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World For ■■ RAW novel - Chapter (160)
을 위한 세계는 없다-160화(160/817)
〈 160화 〉 19530305 (5)
* * *
***
[우리가 기다리던 손님은 아니로군.]다가오는 발소리, 점점 더 커지는 용의 목소리.
어째서다른 누구도 아닌, 카할 마그두가 이곳에 있는가? 의문의 답을 찾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여명은 자신과 문 바깥을 번갈아 보는 두 자매를 향해 입술을 움직였다.
물. 러. 나.
체력이 멀쩡하다면 모를까, 이미 연전을 거듭한 상황이었다. 그녀들을 지켜주며 싸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저 빌어먹을 해골용이 상대라면 더더욱.
여명의 표정이 너무나 심각한 탓일까, 세티는 남겠다고 고집부리지 않았다.
두 자매는 짧게 눈빛을 교환하고, 곧이어 무기고 입구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그렇게 두 사람이 발소리조차 남기지 않고 실험실을 벗어날 때쯤.
반대편 철문이 마치 거인의 손에 붙잡힌 것처럼 까가각 소리를 내며 찌그러졌다.
잠금장치고 뭐고, 음료수 캔처럼 찌그러진 문은 그대로 쓰러졌다.
쿵.
한데,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온 건 카할 마그두가 아닌, 고급스러운 복장의 노인이었다.
그의 손에는 기다란 황금 지팡이가 들려 있었는데, 지팡이 끝에 달린 커다란 루비에서는 마법의 잔향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문을 찌그러트린 마법을 펼친 게 저 노인이라는 증거.
여명은 눈살을 찌푸리며 피눈물의 환상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 사이, 푸른 귀화가 일렁거리는 해골이 딱딱거리며 방으로 들어섰다.
카할 마그두, 이번에도 본체가 아니라 스켈레톤을 이용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이번 스켈레톤은 어딘가 묘한…
그때, 노인의 목소리가 여명의 상념을 끊었다.
“꼬맹아, 서 궁정백과 괴물들은 어디 가고, 너 같은 놈이 여기에 있는 거냐?”
“….”
“척후병이냐? 아니면 괴물들이 벌써 그 애송이의 뒤통수를 친 거냐?”
“…그쪽이야말로, 여기에 어떻게 들어온 거지?”
“이만한 무기고의 입구가 서 궁정백의 땅 아래에만 있을까. 꼬맹아, 말 돌리지 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하거라.”
차원문 너머 귀족들 특유의 오만한 어투. 그 어투만으로도 노인의 정체를 떠올릴 수 있었다.
‘…남 궁정백. 도시에 몇 없는 진짜 귀족이라고 했었지.’
여명은 세티와 네티가 충분히 멀어졌다는 걸 확인한 뒤,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질문하기 전에, 그쪽 이름부터 밝혀.”
“…뭐라?”
“가장 기본적인 예절인데, 예절 교육을 받은 적 없나 보지?”
여명의 도발이 어지간히도 어이가 없었는지, 노인이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옆에 서 있던 카할 마그두의 해골이 푸흡, 웃음을 터트리는 순간, 여명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게 아니라면… 밝히기 부끄러운 이름인가?”
다음 순간, 노인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그는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꽝! 내려쳤다.
“…감히.”
전투를 직감한 여명이 주문을 엮는 사이, 궁정백은 버럭 소리쳤다.
“귀를 똑바로 열고 들어라! 이 천것아! 나의 이름은 오드리언 바 테리얼! 11대 동안 이곳을 지켜온 테리얼 가문의 현 가주이자, 황제께서 인정한 이 도시의 정당한 궁정백이다!”
“….”
“네놈이 감히 누구를 도발했는지 이제야 알겠느냐? 알았으면 어서 무릎을 꿇지 못할까!”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남 궁정백의 지팡이에서 묵직한 마나가 발사됐다. 문을 찌그러트렸던 바로 보이지 않는 힘 마법.
여명은 겁먹은 듯 뒤로 물러나면서, 준비한 주문을 은밀히 움직였다.
보이지 않는 염동력, 목표는 남 궁정백의 목.
