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57)
을 위한 세계는 없다-157화(157/817)
〈 157화 〉 19530305 (2)
* * *
***
“더럽게 깊네.”
“무기고가 아니라 핵 방공호 아니에요? 이렇게 깊은 건 좀 이상한데.”
“어둡기는 또 더럽게 어둡고, 아니, 계단이면 비상 신호등이라도 있어야지. 뭐 아무것도 없어?”
“어… 저기요? 지금 저만 이상한 거 아니죠?”
“우리 지금 20층 넘게 내려온 거 같은데…”
“…저기요?”
“언니?”
“형부?”
네티가 계단을 내려가던 발을 우뚝 멈춘 그 순간.
그녀의 앞 방향에서 빛이 피어났다.
찬란한 황금빛이 작은 마법진을 그리고, 그들이 서 있는 계단을 환하게 밝혔다.
익숙한 빛이었다. 형부가 머릿속 금제를 풀어주던 날 보여줬던 바로 그 빛이었으니까.
빛의 근원은 조금 전 형부가 보여줬던 네모반듯한 황금색 마도구였는데, 형부는 마도구를 이리저리 돌리며 계단 곳곳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형부? 이게 대체 무슨 일에요?”
“함정에 걸렸어. 무슨 함정인지 알아내고 있으니까, 잠깐만 기다릴래?”
함정에 걸렸다고? 네티가 언니를 힐끔 확인했지만, 세티는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뭔가를 감지하려는 것처럼.
그렇게 정적이 이어지길 잠시.
세티가 뭔가를 찾은 듯 눈을 떴다. 그리고 여명과 눈빛으로 뭔가를 주고받더니…
그대로 계단 아래로 뛰어내렸다.
네티는 놀라 들고 있던 무기 가방을 떨어트릴 뻔했다. 하지만 형부의 반응이 너무 담담한 탓에 그녀도 덩달아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세티는 정말로 아무 문제 없이 돌아왔다. 계단 위쪽에서 추락하긴했지만.
우웅
여명은 기다렸다는 듯 염동력을 펼쳐 그녀를 받아냈다.
“어때?”
“예상대로야. 제자리를 빙빙 돌고 있어.”
“…양치기들이 한 짓일까?”
“그건 아닌 거 같아. 뒤틀린 마나도 없고… 아마 무기고 보안인 거 같은데.”
네티는 둘의 대화를 쫓아가지 못해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대화가 끝나자마자, 두 사람이 동시에 그녀를 바라보는 게 아닌가?
“…왜요?”
“마법사로서 조언할 거 없어?”
형부도 마법사 아닌가? 네티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착실히 대답했다.
“한곳을 맴돌게 하는 마법진이라면… 옛 공산권 국가에서 쓰던 마법진 같아. 정확히 같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탈출법은?”
“마법진만 치우면 돼. 보통은 C4로 마법진이 있을 만한 곳을 다 터트려버리는데…”
이런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라면 마법진을 찾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그렇다고 그냥 다 터트려버리자니, 지금 가지고 있는 로켓 탄두를 전부 사용해도 불가능할 게 분명한 상황.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형부라면 알아서 탈출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확신대로, 여명은 마나를 끌어모았다.
마법진의 마나를 역추적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마법을 파훼하기 위한 다른 마법을 떠올리는 중?
네티는 형부가 어떤 방식으로 이 함정을 벗어날지 기대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여명이 보여준 답은 그녀의 기대를 한참이나 뛰어넘었다.
“시간 낭비는 여기까지.”
그 말을 끝으로 여명은 검을 뽑더니, 그대로 새하얀 검기를 뿜어냈다. 황금 옥새의 빛을 밀어낼 정도로 강렬한 빛.
네티는 처음 보는 혜성의 빛.
여명은 혜성검을 계단 아래로 휘둘렀다. 그러자 계단 전체를 감싸고 있던 마법진의 마나가 움직여 반항했다.
허나 혜성의 빛은 마법진의 마나는 물론이고, 계단 콘크리트마저 무참하게 갈라버리며 계단 아래로 날아갔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네티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함정 마법진의 마나가 통째로 찢겨 나갔다는 걸.
“….”
그녀가 새삼 정말 괴물 같은 사람이구나 같은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여명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걸로 아래에 있는 녀석들도 눈치챘을 거야. 이제 뛰자.”
“…네?”
그는 대답 대신 계단 난간 너머로 훌쩍, 뛰어내렸다.
아니, 높이가 얼마나 되는 줄 알고?
네티가 황망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언니가 갑작스레 그녀의 허리를 꽉 붙잡았다.
“염동력으로 무기 꽉 잡고 있어.”
“뭐? 언니 잠…!”
그녀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세티는 아래로 뛰어내렸다.
***
요새화된 여관의 옥상 초소.
