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55)
을 위한 세계는 없다-155화(155/817)
〈 155화 〉 차가운 지옥으로 가는 길 (6)
* * *
***
이른 저녁.
준비를 끝낸 일행은 간단히 식사를 챙겨 먹은 뒤, 곧장 도시의 서부 지역으로 출발했다.
여명 일행은 하수도로 은밀하게 접근하는 대신, 당당하게 마차에 몸을 실었다.
하수도에 워낙 많은 인원이 몰리다 보니, 역설적으로 대로변에 보는 눈이 더 적은 덕분이었다.
그렇게 이동하기를 잠시. 마차 창밖으로 노을을 뒤집어 쓴 빌딩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완성된 빌딩이자, 서 궁정백의 궁정인 판토리아노 빌딩.
잠시 그걸 바라보던 여명이 입을 열었다.
“…네티, 너는 굳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후방에 있어도 돼.”
걱정과 배려심이 담긴 말. 똑같이 창밖을 보고 있던 네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형부? 이런 전투에서는 제가 언니보다 더 쓸만할걸요?”
맹랑한 대답이었다. 세티가 그녀의 옆구리를 푹 찔렀으나, 네티는 신경쓰지 않고 가방을 열어 소총 두 개를 하늘에 ‘띄웠다.’
“저는 염동력과 역장 주문 전문이라, 전투밖에 못 하는 언니보다 훨씬 쓸만해요. 비각술처럼 고속 이동이 가능한 무술도 익히고 있어서 전투 중에 뒤처질 염려도 없구요. 아시죠?”
여명은 북부 역에서 빠르게 뒤따라오던 네티의 발놀림을 기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전투력이야 뭐, 염동력으로 총을 띄워서 발사하면 차고 넘치구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네티는 추가로 소총 두 정을 염동력으로 띄웠다.
네 개의 소총이 마차에서 둥둥 떠 있는 모습은 꽤 볼만했는데, 정작 그녀 옆에 앉아있던 세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실전 경험도 없고, 주문 정밀 조작 못 하는 건 왜 말 안 하니?”
“아니, 그거야…”
“네티, 우리 지금 장난하러 가는 거 아니야. 잘못하면 다칠 수도 있고, 심하면 죽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여명 말대로 후방에서 지원만 해. 알겠지?”
“….”
네티는 반박하지 않았다. 언니의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그녀가 뭐라고 반박하건 억지에 불과하니까.
그렇게 입을 다문 네티가 조용히 소총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와중에, 창문 바깥에서 번쩍 빛이 터졌다.
마차 안에 있던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으나, 빛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여명이 느낄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빛이 있던 자리에 남아있는… 뒤틀린 마나뿐.
“…양치기들의 마법인가.”
여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대놓고 마법을 쓰다니? 그것도 마나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대 마법을?
생각해볼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두 가지였다.
숨기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다급하게 마법을 썼거나…
‘이제 들켜도 상관없거나.’
고민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모두 내려, 여기서부터 하수도로 간다.”
여명은 그렇게 말한 뒤 마차의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네?”
네티가 어벙하게 대답하는 사이, 세티도 무기가 든 나무 상자를 챙겨 여명의 뒤를 따랐다.
혼자 남은 네티는 부랴부랴 마차에서 내린 뒤, 두 사람이 들어간 하수도 구멍으로 내려갔다.
물론, 마차 운전사에게 금화를 던져주는 것도 잊지 않았고.
찰박
네티가 하수도 물 위로 떨어지는 걸 확인한 여명은 즉시 하수도 내부에 마나를 퍼트렸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매수한 경비대가 있어야 했지만, 그의 감각은 경비대 대신 다른 걸 찾아냈다.
양치기 특유의 역겨운 기척.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수십 마리의 좀비를 끌고 다니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예 숨길 생각도 안 한다 이거지.
“…어떻게 할래? 양치기들부터 정리할까. 아니면 빠르게 빌딩부터 확인할까.”
마찬가지로 양치기의 기척을 느낀 세티가 그렇게 질문하자, 여명은 ‘요술봉’이라 적힌 나무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흔히 ‘알라의 요술봉’이라 불리는 대전차 로켓과 탄두가 빼곡하게 들어있었는데, 여명은 그중 하나를 등에 메며 대답했다.
