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58)
을 위한 세계는 없다-158화(158/817)
〈 158화 〉 19530305 (3)
* * *
***
살이 잘리고, 피가 튀었다.
검은 아슬아슬하게 경동맥을 비켜 갔다. 아주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그대로 목을 잘렸을 일격.
닭대가리는 왼손으로 목을 붙잡고, 또다시 목을 노리는 검을 향해 오른손을 휘둘렀다.
!!
마나가 담긴 주먹과 검이 부딪힌 충격이 공간을 뒤흔들었다. 닭대가리는 그 충격을 버텨내는 대신, 충격파를 이용해 뒤로 훌쩍 거리를 벌렸다.
탁 돼지머리의 시체 위에 착지한 닭대가리가 불타는 눈으로 여명을 노려보며 물었다.
“넌 대체 누구냐. 어떻게 비각술을 오의까지 익히고 있는 거지? 전용섭, 그 매국노조차 진각은 익히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거기까지 말한 닭대가리는 입을 다물었다.
뒤편에서 들리는 총소리와 마법의 충격파는 신경 쓰지 않는 상대의 침착함, 황금처럼 번들거리는 눈동자 속의 살기, 그리고 그 사이로 느껴지는 분노.
“…말이 통할 인간이 아니군. 뇌에서 직접 뽑아내야겠”
여명은 더 이상 입을 나불거릴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는 검기를 날리며 비각술을 밟았다.
닭머리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이 크게 부풀며 어마어마한 마나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변신?
아카데미에서 봤던 말머리와 달리, 녀석의 변신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이뤄졌다.
덩치가 거의 두 배로 불어나고, 어깻죽지에서 새로운 팔이 돋아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1초 남짓.
여명의 검이 지척에 이르렀을 때, 녀석은 이미 변신을 끝내고 날카로운 손톱을 휘두르고 있었다.
쩌엉 !
검과 손톱의 격돌, 그리고 곧바로 팔을 휘둘러 서로의 주먹을 부딪쳤다. 파양결과 뒤틀린 마나가 격돌하며 공기를 밀어냈다.
찰나 간의 진공 상태를 신호 삼아, 두 초인은 서로에게 연타를 시작했다.
네 개의 손, 두 개의 발. 닭머리의 날카로운 발톱과 손톱이 여명을 찢어발길 듯 일제히 움직였다.
흡사 고기 분쇄기를 떠올리게 하는 연격.
여명은 왼손에는 파양결을, 오른손 검에는 구궁검의 검기를 두른 채 분쇄기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검이 손톱을 튕겨내고, 손날이 발톱을 부러트렸다.
아슬아슬한, 그래서 더욱 살벌한 연격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닭머리가 부리를 쩍 벌리더니, 붉은 광선을 준비하기 시작했으니까.
광선이 녀석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과 여명의 주먹이 녀석의 부리를 후려치는 건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콰아아!!
닭머리의 고개가 돌아가며 광선이 애꿎은 허공을 수놓았으나, 여명은 추가타를 먹이지 못했다.
그가 광선을 막기 위해 주먹을 길게 뻗은 사이, 닭머리의 손톱이 옆구리를 깊게 찌른 탓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생과 사를 넘나들 중상.
여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휘둘러 닭머리의 목을 쑤셨다.
커헉 닭머리는 비명을 지르며 여명을 멀리 내던져 버렸다.
초인이라도 쉽사리 반응할 수 없을 만한 위력이었으나, 여명은 강풍에 휩쓸린 민들레 씨앗처럼 간단히 허공에서 자세를 바꾸더니, 탁 가볍게 착지했다.
그 꼴을 본 닭머리가 기가 막히다는 듯 지껄였다.
“너도 인간이길 포기한 거냐?”
여명은 대답 대신 마리지천공과 흑익류를 동시에 일으켰다.
그의 몸 주변으로 황금빛 깃털을 닮은 마나가 일렁거리기 시작하자, 닭머리가 퉤 피를 내뱉으며 말했다.
