검에서 일렁거리는 푸른 검기를.
벤두는 기겁하며 다음 마법을 준비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상대의 검이 지팡이를 쥔 손을 잘라버리는 게 조금 더 빨랐다.
날아가는 팔목을 보고 비명을 지를 법도 하건만, 벤두는 노련한 마법사였다.
그는 다음 마법을 준비하거나, 등을 돌려 도망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그 대신, 즉시 무릎을 꿇었다.
“하, 항복! 살려주십시오!”
혹시 상대가 가짜 항복으로 의심할지도 몰랐기에, 그는 양팔을 어깨 위로 올리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의 목을 베려던 상대마저 당황 시킬 정도로 신속한 항복.
“….”
여명은 할 말을 잃고 벤두를 내려다봤다.
‘…미친 새끼 아니야 이거.’
비전 유물을 노리고 대낮에 습격을 가하고, 부하를 방패로 삼던 녀석이 불리해지자마자 항복하다니.
여명이 눈살을 찌푸리고 벤두의 목을 치려고 하자, 녀석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내,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 살려만 다오, 살려주면 원하는 건 뭐든지 내놓겠다. 금화건, 전당포에 있는 물건이건 간에 뭐든지!”
“….”
“아, 그래 맞아. 비전 유물을 지키려면 돈과 권력이 필요할 거다! 내가 남 궁정백님께 다리를 놔주마! 그분 휘하로 들어가면… 켁!”
벤두의 말은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여명이 염동력을 일으켜 그의 목을 그대로 꺾어버렸으니까.
녀석의 몸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졌고, 지켜보던 구경꾼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거리에서 살인이 벌어져서? 아니, 벤두의 입에서 나온 ‘비전 유물’이란 단어 때문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여명의 행동은 비전 유물에 대해 떠드는 벤두의 입을 막으려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마법과 검기를 동시에 쓰는 외부인과 비전 유물. 그리고 벤두의 죽음까지.
쓸만한 정보를 주워들은 구경꾼들은 슬금슬금 거리 저편으로 사라졌다.
화살 비에서 살아남은 벤두의 부하들 또한 마찬가지로 도망치기 시작했는데, 전당포 내부를 안내했던 험상궂은 남자 또한 그 사이에 있었다.
여명은 녀석을 붙잡지 않았다.
그가 하수도에서 비전 유물을 주웠다는 정보를 퍼트릴 녀석이 하나쯤은 있어야 했으니까.
잠시 후, 뒤에서 지켜보던 발라구가 다가와 물었다.
“혹시라도 소문이 이상하게 퍼지면 어쩌시려구요.”
일리 있는 질문이었지만, 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법이니까.”
***
“확증편향이란 말, 알아?”
남 궁정백의 집무실. 예카테리나는 체스 말을 움직이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앞에는 거대한 바둑판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정상적인 바둑과 달리, 그 위에는 바둑알만 있지 않았다.
장기 말과 체스 말, 그리고 정교하게 깎아 만든 미니어처 모형들까지.
눈치가 좋은 자라면 그것이 드레이테리얼의 세력구도를 축소해놓은 모양이라는 걸 눈치챌 수 있으리라.
말 하나하나가 도시의 세 궁정백들과 그의 수족들을 상징했다.
쥐 수인 군단, 한국에서 온 양치기, 그리고 천하고 멍청한 시민들까지.
예카테리나는 본인을 상징하는 검은 퀸을 움직이며 말했다.
“인간은 반대되는 증거가 아무리 많아도, 믿고 싶은 증거만 믿는다는 소리야. 특히, 욕심에 눈이 먼 상태라면 더더욱.”
탁.
예카테리나가 퀸을 바둑판 한가운데에 올려놓고 나서야, 창밖을 바라보던 남 궁정백이 고개를 돌렸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소문을 막는 데 힘을 낭비하지 말라는 거야. 어차피 못 막을 테니까.”
남 궁정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수도 어딘가에 소련의 비밀금고가 있다… 그 허무맹랑한 소문에 속은 천것들이 하수도로 내려가는 걸 그냥 손 놓고 구경만 하라?”