발라구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도시를 보며 침을 삼켰다.
누가 봐도 불이 난 모습이었으나, 불을 끌 소방관은 보이지 않았다.
소방관들마저 대박을 노리고 하수도로 내려가서? 아니, 아니었다.
그의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저 연기는 단순히 땔감을 태우는 연기가 아니라고.
죽음과 전쟁의 연기.
연기 사이로 들려오는 고함과 비명이, 벽이 무너지고 살이 찢어지는 소리가 그 증거였다.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으나, 끔찍한 연기는 점점 더 범위를 넓히고 있었다. 이 여관까지 밀려드는 것도 시간문제…
“이봐, 거세 오크.”
고개를 돌려보니 요제프와 떡대들이 무기 상자를 들고 초소로 올라오고 있었다.
상자 안에는 기관총과 탄약이 가득 들어있었는데, 떡대는 발라구를 밀어내고 초소 진지에 기관총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총 쏠 줄 아나?”
발라구는 고개를 저었다. 요제프는 하 웃으며 그에게 권총 하나를 내밀었다.
“그럼 지금부터 배우면 되겠군.”
“….”
“여기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아래로 내려가지. 힘쓸 일이 많아.”
요제프는 발라구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준 뒤, 따라오라는 듯 손짓하며 초소 아래로 내려갔다.
그를 따라 여관으로 내려오자, 떡대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흡사 전쟁이라도 준비하는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발라구가 창문에 설치되는 기관총을 보며 묻자, 요제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야 나도 모르지.”
“…모르신다구요?”
모르는데 이런 준비를 한다고? 발라구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요제프는 입에 담배를 물고, 성냥을 꺼내며 답했다.
“하지만 이 도시가 좆됐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지. 그렇지 않나?”
“….”
때마침, 도시 저편에서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제프는 담배를 빨며 웃었다.
“난 안전한 공간과 무기를 가지고 있고, 좆된 도시에서 무기와 요새만큼 중요한 건 없지. 아마 눈치가 있는 새끼들이라면 전부 이곳을 강탈하기 위해 몰려들 거다.”
발라구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냥 도망치셔도 되잖습니까?”
“…흐음?”
“돈은 이미 다 받으셨고, 천여… 아니, 고객들은 이 자리에 없잖습니까.”
노골적인 질문이었다. 요제프는 웃으며 담배를 빨아들였다.
곧이어, 그는 발라구의 면전에 후욱 연기를 내뱉었다.
“이봐 오크, 그렇게 떠보지 말고, 툭 까놓고 말하자고. 어디까지 알고 지껄이는 거냐?”
노골적인 대답. 발라구는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당신이 동 궁정백의 의뢰를 받고 이 도시에 왔다는 것까지는 알아냈습니다.”
“오. 그냥 단순한 안내원은 아니었나보군?”
“….”
“뭐, 괜한 걱정이라는 것만은 알아둬라. 난 지금 고객을 배신할 생각 없으니까. 이유가 뭔지 알아?”
“…모르겠군요.”
요제프는 즉시 대답하지 않고, 1층 입구가 보이는 창가에 기댔다.
비명이 이어지는 도시의 연기 위로, 담배 연기가 더해질 쯤.
밀수꾼이 말했다.
“밀수꾼이라는 건 원래, 가장 쎈 놈한테 붙는 법이거든.”
***
황금 옥새의 빛이 어둠을 가르고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빛 사이로 보이는 건 오직 콘크리트 계단뿐.
그러나 여명의 민감한 감각은 희미한 목소리와 옅은 피 냄새, 그리고 뒤틀린 마나를 감지해냈다.
너무나 익숙한, 양치기들의 기척.
예상대로, 계단의 밑바닥에는 수십 명의 양치기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여명은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사아아
그의 손과 검을 따라 마나가 점멸하며 허공이 갈라지고,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저, 저건?
습격이다!
보호막! 보호막을 펼쳐라!
뒤늦게 양치기들이 여명을 발견했지만,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혜성검. 첫인사고 나발이고 전부 쓸어버릴 의도로 쏘아낸 검기는 여명보다 한발 앞서 바닥을 강타했다.
콰아앙!!
콘크리트 바닥이 터지며 먼지가 터져 나왔다. 여명은 그대로 염동력을 펼쳐 추락 속도를 늦췄다.
높이가 높이인지라, 여명이 착지하자 쿵 소리가 바닥을 울렸다.
우왕좌왕하지 마!
부상자는 내버려 두고 응사해!
저 빛을 향해 쏴! 쏘라고!
갑작스러운 충격에도 양치기들의 대응은 빨랐다.
살아남은 돼지머리들은 총을 빼 들고 즉시 황금 옥새의 빛을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채 몇 발을 사격하기도 전에, 녀석들의 머리 위로 대전차 로켓이 떨어져 내렸다.