“그래, 괴물이라 이거지.”
어느새 상처를 모두 재생한 두 사람은 2차전을 시작했다.
여명의 얼굴 주변으로 열 개가 넘는 얼음송곳이 피어나고, 닭머리는 네 개의 손바닥에 각각 다른 주문을 응집했다.
쇠약, 실명, 통증, 감속.
네 개의 주문이 완성되기 직전, 여명은 얼음 송곳과 동시에 땅을 박찼다.
***
주문은 완성되지 못했다. 정확히 핀 포인트를 노리고 날아오는 얼음송곳 때문이었다.
그가 마나를 움직여 팔과 허공에 주문을 엮는 순간, 마나가 뭉치는 곳으로 3발의 얼음송곳이 쏟아졌다.
한두 발은 무시한다 치더라도, 마지막 세 발째가 문제였다.
주문을 망가트리는데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양.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노련함? 아니면 예리함? 아니, 이건 그런 영역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재능이다. 그것도 보통 사람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천부적인 재능.
어쩌다 저런 녀석이 한국의 적이 된 거지? 닭머리는 치솟는 의문을 삼키면서 다리를 휘둘렀다.
쩌엉 !
검을 막아낸 발톱을 따라 찌르르한 충격이 올라왔다.
막아냈다는 기쁨은 없었다. 초인의 속도를 감안했을 때, 곧바로 연타가 들어올 테니까.
그리고 그 확신대로, 상대의 검은 뱀처럼 휘어지며 그의 하체를 노렸다.
닭머리는 예상했다는 듯이 입을 벌려 저주의 광선을 발사했다.
콰아아! 광선이 땅을 그었을 때, 여명은 이미 멀찍이 거리를 벌린 뒤였다.
“미친놈.”
닭머리는 으르렁거리듯 숨을 헐떡이며 상대를 노려봤다. 대체 언제 챙긴 건지 모르겠지만, 여명은 그의 잘린 발톱을 들고 있었다.
수 싸움에서 졌군.
닭머리는 초조함을 숨기기 위해 주변을 훑었다.
계단의 바닥 저편에서는 두 명의 계집과 말머리들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막상막하였다.
망치를 든 계집의 실력이 상상 이상이라서? 아니면 염동력으로 띄운 소총들의 지원 사격이 위협적이라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말머리들이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피어나는 오색 찬란한 방어막이 가장 큰 문제였다.
자세히 보니, 방어막의 정체는 염동력으로 허공을 날아다니는 작은 상아색 막대기였다. 저건 대체 정체가 뭐지?
설마, 유니콘의 뿔?
닭머리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몰려오는 것을 느낀 바로 그 순간.
여명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닭머리가 아차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여명의 검이 그의 코앞으로 다가온 뒤였다.
파스스 ! 다급하게 보호막을 펼쳤으나, 시간 끌기조차 되지 못했다.
제기랄.
닭머리는 검이 가슴을 파고드는 와중에도 다리와 손을 펴 여명을 후려쳤다.
사람을 문자 그대로 회치고, 다져버릴 수 있는 일격이 서로를 강타했다.
푸드득 깃털이 튀고, 여명의 몸에서 피가 튀었다.
이쯤이면 다시 거리를 벌릴 만도 한데, 여명은 물러서지 않고 계속 닭머리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닭머리의 팔 한쪽이 잘려 나가고, 여명의 허벅지에 커다란 구멍이 났으나, 둘의 거리는 점점 더 좁혀지기만 했다.
이 개새끼가 여기서 끝을 보겠다고?
닭머리는 끓어 오르는 호승심을 억눌렀다. 그의 어깨에는 각하의 의지와 칠천만 한국인의 목숨이 걸려 있었으니까.
그는 부리를 악물고, 왼손을 휘둘렀다. 여명은 기다렸다는 듯 그 팔을 잘라내고, 그대로 목까지 노렸다.