“그 천것들은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니까? 하수도에서 소련의 비전 유물이 나온 건 사실이잖아?”
예카테리나는 바둑알을 움직이며 이죽거렸다. 그러자 남 궁정백이 버럭 소리 질렀다.
“그게 어떻게 사실이란 말이냐! 소련이 남겨놓은 건 무기고다! 기관총이나 로켓도 아니고, 비전 유물? 개소리도 그런 개소리가 없…”
“여태껏 내가 한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어? 진실은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은 시민들이 믿고 싶은 게 곧 사실이야.”
“그러면 어쩌란 말이냐!”
쾅! 참다못한 남 궁정백이 책상을 내려쳤다. 바둑판이 흔들리며 말들이 우르르 쓰러졌다.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두자는 거냐? 만에 하나 하수도로 내려간 천것들이 우리보다 먼저 ‘발사 코드’를 찾으면 어쩌려고? 여태껏 준비한 모든 계획이 무용지물이 된단 말이다! ”
“…걱정도 팔자야. 발사 코드가 뭔지 아는 놈도 없을 텐데.”
“지금 그걸 핑계라고…! 지금처럼 하수도 가득 쥐 새끼들과 천것들이 있는 이상, 언젠가 밝혀질 거다!”
“….”
“소문이 퍼졌으니, 하수도로 내려가는 천것들이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진 않겠지! 이대로라면 폐하의 축일 날까지 발사 코드를 찾는 건 불가…!”
“거기까지.”
예카테리나가 한마디 하자, 집무실 내부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남 궁정백이 깜짝 놀라 입을 다물고, 방안 가득 침묵이 기어 다녔다.
그렇게 차가운 침묵이 이어지길 잠시.
예카테리나는 쓰러진 검은 퀸을 세우며 말했다.
“그래, 계획이 꼬였다는 건 인정해. 근데, 그러면 계획을 바꾸면 그만이잖아. 대체 뭐가 문제야?”
“…다른 계획?”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도 소문에 한 손 거들자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예카테리나는 품에서 작은 반지를 꺼냈다.
장식하나 없는, 밋밋한 철 반지.
그러나 그 물건의 가치를 알아본 남 궁정백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전대 마탑주가 남긴 비전 유물…?”
“이 반지를 미끼로 시민들을 선동해.”
“….”
“비밀금고를 찾는 자에게 이걸 주겠다고… 궁정백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거지. 불에 기름을 뿌리는 거야.”
예카테리나는 악마처럼 속삭였다.
만약 그녀의 말을 따를 경우,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철도가 끊어지며 생긴 실업자들과 부랑자, 그리고 온갖 떨거지들이 일확천금의 꿈을 꾸며 하수도로 내려가리라.
그리고 하수도에서 서로 죽고 죽이며 시체로 산을 쌓겠지.
그리고 그 후에는…
“전부 좀비로 되살리는 거지.”
천것들을 쓸모 있게 써먹자는 제안. 궁정백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하며 되물었다.
“계획은 훌륭하지만… 그게 정말 가능하겠나?”
예카테리나는 대답 대신 바둑판 아래 굴러다니던 검은색 킹을 집어 들었다.
잠시 킹을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탁 검은 킹을 바둑판 정 가운데에 세우며 말했다.
“당연히 가능하지. 이쪽에는… 용이 있잖아?”
용. 그 단어를 들은 궁정백은 검은 킹을 보며 침을 삼켰다.
예카테리나 또한 검은 킹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두 사람 모두 바둑판으로 굴러오는 흰색 퀸을 보지 못했다.
***
여명이 비전 유물에 대한 소문을 퍼트린 뒤.
도시의 분위기는 활화산처럼 들끓고 있었다.
힘 좀 쓴다는 녀석들이 전부 하수도로 내려갔는데, 비밀금고는커녕 꼬리조차 찾지 못했으니까.
물론, 개중에는 금화를 찾은 놈도 있었지만, 아주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찾는데 못 찾을 수가 있나? 이거 가짜 소문 아냐?