남 궁정백의 마법과 여명의 염동력은 거의 동시에 서로에게 닿았다.
그렇게 여명의 어깨에 어마어마한 무게가 실리고, 염동력이 궁정백의 목을 꺾어버리려던 순간.
파직 !
카할 마그두가 손을 휘저어 두 사람의 주문을 동시에 튕겨냈다.
그제야 목 앞까지 온 염동력을 느낀 궁정백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잘못했으면 그대로 죽을 뻔한 상황이었으니까.
카할 마그두의 해골은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문명인들끼리 이게 무슨 짓인가. 대화로도 충분히 서로 원하는 걸 얻을 수 있거늘.
“….”
그렇게 생각지 않나? 천여명.
역시, 피눈물의 환상을 꿰뚫어 본 건가. 여명은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
“…우리가 사이좋게 대화나 나눌 사이는 아니지.”
오호, 그럼 싸우시겠다? 우리 둘 모두를 상대로?
“왜, 못할 것 같나?”
기습이 막힌 건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고분고분 대답해 줄 생각은 없었다.
들끓는 살기.
여명은 조용히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카할 마그두의 해골이 탁탁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약자의 용기라, 언제봐도 좋은 자세야. 내 죽은 심장마저 두근거리게 하는군.
“….”
하지만 그렇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닐 텐데? 서 궁정백과 한국 정부의 노예들… 살려뒀을 리는 없고. 죽이느라 꽤 고생했겠군. 안 그런가?
녀석은 여명의 상태를 짐작하듯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뭐라고 지껄이건, 여명은 상관하지 않고 온갖 전투 방법을 떠올리고 있었다.
파양결, 혈류가속, 마리지천공, 흑익류… 모든 수단을 일시에 사용해서, 일격 필살을 노린다?
아니면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서 무기고를 무너트려야 하나?
여명의 긴장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피부의 신경 하나하나가 날카롭게 선 그때.
카할 마그두가 제안했다.
내가 통 크게 제안하지. 발사 코드를 내놓게, 그러면 이번만큼은 살려주지. 자네와… 저 뒤편으로 도망친 두 계집도.
“…발사 코드?”
오, 모른 척하는 건가? 아쉽지만, 연기는 집어치우게. 서 궁정백은 몰라도, 한국놈들이 그것도 모르고 무기고를 뚫었을 리 없으니.
발사 코드란 단어가 나오자, 옆에 서 있던 남 궁정백의 눈에 탐욕이 깃들었다.
그 모습을 본 여명은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나 이 녀석들의 목적은 무기고 속에 잠들어 있는 그 물건이라는 걸.
이 무기고의 끝, 초인조차 접근할 수 없는 두꺼운 봉인 아래 잠들어 있는 그것.
그건 바로…
***
[핵미사일.] [이 도시의 지하에는, 핵미사일이 잠들어 있다.]여명의 기억 속, 피눈물의 열쇠 벤은 그렇게 말했었다.
[왜냐고? 흐음,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그래, 이 단어부터 시작해보지. 상호확증파괴.]상호확증파괴, 정식명칭은 Mutually Assured Destruction, 줄여서 MAD.
그것은 핵무기를 가진 두 개의 국가가 핵전쟁을 벌일 경우, 양측 모두가 공멸한다는 핵전략 이론이었다.
[알다시피, 미국과 소련은 지구 전체를 날려버릴 만큼 많은 핵무기를 찍어냈다. 그리고 그런 핵무기가 쌓일수록, 파멸을 피하기 위한 발버둥도 함께 발전했지.]…벙커 같은 거 말입니까?
[그래, 더 깊은 방공호를 파고, 순간이동을 연구하고… 기어코 차원문 기술까지 발전시켰어.]차원문?
….
[그 정보를 얻은 스탈린이 어떤 답을 내놨을 것 같나? 간단했어. 그는 차원문 너머에도 핵을 쏘면 그만이라고 말했다.]…미쳤군요.