폭발, 더 많은 폭발.
계단 바닥은 순식간에 불길에 쓸려나갔다. 어찌나 로켓이 잘 먹혔는지, 로켓을 일제 발사한 네티가 기겁할 정도였다.
“혀, 형부도 휩쓸린 거 아니야?”
“여명은 괜찮아.”
세티는 그렇게 말하며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계단 벽면을 찼다.
급격한 이동을 느낀 네티가 우웩 헛구역질을 했지만, 세티는 몇 차례 더 벽을 차서 추락 속도를 줄였다.
탁
그렇게 두 사람이 바닥에 착지했을 때, 가장 먼저 그녀들을 맞이한 건 검을 든 여명과 쓸려나간 양치기들의 시체였다.
돼지머리는 수십 마리가 넘었고, 소머리도 족히 열 마리는 죽은 듯했다.
하지만 세티는 웃을 수 없었다.
바닥의 저편, 다섯 쌍의 붉은 눈동자가 멀쩡히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으므로.
“설마, 이런 곳에서 기습당할 줄이야.”
양치기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린 순간.
여명은 황금 옥새에 마나를 더 불어 넣어 주변을 밝혔다. 금빛 마나가 거대한 철문을 비추자, 그 앞에 서 있는 다섯 명의 양치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네 명의 말머리와 하나의 닭머리.
그들의 진짜 실력을 아는 두 자매는 긴장하며 마나를 끌어 올렸다.
세티는 망치를 꺼냈고, 네티는 가방을 열어 소총 세 개와 하나 남은 대전차 로켓을 동시에 허공에 띄웠다.
그리고 이미 백 마리에 가까운 양치기를 살해한 복수자는 미소지으며 검을 늘어트렸다.
“너희는 누구냐.”
여명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말해줄 거 같으면 변장을 하고 오지도 않았겠지.
닭머리도 그 사실을 짐작한 건지, 질문을 바꿨다.
“서 궁정백은 어떻게 했지.”
그 질문과 동시에, 말머리들이 주문을 엮기 시작했다. 여명 또한 보이지 않게 염동력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목을 꺾었다.”
“주제에 어울리지 않는 걸 탐하던 인간답게, 하찮게 죽었군. 무기고의 비밀번호는 들었나?”
“아니.”
“그래? 일이 귀찮게 됐군. 다시 올라가서 뇌를 뒤져야 한다니.”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말머리 중 하나가 입에서 붉은 광선을 쏘아내는 것과 동시에, 네티가 띄운 소총이 불을 뿜었으니까.
총성과 마법의 굉음.
귀를 찢을 것 같은 두 소리를 신호로, 여명과 닭머리는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여명은 그대로 가속도를 더해 검을 내려찍었다. 검기가 늘어나며 허공에 기다란 궤적을 그렸다.
닭머리는 검을 향해 발을 휘둘렀다.
쩌엉! 마나와 마나, 검과 구두가 부딪히며 대기가 비명을 지르며 충격파가 퍼져나갔다.
그 직후, 끼기긱 소리와 함께 녀석의 구두가 찢어지며 조류 특유의 날카로운 발톱이 드러났다.
코르부스와 같은 반인 반조류?
여명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발톱이 콱 오그라들며 검을 쥐려 했다. 여명은 검을 횡으로 길게 휘둘러 녀석의 발톱을 역으로 벴다.
툭 잘린 발톱 하나가 떨어졌지만, 닭머리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생각보다 수준이 높군.”
여명의 감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 한 번의 격돌로 알 수 있었다.
닭머리는 강했다. 여태껏 싸워본 강자들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무슨 이유로 우리를 습격했나. 돈? 명예? 아니면 명령?”
녀석이 속삭였다.
“알고 있나? 나는 한국 정부에서 일하고 있다. 네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돈이건 명예건, 원하는 대로 주마.”
“….”
“너같은 인재라면 이 정도의 잘못은 전부 눈감아 줄 수 있다. 어떤가? 진짜 국민을 위하는 나라를 위해 일해보지 않겠나?”
지랄하고 있네. 여명은 주먹을 꽉 쥐고 뒤꿈치를 들었다.
그리고.
쿵!
진각으로 콘크리트 바닥을 강타했다. 두꺼운 콘크리트가 쩌저적 갈라지며 비명을 질렀다.
갑작스러운 진동에 말머리는 물론이고, 닭머리조차 균형을 잃고 몸을 휘청거렸다.
평소라면 금세 균형을 잡을 수 있었겠지만, 여명이 펼친 기술을 알아본 탓에 대응이 늦고 말았다.
비각술의 오의, 진각.
“…진각? 설마?”
놀란 닭대가리의 목을 향해, 복수의 칼날이 번쩍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