“둘 다 하자. 보이는 족족 다 죽이면서, 최대한 빨리 빌딩으로 가는 거야.”
네티는 와 정말 미친 계획 같아요 라고 말하려 했으나, 그녀의 언니가 따라서 로켓을 드는 꼴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
콰아앙!!
밀폐된 하수도 가득 폭발음이 울렸다. 곧이어 불길이 공간을 집어삼키고, 충격파를 토해냈다.
그 아래 남은 건 넝마가 된 돼지머리와 좀비들뿐.
참혹한 광경이었으나, 그 광경을 만들어낸 소녀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시체를 짓밟으며 하수도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또 다른 양치기들의 기척이 느껴질 때쯤.
“네티, 재장전.”
세티는 빈 로켓 발사관을 동생에게 던졌다.
네티는 염동력으로 발사관을 받아든 뒤, 마찬가지로 염동력으로 띄워놓은 로켓 탄두를 장전해 다시 언니에게 내밀었다.
벌써 열 번 가까이 반복한 덕분일까, 그녀의 재장전은 채 30초가 걸리지 않았다.
물론, 언니의 발사 속도는 그보다 더 빨랐지만.
“침입자?! 어서 경보를…!”
하수도 갈림길에서 대기하고 있던 돼지머리가 일행을 발견하고 소리쳤으나, 로켓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묵직한 발사음과 후폭풍이 하수도를 채우고, 발사된 로켓이 어둠 속에서 번쩍였다.
다음 순간.
콰아앙!!
돼지머리들은 폭발에 삼켜져 그대로 피와 그을음이 되었다.
폭발 범위에서 벗어난 덕분에 살아(?)남은 좀비들이 몇몇 있었지만, 녀석들이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여명의 검이 길게 궤적을 그렸다.
머리가 떨어지는 좀비들을 뒤로 한 채, 일행은 계속 달렸다.
침투라기엔 너무 무식하고, 전투라기엔 너무 일방적인 싸움의 연속.
“앞으로 얼마나 남았어요?”
염동력으로 로켓 탄두를 주렁주렁 매단 네티가 물었다.
세 사람 모두 비각술을 펼치고 있었기에, 일행이 하수도를 주파하는 속도는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이만하면 충분히 서 궁정백의 빌딩까지 도착한 거 같아서 물어본 건데…
정작 그 질문의 대답은 다른 사람에게서 나왔다.
“궁정백의 빌딩? 이미 도착했지.”
하수도의 어둠 너머, 시커먼 두건을 쓴 누군가의 목소리.
일행은 거의 동시에 걸음을 멈추고 상대를 확인했다.
어둠 너머로 보이는 목소리의 주인은 양치기가 아니었다. 그 어떤 양치기도 저렇게 왜소한 몸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세티가 로켓을 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상대가 두건을 확 젖히며 얼굴을 드러냈다.
“너희는 누가 보낸 놈들이냐? 동쪽? 남쪽?”
좀비처럼 빼빼 마른 얼굴 위, 붉게 충혈된 눈동자를 반짝이는 녀석은 만주에서 봤던 오염된 인간과 닮아 있었다.
뇌를 차지하고 있는 뒤틀린 마나가 그 증거였다.
만주에서 봤던 녀석들과 달리 정상적으로 말을 하는 걸 보면 계량형인 듯싶은데…
양치기 다음에는 오염된 인간이라. 여명은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은밀히 마나를 끌어 올렸다.
그러건 말건, 녀석은 일행을 비웃었다.
“누구의 명령을 듣고 왔건, 이미 늦었다. 서 궁정백께서는 이미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여셨으니, 이 아래 잠든 것은 모두 우리의 것이다.”
마치 시를 읊는 것처럼 부드러운 어투. 네티는 잔뜩 긴장을 끌어 올리고 조심스레 로켓을 장전했다.
보통 저런 놈들은 함정을 준비해놨거나, 대단한 실력자인 경우가…
하지만 그녀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상대의 모가지가 한 바퀴 돌아갔다.
콰직.
180도로 돌아간 목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울렸다. 곧이어, 녀석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미친.”