[그래, 그는 미친 시대에 걸맞은, 미친 지도자였다. 그리고 몰락하기 전 소련은 그런 광기를 현실에 구현할 수 있는 나라였고.]기억 속의 벤은, 어딘가 고통스러워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도시야말로 그 광기의 증거지. 황제의 궁정을 강제로 빼앗고, 그 위에 콘크리트를 부어 만든 비밀 핵미사일 기지.]….
[상상이 되나? 발사 코드만 입력하면 차원문 너머 모든 주요 도시와 차원문을 폐허로 만들 수 있어.]상상할 수 없었다. 나가사키와 히로시마, 그리고 세계수 이후 핵무기가 실전에서 사용되는 일은 없었으니까.
[충격적이지? 이래서 가능하다면 우리 푸른 쥐가 이곳을 손에 넣길 바랐건만… 언제나 그렇듯이, 운명이 우리 편이 아니로군…]길어지는 말꼬리, 날카로워지는 눈동자.
[천여명, 새삼스럽지만, 부탁이 있다.]…말씀하시지요.
[핵미사일의 발사 코드를 넘길 테니… 무기고 지휘소로 가서 핵무기를 손에 넣어라. 적어도 다른 멍청이들이 손에 넣지 못하게 해.]기억 속 여명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벤은 코드를 입에 올렸었다.
[19530305.] [이게 도시의 모든 핵무기 제어권을 얻기 위한 발사 코드다.]무슨… 날짜 같은데요. 어떤 기념일입니까?
[그건 우리도 모른다. 아니, 이 세상 누구도 모르겠지. 스탈린이 직접 만든 코드인데, 정작 그날에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거든.]….
[…아무튼, 중요한 건, 이 코드에 담긴 비밀이 아니라, 이 코드로 할 수 있는 일이다.]할 수 있는 일. 여명이 기나긴 고민에 빠지려는 순간, 그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네가 무슨 결정을 할지 모르겠지만… 후회 없는 결정을 내리길 바라마.]***
다시, 현재.
여명은 자신을 바라보는 남 궁정백과 카할 마그두에게 핵 시설이 있는 걸 어떻게 아느냐고 묻지 않았다.
무기고를 들락날락할 정도라면 나름의 정보가 있다는 뜻일 테니까.
그는 마나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대체 무슨 발사 코드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다. 서 궁정백도, 한국 정부 놈들도 입을 놀리기 전에 전부 죽여버렸거든.”
대답을 들은 남 궁정백은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아니, 어쩌자고 그런 귀중한 정보를 듣지도 않고 죽인단 말인가! 이래서 천것들이란!”
“….”
“불사룡, 지금 당장 녀석을 죽이고 서쪽 놈의 시체를 찾아 좀비로 부활시켜야 하네! 혹시라도 시체가 상하면 우리 계획은 전부 물거품이야!”
남궁정백은 호들갑을 떨었으나, 카할 마그두는 무덤덤했다.
천여명, 별의 선택을 받은 지구인아. 나는 진심으로 널 살려줄 생각이었다.
해골이 달그락거리고.
일이 이렇게 되어 유감이구나. 성녀의 앞에서 죽이고 싶었거늘.
텅 빈 해골의 눈구멍 사이, 이글거리는 불길이 여명을 향했다.
다음 순간.
여명이 익히고 있는 모든 기술을 폭발시키며 검을 휘둘렀다.
그를 노리던 반투명한 마나가 검과 흉측한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갔다.
여명은 휘청 밀려나는 검을 잡고 자세를 바로잡으려다가 뒤이어 날아오는 푸른 화염을 보고 그대로 뒤로 몸을 날렸다.
콰아아!!!
푸른색으로 일렁거리는 용의 불꽃이 그가 서 있던 자리를 가득 채웠다.
스켈레톤 상태로 브레스를 쏘다니, 엿 같은 용 같으니라고.
실험실 바깥, 복도까지 굴러간 여명은 반동을 이용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직후, 번쩍거리는 벼락이 그를 덮쳤다.
파츠츠! 검기가 벼락을 후려치기 무섭게, 빛이 터지며 여명은 한 발 더 뒤로 밀려났다.
그새 또 실력이 늘어났나? 놀랍군!
카할 마그두의 감탄, 그리고 연이은 벼락 마법.