그렇게 목이 잘리기 직전, 닭머리는 주문을 완성했다.
“시체 폭발.”
목표는 잘린 왼손.
쾅 ! 뼈와 살이 터져나가며 여명과 닭머리 사이를 밀어냈다.
어느새 말머리들이 있는 곳까지 밀려난 닭머리는 어깻죽지에 있는 팔로 땅을 짚고 빠르게 일어났다.
“팔!”
그가 외치자마자, 말머리 중 하나가 자신의 팔을 잘라 닭머리에게 던졌다.
팔을 받아 잘린 부위에 가져다 대니, 치이익 연기가 피어오르며 팔이 붙었다.
닭머리는 그와 마찬가지로 상처를 재생하는 여명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허벅지의 구멍이 메워지는 속도를 보니, 그보다 한 수 높은 재생력이었다.
대체 정체가 뭐지? 수인 혼혈이라도 되나?
“···미국이 보낸 것이냐?”
상대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황금색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휙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낸 뒤, 양손으로 검을 잡고 섰다.
흔히 검세라 불리는 자세.
처음에 날렸던 그 무지막지한 검기를 준비하려는 것일까?
닭머리는 혜성검을 떠올리며 본인도 마나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여명의 검에서 피어난 건 별의 빛이 아닌 우윳빛 검기였다.
뭐지?
어마어마한 마나가 응축되는 검기를 보며 닭머리는 자신도 모르게 기시감을 느꼈다.
저 검기,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인천 도살자?”
녀석이 한국 정부에게 도움을 요청해가며 얻으려던 검술의 검기가 딱 저랬다.
보는 것만으로도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우윳빛 검기.
하지만 어떻게? 인천 도살자는 분명 아카데미에 있을…
그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어떤 깨달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연달아 실패한 지구 쪽 계획들, 우연히도 계획을 방해한 초인, 인천 도살자, 아카데미 그리고… 장관이 자랑하듯 떠벌린 좋은 씨수말.
“설마?”
그때 우연인지, 아니면 필연인지 말머리와 싸우던 두 계집 중 망치를 든 계집의 가면에 금이 갔다.
그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그 푸른 눈동자는 너무나 익숙했다. 양치기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반항적인 눈동자.
“검은 양…? 그렇다면 너는…!”
깨달음이 교차하는 순간, 여명의 검이 느릿하게 허공을 베었다.
***
여명은 플레이어에게 훔친 검술의 진의를 알지 못했다.
속 빈 강정이나 다름없었지만, 훔친 검술치고는 쓸만했기에, 계속 써왔다. 그뿐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닭머리와 싸우는 내내 그의 검술은 다른 무술을 빨아들이며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마치, 빈 컵에 물이 차오르는 것처럼.
물론, 컵을 가득 채우지는 못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듯, 진의는 그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그가 휘두른 검에 실린 건 작은 깨달음이 전부였다.
후웅
우윳빛 검기가 허공을 가른 다음 순간.
양치기들의 몸에 붉은 실선이 그려졌다. 누군가는 팔에, 누군가는 허리에, 누군가는 목에.
“이런 젠”
말머리 하나가 무어라 지껄이기도 전에, 푸확 실선에서 검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양치기들의 재생력을 상회한 검격.
말머리 둘이 즉사했고, 거의 호각이나 다름없었던 닭머리의 허리가 갈라지며 후두둑 내장이 흘러내렸다.
“커허헉!”
전투가 일시 정지했다. 네티와 세티마저도 전투를 멈추고 여명이 일으킨 일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정작 여명은 기뻐하지도, 감탄하지도 않았다. 몸속에서 들끓는 마나를 억누르는 것만으로도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까닭이었다.
‘이건 함부로 쓸게 못 되는군.’
잠시 후, 마나가 정상화되고 나서야여명은 칼을 늘어트리고 한 발짝 내디뎠다. 이미 무력화된 양치기들은 대응할 준비도, 그렇다고 도망치지도 못했다.