허탕을 치고 이성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런 목소리는 금세 사라졌다.
저번에 하수도에서 비전 유물 나온 거 못 봤어? 분명히 있다니까!
정말 가짜라면 남 궁정백이 보물을 걸진 않았겠지.
비밀금고도 찾고, 전대 마탑주의 반지도 먹고.
그 와중에 남 궁정백이 보물까지 걸어가며 금고를 찾으라고 발표하자, 비밀금고를 향한 시민들의 믿음과 욕심은 거의 신앙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민중 신앙은 언제나 권력에 대한 도전을 불러오는 법.
동남북 하수도를 다 뒤졌는데도 없다는 건 역시… 서부인가?
서 궁정백이 금고를 혼자서 다 처먹으려고 한다더라!
궁정백은 서부 하수도 봉쇄를 풀어라! 도시는 시민의 것이고, 궁정백은 관리인에 불과하다! 하수도에 자유를!
시민들의 시선은 봉쇄된 서부 하수도로 향했다.
물론, 직접 서 궁정백을 규탄하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마법사단을 가진 권력자에게 덤빌 정도로 간 큰 녀석은 진즉에 죽어 묘지에 묻혔으니까.
그 대신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시민들은 드레이테리얼 다운 방식으로 서 궁정백을 엿먹였다.
그러니까… 자물쇠를 풀고, 경비병을 속이고,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단 소리였다.
한 손으로 열손은 못 막는다고, 시민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이자 서부 하수도의 봉쇄는 금세 뚫리고 말았다.
서 궁정백이 노발대발하며 하수도를 돌아다니는 자들을 즉결처형하겠다고 발표했으나, 청개구리 같은 시민들은 더욱더 은밀하게 하수도로 숨어드는 것으로 화답했다.
경비대 중 일부는 돈을 받고 길을 열어주기도 했는데, 참으로 드레이테리얼다운 풍경이라 할 수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혼란스러운 나날이 계속되고, 서부 하수도의 봉쇄가 느슨해진 현재.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여명은 서 궁정백의 빌딩에 숨어있는 ‘양치기’들을 끌어내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지도를 사들여 궁정백의 빌딩 주변 지리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전투의 기본은 지형지물이라는 세티의 지론 때문이었는데, 여명은 그녀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아니, 그는 아예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마법사들의 순찰 경로를 알아내고, 주변을 지키는 경비대까지 매수해버린 것이다.
흠잡을 곳 없는, 완벽한 준비.
그에 비해 장비는 준비할 게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검과 총기를 비롯한 무기들과 그보다 적은 소모품이 전부였으니까.
그나마 오래 걸린 준비물을 꼽자면, 정체를 감춰줄 가면 정도일까?
“가면에 무기까지… 우리 암살하러 가요?”
준비를 끝낸 네티의 감상이었다. 여명은 부정하지 않았다.
“최우선 목표는 양치기들과 서 궁정백의 목적을 알아내는 거지만… 죽일 수 있다면 죽여야지.”
“….”
네티는 ‘형부는 왜 그렇게 양치기를 증오하시나요?’ 라고 묻지 않았다.
한국 정부가 뿌린 증오의 씨앗이 어디 한두 개던가?
그녀는 여명이 함께 한국 정부와 맞서 싸워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물론, 언니는 조금 더 나아간 듯했지만.
“그냥 대전차 무기 열 발 정도 쏘면 하수도에 깔려서 다 죽지 않을까?”
“….”
“그러고 보니 좀 아쉽네. 요제프가 제대로 된 폭탄을 챙겨 왔으면 아예 빌딩째로 날려버리는 건데.”
절대 농담일 수 없는 말.
언니의 의외의 일면을 발견한 네티가 헛웃음을 삼키고, 세티가 ‘요술봉’이라고 적힌 무기 상자를 통째로 챙긴 직후.
여명 일행은 양치기들을 습격할 준비를 끝마쳤다.
황제 축일까지, 열흘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