터져 나오는 빛에 눈이 아릿하고, 공기를 달구는 소리에 귀가 저릿했다.
여명은 벼락을 베어낸 뒤, 본능적으로 염동력을 펼쳤다.
쾅!!
역시나, 다음 순간 남 궁정백이 쏘아낸 보이지 않는 힘 마법이 염동력을 후려쳤다.
철문을 가볍게 으깨버릴 위력의 마법은 순식간에 염동력을 박살 냈으나, 그 짧은 시간 덕분에 여명은 바닥을 굴러 마법을 피할 수 있었다.
여명을 끝장낼 절호의 기회를 놓쳐서일까, 남 궁정백이 버럭 소리 질렀다.
“불사룡! 뭣 하는 건가! 어서 끝내게!”
닦달하지 말게, 존중할 만한 적을 쉽게 이기려 하면 안 되는 법이야.
“존중은 무슨, 저깟 지구인 잡종을”
그 순간, 여명의 검에서 혜성의 빛이 번쩍이며 무기고 복도를 가득 채웠다.
혜성검? 발동 속도가 몰라보게 빨라졌군.
남 궁정백이 기겁하며 보호막을 펼치고, 그 위로 카할 마그두가 한 번 더 보호막을 겹쳤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용의 불꽃을 일으켜 보호막을 감싼 직후.
!!!
남 궁정백의 보호막은 혜성검과 부딪히는 순간 설탕 과자처럼 조각났다.
카할 마그두의 보호막에도 쩌저적 금이 갔으나, 힘을 잃은 혜성검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폭발해버렸다.
충격파에 휩쓸린 남 궁정백의 옷이 펄럭거렸다.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는 모습이 몹시 당황스러워 보였다.
그 사이, 여명은 얼음송곳과 염동력을 동시에 일으켜 궁정백을 노렸다.
얼음송곳은 간, 염동력은 목.
하나를 막아도 하나가 치명상이 되는 연계 공격. 카할 마그두는 감탄하며 궁정백 대신 주문을 막아냈다.
마법까지 이런 수준이라니. 용이 따로 없군. 용의 혈통이라도 타고난 건가?
“닥쳐.”
혜성검에 이은 연계 공격까지 전부 막힌 여명은 이를 물었다. 역시 마법사 둘을 혼자 상대하는 건 쉽지 않았다.
세티와 함께 싸웠어야 했나? 아니, 그와 달리 그녀들은 체력을 회복할 시간이 없었…
여명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벼락 마법을 한 번 더 막아내던 그 순간.
무기고 복도 저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형부! 첫 번째 창고까지 후퇴하세요!]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낭랑한 네티의 목소리. 아직 무기고를 벗어나지 않은 건가? 왜?
도망가지 않았다고? 이래서 계집들이란. 수컷이 희생하는 장면을 망치다니.
카할 마그두가 이죽거렸으나, 여명은 비각술을 펼쳐 뒤로 쭉 물러났다.
물론, 카할 마그두와 남 궁정백은 여명이 물러나는 걸 쉽사리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가속 마법을 펼쳐 자신의 속도를 높이고 온갖 공격 마법을 발사해 여명의 발목을 잡았다.
화염구, 벼락, 보이지 않는 힘, 얼음창, 용의 불꽃…
여명이 그 모든 마법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네티의 목소리를 향해 달렸다.
총기 창고를 넘고, 복도를 내달린 끝에 드디어 첫 번째 창고, 그러니까 탱크가 주차된 방에 도달할 때쯤.
네티가 또 다시 소리쳤다.
[형부! 엎드려요!]“뭐?!”
엎드려? 왜? 의문이 솟아났으나, 여명은 네티를 믿었다. 정확히는, 네티 옆에 있는 세티를 믿은 거지만…
그 믿음은 헛되지 않았다.
여명이 그대로 복도 바닥에 엎드린 순간, 창고의 문이 벌컥 열리며 그 안에서 준비하고 있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T82, 혹은 땡팔이.
탱크?
네티가 꼭 타보고 싶다던 전차의 포신이 삐쭉 복도로 고개를 내밀더니, 그대로 불을 뿜었다.
* * *