그저 흉하게 일그러진 눈으로 다가오는 여명을 노려보았다.
“이, 이제 생각났다… 처, 천여명. 우, 우리를 감쪽같이 속이고 있었구나…”
여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화할 가치가 없었다.
속이고 이용하는 것, 그거야말로 한국 정부의 주특기 아니던가?
“하, 하하…! 어,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모르겠지만… 실수한 거다. 각하께서 너에 대해 알게 되는 순간… 너는…!”
“알리긴 뭘 알려? 너희는 여기서 다 죽을 텐데.”
닭머리의 말을 끊은 건 세티였다.
아직 말머리가 두 마리나 남아있고, 닭머리가 실시간으로 상처를 재생하고 있었음에도, 그녀는 승리를 확신했다.
“검은 양… 이 어리석은 가축아. 너는 언제나 반항적이었지. 그날, 하얀 양이 아니라 널 썼어야 하는데…”
“….”
하찮은 도발. 어느새 녀석들의 코앞까지 다가온 여명은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검을 들었다.
아직 상처를 회복하지 못한 닭머리는 그대로 토막 나는 듯했으나…
“대한민국 만세!”
죽은 줄 알았던 말머리 하나가 갑자기 자신의 목을 찔렀다.
자폭? 아니, 아니었다.
잘린 말머리의 머리에서 튀어나온 피는 순식간에 허공을 날아, 여명과 양치기 사이에 붉고 반투명한 보호막을 만들어냈다.
쩡 !!
다음 순간, 여명의 검이 보호막을 내려쳤고, 보호막은 부르르 떨면서 충격은 물론이고 마나마저 흡수했다.
흡사, 용의 비늘이라도 내려친 것 같은 반탄력.
“…같잖은 짓을.”
여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깟 보호막 따위 시간만 들이면 얼마든지 부술 수 있었지만, 문제는 바로 그 시간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닭머리는 그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녀석은 보호막 속에서 살아남은 말머리들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강성대국은 언제나 애국자의 피 위에 세워지는 법.”
그러자 말머리들은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목을 들이밀었다.
머리가 잘리며 검붉은 피가 튀고, 이번에도 피가 허공에 겹쳐지며 마법을 만들어냈다.
지이잉
겨우 사람 하나 들어갈만한 작은 구멍.
말머리를 둘이나 죽여가며 만든 마법치곤 볼품없었으나, 여명은 이를 악물었다.
누가 말해주지 않았음에도, 저 구멍이 공간 마법, 혹은 차원문과 비슷한 마법이라는 걸 알 수 있었으므로.
“이제 와서 도망치려는 거냐? 도망치지 마, 개자식아!”
네티가 대전차 로켓을 발사했지만, 보호막은 그것마저도 버텨냈다.
닭머리는 구멍과 그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부리를 벌리며 비웃었다.
“천여명… 희생양… 너희 모두…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여명은 그 순간에도 검을 내려치고 있었다. 뒤이어 세티의 망치가 더해졌지만, 보호막은 금이 가면서도 꿋꿋이 버텨냈다.
이대로 보내줘야 하나?
여명은 초조하게 생각했다.
이대로 녀석이 도망친다면 아카데미에 있는 세티의 자매들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 마저 위험해질 게 분명했다.
성녀, 코르부스, 그리고… 쇠미리.
그런데 어째서일까, 쇠미리를 떠올리는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쇠미리가 특별 수업 중 했던 말이 울렸다.
『그거 말고도 맞아본 마법 많잖아요?』
맞아본 마법?
그래, 그는 맞아본 마법이 어떤지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었다. 세티가 준 재능과 그의 재능이 합쳐진 결과였다.
그리고 그가 가장 많이 맞아본 마법은…
“…시체 폭발.”
여명의 눈이 붉게 물든 바로 그 순간, 닭머리의 주변에 쓰러진 말머리들의 시체가 부풀어 올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