지금 염동력을 암살용으로 쓴 거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대마법사를 자처하던 농장 주인조차 저런 일은 할 수 없을 텐데. 애초에 그런 주문도 아니고.
네티는 놀란 눈으로 여명을 보며 바라봤다.
비정상적인 일을 벌였음에도, 그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성취감도 찾을 수 없었다.
담담하게 하수도 너머를 바라보는 게, 정말로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형부는 대체 정체가 뭐지…?’
그녀의 의문이 깊어지려는 사이, 여명이 검을 늘어트리며 말했다.
“네티, 무기 들어.”
“네?”
“정신 똑바로 차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니까.”
그 말의 신호라도 되는 듯, 하수도 저편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나, 둘, 다섯, 열, 스물, 마흔…
순식간에 하수도를 차지한 녀석들의 눈은 모두 광인의 그것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
깊고 깊은 지하로 통하는 거대한 콘크리트 계단.
오랜 시간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았던 이곳에, 두 개의 발소리가 울렸다.
또각, 또각. 규칙적인 발소리가 이어지길 잠시.
조 판토리아노 서 궁정백이 입을 열었다.
“이만한 공간이… 도시 아래 있었을 줄이야.”
그는 걸음을 멈추고,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 아래를 내려다봤다.
저 아래 대체 무엇이 숨겨져 있길래, 이렇게나 두꺼운 콘크리트 벙커를 세운 것일까?
“…이곳이 정말 무기고가 맞는가?”
서 궁정백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그러자 그와 함께 계단을 내려가고 있던 자가 걸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예, 무기고가 맞습니다.”
“대체 무슨 무기가 있기에, 이런 곳을 지었단 말인가? 흡사, 마왕이라도 봉인된 곳 같지 않나.”
그의 질문이 우스웠던 걸까, 상대는 피식 웃었다.
“마왕이요? 이 아래에 있는 물건은 마왕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비교할 수 없다고?”
“마왕은 세계수에 흠집도 내지 못했잖습니까?”
많은 뜻이 담긴 말이었기에, 궁정백은 곧바로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평생 쌓아 올린 교양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말속에 숨어있는 진의를 찾아냈다.
세계수를 파괴한 지구의 무기는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
궁정백은 꿀꺽 침을 삼키고, 자신의 안내원을 바라보았다.
혐오스러울 정도로 정교한 말머리를 머리에 쓴 지구인.
어째서인지, 조금 전까지 믿음직스러워 보이던 그의 얼굴이 흉측하게 느껴졌다.
잠시 계단 사이로 침묵이 감돌고, 궁정백의 눈에 두려움이 깃들 쯤.
말머리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우리나라가 이것을 찾을 수 있었던 건, 모두 궁정백님의 공입니다.”
“그, 그렇지. 내 공이 가장 크지…”
“각하께서 반드시 크게 보상하실 겁니다.”
“….”
그래, 보상. 이 썩어빠진 세상을 벗어나, 선진화된 지구의 귀족이 될 기회.
욕망은 그 무엇보다도 강한 마약이었다.
궁정백은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두려움과 의심을 지우고,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움직이려는 그 순간.
천장에서 묵직한 충격음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쿵!
쿵!
쿵!
그 소리를 따라, 천장에서 콘크리트 가루가 떨어졌다. 뭐지?
“적습…? 이봐,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어떻게 벌써 적이 여기까지 올 수 있지?”
“….”
말머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녀석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천장을 보다가, 진동이 사그라들 때쯤 말문을 열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별일 아닐 겁니다.”
“별일 아니라고? 방금 그 소리를 듣고도 그 말이 나오나?”
“서부 하수도 전체에 병력을 풀어놨고, 빌딩 주변에는 경계 마법이 가득합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이곳의 봉인을 풀 때 그렇게나 큰 마법을 쓰지 않았나. 혹시 그 마법을 보고 온 거라면…”
“그런 간 큰놈이 있다면, 죽이면 그만입니다.”
서 궁정백은 못 미더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그동안 보여준 한국의 실력은 부정할 수 없는 진짜였으니까.
‘그래, 정말로 별일 아니겠…’
서 궁정백이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려는 바로 그때.
콰아앙!!!
콘크리트 천장이 갈라지며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곧이어 흩날리는 파편과 먼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침입자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